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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 여자 축구선수의 투혼

노장 여자 축구선수의 투혼


미국 대표 팀 주장 릴리, 36세에도 빼어난 기량 뽐내 8년 전 미국 여자 축구 대표 팀이 월드컵에서 우승했을 때 크리스틴 릴리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 언론의 관심은 미국 스포츠계에서 외면 받던 여자축구에서 새로운 부류의 영웅들을 탄생시켰지만 사진발이 잘 받는 수퍼스타 미아 햄에게만 집중됐다. 릴리는 17년 동안 햄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릴리는 80년대부터 활약해온 선수들 중 유일하게 국가 대표 팀에 남아 있다. 가장 놀라운 점은 36세의 나이에도, 또 20년 간의 선수 생활 뒤에도 릴리가 여전히 정상급 기량을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2006년에는 세계 ‘올해의 선수’ 후보에 올라 차점을 기록했다. 현재 그녀는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자 축구선수다. 이번 주 릴리는 미국 대표 팀을 이끌고 중국에서 열리는 2007 FIFA 여자축구 월드컵에 참가한다(동료들은 그녀를 ‘할머니’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동료들 중에는 릴리가 축구선수로 데뷔했을 때 기저귀를 찬 갓난애기였던 선수들도 있다). 릴리로서는 다섯 번째 월드컵 참가다. 축구는 끊임 없이 달려야 하는, 따라서 비범한 체력이 요구되는 경기다. 게다가 릴리는 함께 달리는 선수들의 대다수보다 열 살이나 많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대표 팀에서 가장 컨디션 조절을 잘하는 선수다. 그녀의 끊임없는 질주는 미국 팀 공격력의 핵이다. 릴리는 “선수라면 자신의 체력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면서 요즘에는 코치와 트레이너들의 도움을 받고 또 첨단 운동시설을 맘껏 활용하기 때문에 몸 관리가 비교적 수월하다고 말했다. “우리 세대가 겪었던 일을 후배들에게 들려준다. 과거에는 한 번에 5개월씩이나 완전히 혼자서 훈련하곤 했다. 그럴 때면 달리기를 하거나 벽을 향해 공을 차면서 지냈다.” 2005년 국가 대표 팀 감독으로 부임한 그레그 라이언이 볼 때 릴리는 축구에 인생을 바친 사람이다. 릴리는 국가 대표 팀 소속으로 331경기에 출전했다. 역사상 어떤 남자나 여자 선수보다 많은 출장 횟수다. 또 미국 대표 팀이 참가한 모든 월드컵과 올릭픽 경기에서 선발 출전했다. 그러나 라이언 감독은 릴리가 단순히 옛 영광을 떠오르게 하는 존재 이상의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고 굳게 믿는다. 대표 팀의 초석이 되는 둘도 없는 인재라고 확신한다.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그녀를 주축으로 하는 전술을 만들었다”고 라이언은 밝혔다. 릴리는 비중이 커진 자신의 새로운 역할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축구는 단순한 경기다. 크게 변할 만한 요소가 없다.” 그 단순성을 유지하는 방법도 단순하다. 동료들 간의 의사소통을 어렵게 만들고 실수로 이어지는, 불필요하게 화려한 동작이나 과시성 발놀림을 피하면 된다고 한다. 대표 팀의 핵심 득점원인 애비 왬바크(27)는 이렇게 말했다. “훈련할 때 릴리 선배의 자세를 보면 경외심이 든다. 만사를 올바르게 처리하고, 또 몹시 쉬워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훈련 일과가 끝났을 때 축구공은 언제나 선배의 발 밑에 있다.” 미아 햄의 시대에서 릴리 시대로의 변천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중국 월드컵으로 가는 길에도 장애물이 거의 없었다. 대다수 축구 평론가는 고참선수들이 빠진 미국 팀의 전력이 약해지리라 예측했다. 그러나 릴리와 미국의 ‘차세대’ 대표 팀은 37승 1패 6무의 전적을 올렸다. 2006년 독일 팀과의 승부차기에서 패배한 일이 유일한 오점이다. 그리고 미국 팀은 FIFA 랭킹 세계 1위 자리를 되찾았다. 릴리는 특유의 과묵함을 털어내고 잔소리 많은 주장으로 나섰다. 그녀는 미국 팀이 월드컵과 올림픽에서 각각 두 차례나 우승한 일은 운명이었으며 그 점을 팀원들이 명심하기 바란다. 그러나 릴리는 공식적으론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로지 중국 월드컵에서 미국 팀의 앞길에 놓여 있는 문제만을 생각한다. 미국은 지난번 우승국인 독일보다 더 유력한 우승 후보다. 30대에 들어선 햄과 여타 고참 선수들은 아테네 올림픽의 금메달을 끝으로 은퇴했다. 그때 릴리는 “동화 같은 결말”에 스릴을 느꼈지만,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회상한다. 또 릴리는 당시 선수들 중 유일하게 미혼이었다. “옮겨가야 할, 인생의 또 다른 무대”가 없었다. 그 뒤 보스턴에서 한 소방대원을 만났고, 지난해 가을 그와 결혼했다. 마침내 그녀를 기다리는 다음 무대가 마련된 셈이다. 왬바크는 “릴리 선배가 마지막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은퇴하기를 모두가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릴리 역시 옛 동료들의 금메달 은퇴식을 자신도 재현하고 싶을 것이다. 그녀는 고참이든 신참이든 모든 동료에게 약속했다. “모두들 내가 크게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번에 우승하면 그런 모습을 보여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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