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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에서 마음은 언제나 ‘누드’

캔버스에서 마음은 언제나 ‘누드’

▶평소 사진 찍기를 좋아하던 김 원장은 대학시절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사진 일을 배웠다. 지금은 10년 경력을 가진 프로 누드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사람이 좋아서 회원이 됐습니다.일에서 벗어나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문화생활을 즐기면서 미술문화에 보탬이 되는 게 좋아요. ” 이창호(52) 한국그룹원소프트웨어 대표의 얘기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은 미술계 신진작가들을 후원하는 모임인 ‘필아트’다. 영어 ‘philosophy (철학)’의 앞머리와 ‘art(예술)’를 조합해 만든 이 모임은 4년 전 뜻밖의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됐다.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님이 무역협회장으로 계실 때 회장님께 코엑스몰 이용객들의 볼거리 차원에서 거리문화축제를 열자고 제안했죠. 그래서 행사 준비에 관여하게 됐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월간 『미술문화』에서 도와달라는 전화가 왔어요. 화가들 전시 공간도 부족하고 웬만한 유명 작가 아니면 작품을 발표할 장소가 여의치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축제 때 작품 전시회를 열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됐죠.” 필아트를 조직해 회장직을 맡고 있는 김재철(54) 코엑스치과병원장의 말이다. 그 일을 계기로 지인들이 뭉쳐 “기왕이면 일회성에 그치지 말고 지속적으로 화가들을 지원하자”고 의기투합한 것이 모임의 출발이다. 모임의 취지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미술품=돈’이라는 경제적 논리를 떠나 순수 작품 감상과 정서적 위안을 얻는 것으로 했다. 코엑스몰에 위치한 치과 아래층에 김 원장이 만든 아지트가 있다. 각종 그림과 직접 찍은 누드사진이 사방 벽에 빼곡히 걸려 있고 색소폰과 노래방 기기들로 어지러운 이곳이 필아트 회원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다채로운 ‘필아트’회원들 김재철(54) 코엑스치과병원장 백남선(58) 원자력병원 전 원장, 현 외과 암 전문의 우영식(57) MS건설 사장 최금주(52) 화이버텍 대표, 강남상공회의소 부회장 이창호(52) 한국그룹원소프트웨어 대표 김정미(51) 광운대 경영대학원 주임교수 조철행(49) 파이어아트 대표 이호점(49) 나노CNC 대표 강윤수(46) 하희오페라단 단장 강진주(42) 퍼스널이미지연구소 소장 김미라(42) 김미라세무회계사무소 대표 강을순(40) 강남상공회의소 총무 김임정(33) 오쉐르웨딩부띠끄 대표 김명인(30) GNC투자자문회사 이사
화가를 포함해 20명이 모인 필아트 문화는 독특하다. 우선 회원들 면면을 보면 외과의사, 건설사 사장, 웨딩숍 대표, 세무사 등으로 직업이 매우 다채롭다. 이들 외에 화가 여섯 명도 모임 멤버다. 정식 모임이지만 회원들이 매월 정기적으로 내는 회비는 없고 모임 날짜도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대신 특별행사를 통해 수시로 모이고 필요에 따라 회원들 각자 알아서 스폰서를 자청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운영되고 있다. 김임정(33) 오쉐르웨딩부띠끄 대표는 “모임 전에는 예술 분야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고 잘 몰랐다. 필아트를 통해 새로운 분야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문화 이벤트에 참여하면서 정신적 여유를 얻을 수 있어 삶의 윤활유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필아트는 뜻 깊은 행사를 했다. 역삼문화센터 전시관을 빌려 화가회원 6인의 초대전을 필아트 창립기념으로 개최한 것. 주인공은 화가 김계환, 김성근, 김준영, 전운용, 정인미, 최수현씨로 40~50세다. 김 원장에 따르면 초기 화가회원은 월간 『미술문화』에서 추천한 9명의 원로화가였다. 그때는 지명도 있는 화가들이어서 각자 개인전을 열면 작품을 사주는 방식으로 후원했다. 그런데 비교적 윤택한 원로들보다 신진작가들을 지원하는 게 바람직할 것 같아 잡지사에서 새로 화가들을 추천 받았다. 김 원장은 “지인들이 작품을 사가면 거기서 남는 수익금을 화가 회원과 모임이 6대 4로 나눠 40% 수익금을 기금으로 적립하려 했는데 작품이 달랑 6점만 팔려 대관료와 전시회 도록 인쇄 등 소요경비도 다 못 건졌다. 별수 없이 내가 독박(?)을 썼다”며 웃었다. 이어 “전시회를 활성화하고 작가와 회원을 연결하면 화가는 안정적으로 수입이 생겨 좋고 회원은 각자 좋아하는 그림을 싸게 구입할 기회가 되니까 함께 윈-윈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필아트는 지난해 7회를 맞은 대한민국수채화대전을 2년째 후원하며 ‘필아트상(특별상)’을 주고 있다. 상금 300만원과 수상작 도록을 만드는 데 드는 경비는 모임 기금에서 일부 지원하고 부족한 비용은 김 원장 개인 주머니를 털었다.

