print

인질 몸값 줬다면 누가 부담해야 하나

인질 몸값 줬다면 누가 부담해야 하나

한국인 인질 21명이 무사히 풀려났다. 정부는 부인했지만 탈레반의 한 고위 인사는 인질들의 몸값으로 2000만 달러 이상을 지불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 돈은 누가 내야 하는가? 인질이 모두 풀려난 직후인 8월 31일 청와대 브리핑 시간에 제기된 질문이었다. 천호선 대변인은 “앞으로 검토하더라도 법적으로 불가피한 부분에 한해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구상권을 행사한다 해도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말이다. 구상권이란 남의 돈 또는 채무를 대신 갚은 사람이 당사자에게 돈을 청구하는 권리다. 이번 피랍사태 해결에 든 비용을 정부가 피랍자나 샘물교회에 요구하는 경우 사용될 말이다. 정부는 지금까지 크게 세 가지 비용을 지불한 셈이다. 하나는 시신 운구 비용, 석방 인질 21명의 항공료, 기타 후송에 든 비용이다. 두 번째는 석방 교섭차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공무원들의 출장비다. 세 번째가 정부는 부인하지만 개연성이 높은 몸값, 혹은 경제적 반대급부 제공 약속 등이 있다. 첫 번째에 해당하는 비용은 샘물교회 측도 피랍자 항공료와 운구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밝혀 말썽의 소지가 거의 없다. 일본의 사례도 있다. 일본은 2004년 4월 이라크에서 무장단체에 잡혔다 풀려난 일본인 5명의 항공료와 기타 비용에 구상권을 행사했다. 이라크 입국 자제 권고를 무시하고 입국한 데 따른 책임을 물은 셈이다. 일본 정부가 행사한 구상권의 범주는 샘물교회가 부담하겠다는 비용 범위와 일치한다. 법무법인 한중의 황창근 변호사는 “본인이 지출해야 하는 필요비용 정도는 반환 받는 게 국민 일반의 정서”라고 말했다. 문제는 두 번째, 세 번째 비용이다. 정부 공무원 출장 비용과 정부가 부인하는 몸값의 구상권은 간단치 않다. 정부는 재외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헌법 2조 2항)가 있다. 그래서 정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려면 어떤 일이든 해야 한다. 김선택 고려대 교수(헌법)는 “재외국민 보호에 정부는 무한책임을 진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아프가니스탄 사건처럼 정부가 가지 말라는데 억지로 간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무한책임을 져야 할까? 일반 국민 입장에서는 내가 낸 세금이 헛되이 쓰인다는 반감을 가질 법도 하다. 예민한 사안임을 이유로 익명을 요구한 정부의 한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몸값을 준다면) 일단 정부 예비비에서 처리한 뒤 사후 정산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즉, 탈레반이 요구하는 돈을 정부가 대주고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구상권을 행사한다는 말이다. 설령 돈을 주고 풀려났다고 해도 관례상 공개리에 이를 인정하진 못하므로 비밀리에 논의되리라 추측된다. 법조계의 법리 해석은 엇갈린다. 우선 구상권 행사가 가능하다고 보는 쪽에서는 민법 750조(불법행위의 내용)가 포괄적으로 원용된다는 입장이다. 민법 750조는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돼 있다. 정부는 여권법에 따라 지난 8월 1일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소말리아 3개국을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하고 8월 7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꼭 필요한 경우는 정부의 사전 허가를 받아 방문해야 한다. “앞으로 이들 국가에 무단 입국했다 납치돼 정부가 몸값을 무는 경우는 750조에 따라 구상권 행사가 가능하다”고 누리합동법률사무소의 최문기 변호사는 말했다. 최 변호사는 2004년 김선일씨 피살 사건 당시 여권법 등 재외국민 보호 관련 법령을 연구했다. 하지만 이번에 피랍된 한국인들은 여행금지국가로 지정된 8월 이전에 아프가니스탄에 입국해 여권법상 여행금지 조항을 어기지 않았다. 단지 정부의 거듭된 여행 자제 권고를 무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구상권 행사가 불가능하지 않다”고 최 변호사는 해석했다. 피랍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여행금지국가’는 아니었지만 ‘여행 신고 대상 국가’로 지정돼 있었고, 정부는 여권법과 시행규칙에 따라 입국에 앞서 신고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하지만 피랍자 대다수는 그런 절차를 지키지 않았다. 이 역시 위법행위다. 따라서 정부가 몸값 구상권을 행사할 길이 열려 있다는 말이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변호사는 “피랍자 혹은 그 가족이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석방되기를 원했다면 법리적으로 국가의 구상권 행사가 가능하다”고 봤다. 피랍자 혹은 가족이 몸값 제공에 동의한 이상 파랍자의 채무를 국가가 대신 변제했다는 법리 구성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반면, 몸값 구상권 행사가 어렵다는 견해도 만만찮다. 이종수 연세대 교수(헌법)는 “만약 풀려난 인질이 국가에 ‘내가 언제 납치범에게 돈을 주라고 했느냐’고 한다면 대책이 없다”고 말했다. 즉, 인질이 자기 몸값이 얼마인지를 모르는 데다, 동의한 바도 없으므로 국가가 구상권을 행사할 근거가 희박하다는 말이다. 임광규 변호사는 “테러집단에 돈을 주는 행위는 ‘불법원인급부’이므로 갚으라고 요구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김재형 서울대 교수(민법)도 같은 생각이다. “민법 750조에 따르더라도 정부가 손해를 보았다고 보기 어렵다”며 구상권 행사에 부정적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몸값을 정부가 지급할 의무가 없는데 지급했으므로 민법 750조에 따른 손해라고 보기 어렵다는 해석이다. “불법행위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몸값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설령 법리상 가능해도 바람직하냐는 점에서는 의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고려대 김선택 교수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개인이 전액 부담하기 어려우니 그럴 바에야 기존의 다른 방식으로 제재하는 편이 낫다”고 했다. 