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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폭풍이 낳은 영화들

쿠데타 폭풍이 낳은 영화들

더그 존스 미국 해병대 대위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때는 코소보 전쟁이 한창일 무렵. 존스는 유고슬라비아의 목표물에 폭격을 가하는 나토군의 보급품 수송 책임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와 대원들을 태운 기차가 루마니아의 작은 마을 카파르니타에 멈추자 존스 대위는 황급히 내려 무슨 일인지 알아봤다. 역장인 도리아루가 통관서류의 미비를 근거로 기차의 통과를 거부했다. 정부 부처 간에 책임이 전가되는 동안 카파르니타 주민들은 미군의 발이 마을에 묶인다는 생각에 환호했다. 낭패감에 휩싸인 존스는 위치를 확인하려고 지도를 꺼냈다. 대원 한 명이 지도상의 위치를 지적했다. 화가 난 존스가 분기탱천해 외쳤다. “루마니아의 외딴 곳에 꼼짝없이 갇혔군. 얼마나 더 지체돼야 해?” 기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장면을 담은 카프카식 루마니아 코미디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g)’은 흥행 고지를 달린다. 이 영화는 금년 칸 영화제에서 전도유망한 재능을 지닌 감독에게 수여하는 ‘주목할 만한 시선(Un Certain Regard)’ 최우수작품상을 받았으며, 브뤼셀 영화제에서는 관객상을 받았다. 애석하게도 감독인 크리스티안 네메스쿠는 자신의 영화계 데뷔 성공과 조국의 영화산업이 꽃피는 모습을 못 보고 2006년 8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네메스쿠의 사후 성공 외에도 크리스티안 문주의 ‘4개월 3주 이틀(4 Months, 3 Weeks and 2 Days)’은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공산주의 몰락 이전에 불법 낙태를 시도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두 영화 이전에도 루마니아 영화는 이미 지난 몇 년간 찬사를 받아 왔다. ‘라자레스쿠씨의 죽음(The Death of Mr Lazarescu)’은 2005년 칸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고, ‘내가 세계의 종말을 맞은 방법(The Way I Spent the End of the World)’은 2006년 칸 영화제에서 같은 부문의 최우수 여우상을 받았으며, ‘부쿠레슈티 동쪽의 12시 8분(12:08 East of Bucharest)’은 지난해 코펜하겐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고, ‘청색 서류(The Paper Will Be Blue)’는 지난해 사라예보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의 영예를 안았다. 최근 쿠데타 등으로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은 나라 중 영화산업이 호황을 누리는 국가가 루마니아만은 아니다. 나이지리아는 저예산의 대중영화 제작에서 미국과 인도 다음가는 세계 3위의 영화 대국으로 ‘날리우드(Nollywood)’의 본거지다. 이곳은 양질의 극영화 제작을 통해 급격하게 명성을 얻어 간다. 최근 국제적 성공을 거둔 작품들로는 양모로부터 전통적인 속죄 의식의 수행 압력을 받는 젊은 건축업자를 다룬 ‘이라파다(Irapada)’와 시에라리온 소년병들의 고난을 다룬 ‘에즈라(Ezra)’가 있다. 그리고 태국에서 실험적 영화를 만드는 아피차트퐁 위라세타쿨과 펜-에크 라타나루앙은 국내 검열에 대항하면서도 해외에서는 ‘책략(Ploy)’과 ‘신드롬과 한 세기(Syndromes and a Century)’ 같은 영화들로 이름을 얻었다. 이들 3개국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최근의 사회적 변혁이 영화제작자들의 창의성을 자극했다는 점이다. 변혁의 후유증을 앓는 이 나라들이 관심을 받으면서 영화 산업도 활기를 띠었다. 루마니아는 지난 1월 유럽연합(EU)에 갓 가입했지만 공산주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즉결 처형된 후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독재정권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나이지리아는 부패한 군부독재 종식 후 8년간 불안정한 민주체제를 유지해 왔다. 태국의 경우 2006년 9월의 쿠데타 이후 19세기 농업사회를 지향하는 국왕의 보수주의적 국가관을 수용하는 쿠데타 세력이 통치한다. 이들 나라에 느끼는 국제 사회의 호기심이 영화산업의 호황에 도움이 된다. 1990년대 후반 혁명 후의 이란 영화가 관객을 모으고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던 현상과 같다. 런던 영화제의 예술감독 샌드라 헤브론은 “격심한 사회적 변혁과 불안을 겪을 때 사람들은 그런 현상을 분석하거나 해결책을 찾기 시작하며 영화제작자들은 그 과정에 동참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영화제 기획자들은 제3세계의 뛰어난 신진 배우나 앞으로 뜰 영화제작 국가를 늘 찾아 나선다. 