▶퇴촌에 있는 도예촌에서 특별행사가 진행됐다. 회원들이 직접 빚어 그림을 그려 넣은 도자기들.

필아트는 그동안 모임 행사로 누드크로키 그리기, 도자기에 그림 그려 빚기, 경매 바자 등을 진행했다. 김정미(51)광운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모임 초창기에 모델들을 섭외해 민통선 지역으로 누드크로키 여행을 떠났다. 워낙 그림을 좋아하는 회원들이 모였기 때문에 쑥스럽거나 어색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누드사진도 찍었다”고 말했다. 김임정 대표는 “과천에 있는 제비울미술관을 빌려 화가회원들이 그림을 내고 일반회원들은 50만원 상당의 개인 소장품을 내서 경매 바자를 한 행사가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경매 바자에서 걷힌 돈으로 지체장애인이 모여 사는 시설을 찾아가 식사 대접을 하는 등 수익금 일부를 후원금으로 내놓았다. 이때 경험은 김 대표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그 후로 개인적으로 2주에 한 번 시설을 찾아가 설거지 등 자원봉사를 하다 아예 봉사활동 모임을 따로 만들었다”며 “그동안 자원봉사에 참여하고 싶어도 경로를 잘 몰랐는데 필아트 덕분에 계기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회원을 상대로 한 화가회원들의 미술 강의는 단체로 전시장을 찾았을 때나 모임에서 수시로 열린다. 무채색의 세계, 폴 고갱의 그림 세계, 장 미셸 바스키아(미국 화가)가 세계적인 인기작가가 된 이유, 현대미술의 경향 등 다양한 테마로 진행되는 강의는 미술 전반에 대한 지식을 쌓는 기회가 된다. 그 외에 생일을 맞은 회원을 위한 파티를 열고 화가회원들은 돌아가면서 직접 그린 그림을 선물한다. 식사비는 파티 주인공이 지불한다. 김임정 대표는 정기모임이 없는 점을 가장 아쉬워했다. 그는 “순수하게 시작했기 때문에 모임이 느슨하게 운영됐는데 앞으로 체계적이고 전문화돼서 바람직한 사회단체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며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문화예술 분야를 지원하는 활동가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희망을 털어놓았다.
회비·모임 날짜 없는 ‘자유 모임’
필아트는 지난해부터 본격 채비를 갖추고 모임을 새롭게 정비 중이다. 그동안 없던 사업계획과 운영계획을 세웠고 회칙과 정관도 만들었다. 아직 법인 설립인가가 나지 않았지만 김 원장은 올해부터 모임을 더욱 체계적으로 활성화할 계획이다. 우선 화가회원들이 개인 전시회를 열면 모임 명의로 화환을 선물하고 전시회 오프닝 행사에 참석해 후원금도 줄 예정이다. 그는 “봄에 광릉수목원 근처에 있는 팔야촌에서 누드크로키 행사를 진행하고 이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 생각이다. 한 해 동안 화가회원 6명이 각자 개인 전시회를 열 수 있도록 지원도 아끼지 않을 계획”이라고 했다. 김 원장은 “눈을 돌리면 캔버스 천지다. 화가회원과 일반회원 협동작업으로 장애인시설에 벽화 그리기를 시작할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필아트 장기계획은 화가회원들이 마음 놓고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제공하고,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작가들을 발굴해 일반인과 함께 이곳을 문화 향유 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김 원장의 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두바이처럼 상상력만 발휘한다면 얼마든지 문화예술의 나라를 만들 수 있다. 어차피 수상택시가 운항 중이니까 한강에 인공 섬을 만들어 수상무대를 설치하고 그곳에 공연장을 만들어 문화의 섬으로 가꿀 수 있다. 종종 야외전시장이 되는 파리 센강의 다리들처럼 우리나라에 문화다리도 만들고 싶다. 전국의 수많은 공사장 펜스도 좋은 캔버스가 될 수 있다. 지금 당장 공사장 펜스에 내 누드사진을 쓰고 싶다면 기꺼이 주겠다.” 치과 일과 사업으로 번 돈을 각종 후원 모임에 쏟고 있는 김 원장은 “내 주머닛돈은 돈대로 나가면서 덕 보는 것도 없다. 필아트 회장직도 넘기려 했더니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 4년째 장기집권 중”이라고 농담했다. 얼굴 표정은 ‘기꺼이 사서 하는 고생’으로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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