해외여행 혹은 여권 재발급을 금지하거나, 여권법에 규정된 징역형과 벌금형으로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면 된다고 했다. 민사상 손해배상보다는 행정제재나 여권법에 따른 형사처벌이 더 현실적이라는 말이다. 몸값 구상권 문제가 불거지면 헌법 논쟁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국민 보호 의무를 진 국가가 의무 이행에 든 비용을 국민에게 부담시키는 행위가 타당한가를 둘러싼 논리 격돌이다. 변호사 출신의 최재천 국회의원(통일외교통상위)은 “국가의 자국민 보호의무와 한계를 둘러싼 헌법 논쟁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민법 750조가 국가의 의무이행에도 적용되는가도 찬반 양론이 맞선다. 최 의원은 “생명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 불법청구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판결도 있다”고 밝혔다. 헌법논쟁이 벌어지면 인질 사태의 원인을 궁극적으로 제공한 주체가 정부라는 주장도 나옴직하다. 탈레반이 한국군 철수를 명분으로 납치극을 벌였으므로 그곳에 군대를 파견한 정부의 책임도 도마에 오르게 된다. 사안의 성격상 정부가 법정에서 구상권을 다투기엔 많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또 공식적으로는 몸값을 지불하지 않은 정부가 안 주려는 개인을 상대로 몸값 소송을 제기한다면 자기 모순이다. 또 그렇게까지 해가며 돈을 받아내야 하느냐는 고민도 있다. 외교통상부도 적잖이 곤혹스럽다는 표정이다. 한 서기관은 “법률자문 과정에서 구상권 행사가 어렵다는 의견도 있었다”고 말했다. 몸값뿐 아니라 정부가 현지에 정부종합대책반을 꾸리고 탈레반과 접촉하는 데도 많은 예산이 들어갔다. 외교부에서만 10명이 넘는 인원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날아갔다. 정부가 전체 대책반 규모와 예산을 밝히지 않아 정확한 금액은 알 길이 없다. 다만 2004년 10월 당시 열린우리당 김성곤 의원이 국회에 제출한 ‘재외국민보호법안’에 첨부된 비용 추계서로 대략 가늠된다. 추계서는 해외 위난 상황 조사단을 파견할 경우 ‘2005년 예산안 편성지침 및 기준’에 따라 항공료와 숙식비로 500만원에서 350만원을 책정했다. 외교부 관계자에 따르면 이런 돈은 당사자들에게 청구하지 않는다. 재외국민 보호 의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이 지출한 비용을 국민에게 떠넘길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학자나 변호사들도 이런 비용은 국가가 부담해야 한다고 본다. 재외 국민이 무더기로 무장단체에 피랍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 국민여론도 흥분했고, 정부도 경황이 없었다. 인명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따져볼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인명피해가 확대됐다면 12월 대선을 앞두고 반미감정으로 번졌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한국 정부뿐 아니라 미국 등 주변국의 관심과 우려도 또 하나의 고려 요인이 됐음직하다. 독일처럼 테러단체와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우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그렇다 보니 “정부의 인질 구출은 잘한 일이지만 정부가 후속조치를 깊이 고려하지 못한 것 같다”고 백태승 연세대 교수(민법)는 말했다. 앞으로 유사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정부는 무상으로 몸값을 지불하지 않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또 한국 정부가 인질범에 굴복했다는 인상을 국제사회에 너무도 뚜렷이 남겼다는 점도 또 다른 부담이다. 매년 1200만 명의 국민이 해외여행을 떠난다. 일부 개신교 단체는 적극적 해외선교의 필요성을 다시 언급하고 나섰다. 정부 또한 해외 파병을 국익 차원에서 늘려가자는 입장이다. 이래저래 해외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은 테러 혹은 납치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청와대는 “이번 경험을 차분히 돌이켜보고 필요하다면 대응 매뉴얼을 개발하겠다”(천호선 대변인)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앞질러졌다. 이번 인질사태는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남겼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넷마블, ‘나 혼자만 레벨업:어라이즈’ 글로벌 정식 출시

2카카오게임즈, 1분기 영업익 123억원 달성…2분기부터 글로벌 신작 출시

3데브시스터즈, 1분기 영업이익 81억…흑자 전환

4창립 100주년 하이트진로, 잇단 품질 논란…식약처 입장은

5기업 임원 10명 중 8명 “22대 국회서 노동 개혁 입법 추진해야”

6 카카오뱅크 “올해 연간 NIM 목표 2.2%”

7SKT, 1분기 영업익 4985억원…전년비 0.8%↑

8흥국화재, ‘암 전단계 48개 질병 수술비’ 보장상품 확대

9“신차 수준으로 변했다”...KGM, ‘더 뉴 토레스’ 국내 출시

실시간 뉴스

1넷마블, ‘나 혼자만 레벨업:어라이즈’ 글로벌 정식 출시

2카카오게임즈, 1분기 영업익 123억원 달성…2분기부터 글로벌 신작 출시

3데브시스터즈, 1분기 영업이익 81억…흑자 전환

4창립 100주년 하이트진로, 잇단 품질 논란…식약처 입장은

5기업 임원 10명 중 8명 “22대 국회서 노동 개혁 입법 추진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