영국의 영화잡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Sight and Sound)’의 편집인 니크 제임스는 이렇게 말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한두 사람의 영화감독이 눈에 띄는 영화를 만들면 관심을 증폭시키는 밴드왜건(bandwagon) 효과가 나타난다.” 현재 활동하는 일단의 영화감독들은 그들의 조국이 안은 문제들을 회피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맞서는 쪽을 택한다. 2006년 ‘부쿠레슈티 동쪽의 12시 8분’을 감독한 루마니아의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는 “뉴웨이브 감독들은 사회적 현상을 외면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같은 장르는 없지만 영화와 영화의 사회적 역할을 보는 견해는 같다”고 말했다. 1999년을 무대로 한 이 영화는 10년 전 혁명에서 자신들이 맡았던 역할을 회상하는 세 남자들을 은은하면서도 재미있게 조망한다. 2년 전 나온 크리스티 푸이우 감독의 ‘라자레스쿠씨의 죽음’은 루마니아의 비효율적인 의료체계를 고발했다. 노년의 라자레스쿠는 병으로 쓰러져 구급차를 부르지만 병원들의 책임 회피로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게 된다. 크리스티안 문주의 ‘4개월 3주 이틀’은 낙태라는 사회적 논쟁의 문제를 다뤘다. 2006년 ‘사랑의 열병(Love Sick)’을 감독한 튜도르 기울지우는 루마니아의 영화산업 진흥조직체 회장이다. 그는 “우리 세대 감독들은 공산주의가 몰락할 때 10대 후반의 나이로 모든 변화의 와중에 있었다”고 말했다. “현재 루마니아는 살기 좋은 시기를 맞았다. 주변은 생동감으로 넘치고 빠른 변화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날리우드 영화가 어필하는 이유는 내전과 빈곤, 이주 등 현재 아프리카가 안은 문제들에 기꺼이 맞서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나이지리아 영화사의 경영자들이 자국 영화산업의 홍보차 런던에서 회합을 했고, 지난 10월에는 ‘이라파다’ ‘에즈라’, 그리고 보스와의 관계 단절을 결심한 두 친구를 다룬 단편영화 ‘지역 소년들(Area Boys)’ 등 수상작 3편이 런던영화제에서 시사회를 가졌다. 관객들도 나이지리아 영화의 정제되지 않은 에너지를 높이 평가하며, 때로 보이는 질 낮은 음향과 영상조차 진정한 대중적 느낌으로 받아들인다. 나이지리아 유산을 존중하라는 교훈적 이야기를 담은 ‘이라파다’는 대부분의 나이지리아 영화가 지닌 교훈적 성격을 전형적으로 표현했다. ‘굴레 속의 삶(Living in Bondage)’은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린 추장의 아들이 재산상속을 못하도록 획책하는 악한들을 그린 영화로, 나이지리아의 큰 사회적 문제인 부(富)의 분배 문제를 주제로 다뤘다. 나이지리아 영화들은 불과 몇 주 만에 제작·배급되기 때문에 제작 시점의 사회적 분위기를 측정하고 반영하는 일이 가능하다. 나이지리아 영화의 홍보기구 게마프리크(Gemafrique)의 사무국장 차이크 마두에크웨는 “현재 나이지리아 영화는 지구촌 팝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중요한 점은 나이지리아인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태국의 영화제작자들은 그런 면에서 국내 여건상 많은 장애가 있다. 소수의 출품작만이 베니스 영화제나 토론토 영화제 같은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다. 라타나루앙의 꿈같은 사랑이야기 ‘책략(2007년)’과 200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위라세타쿨(서양식 이름은 조) 감독이 만든 110만 달러짜리 신비스러운 새 영화 ‘신드롬과 한 세기(2006년)’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태국 영화는 종교, 정치, 섹스, 왕실 등 금기시 되는 주제들을 다루지 못하며 경찰은 1930년에 제정돼 아직도 효력을 발휘하는 법률에 근거해 검열 권한을 지닌다. 결과적으로 기타를 연주하는 승려들과 술 취한 의사들이 등장하는 ‘신드롬’ 같은 영화는 경찰의 자의적 제재에 속수무책이다. 그런 경찰들은 왁자지껄한 코미디나 액션 영화를 좋아할 뿐이다. 정부에서는 현재 등급제도의 도입을 논의하지만 현재로는 국제적으로 인정된 영화조차 국내 상영이 불가능한 경우가 적지 않다. 위라세타쿨 감독은 “현재 태국의 영화감독들에게 엄격한 검열정책은 저주와 같은 존재”라고 개탄했다. “우리에게 허용된 주제는 제한적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폭력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 여건에서도 금년 37세인 이 감독은 이미 차기 작품에 착수했다. 태국의 검열을 주제로 한 영화다. 제목은 ‘원시인(Primitive)’. 태국의 법률은 원시적일지 몰라도 그곳 영화는 다르다.


With SILVIA SPRING in Nairo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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