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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준엽의 그림읽기] 젊은 한량들의 핑크 빛 유희

[전준엽의 그림읽기] 젊은 한량들의 핑크 빛 유희

▶풍속화. 18~19세기. 종이에 채색. 28.2X35.8cm.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소장. 국보 135호 혜원풍속도첩.

21세기 초 봄과 19세기 말 봄은 어떻게 다를까. 2008년 봄의 문턱을 넘어서며 문득 스며 나온 생각이다. 소설가 한수산의 표현대로 봄은 젖어서 오는 것 같다. 200여 년 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자연은 변함이 없으니까. 얼었던 땅이 녹고 강이 풀리면 물기가 오른다. 물기는 대지를 적시고 생명의 움직임을 피워낸다. 노랑에서 초록으로, 다시 여러 가지 색깔의 꽃으로 볼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봄’인가 보다. 지금 주변에는 지천으로 그런 봄이 움트고 있다. 19세기 말 조선시대에도 이맘때쯤이면 사람들은 똑같은 봄을 맞았을 게다. 이런 생각 말미에 꺼내 본 그림이다. 신윤복의 ‘봄나들이’. 이 그림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봄은 역시 젊은이들의 계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당시 유행을 이끌었던 젊은이들이다. 지금으로 치면 압구정동 거리를 누비며 첨단 패션 감각을 뽐내는 신세대쯤 되겠다. 그림은 기녀와 젊은 한량들이 짝을 이뤄 봄나들이를 가려고 약속 장소로 모이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미 당도한 한 쌍은 장죽에 담배까지 피우는 여유를 즐긴다. 그 뒤에 막 도착한 다른 한 쌍의 표정이 재미있다. 아마도 기녀가 자신의 파트너에게 담배 한 대 청한 모양이다. 한량은 두 손으로 공손하게 장죽을 바치고 있다. 기녀는 겸연쩍은 듯한 손으로 머리를 매만지며 어색한 웃음으로 화답하듯 손을 내민다. 필경 한량은 농도 짙은 농지거리를 하며 장죽을 건네는 중이리라. 이 광경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걸어오는 한량 하나는 짝이 없다. 그러고 보니 다른 한량들보다 행색이 다소 처진다. 파트너를 데리고 온 한량들은 모두 꽃미남 과에 속하는 곱상한 외모와 당시 유행인 듯한 장신구들로 치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인물은 얼굴이 다소 거무튀튀하고 늙어 보이며, 복장도 다르다. 신분이 다르거나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한 한량인 모양이다. 화면 아래쪽에 급히 달려오는 한 쌍은 봄바람에 옷이 나부껴 역동적이다. 여인네는 쓰개치마에 말몰이 시종까지 부리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은데, 오늘 파트너가 대갓집 외동아들쯤 되는 모양이다.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19세기 말 젊은 세대의 개방적 유희 풍속을 가늠할 수 있다. 정분 나기 좋은 봄날, 젊음의 상춘 쌍쌍 파티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에 핑크 빛이 물든다. 이런 주제가 신윤복의 단골 메뉴다. 그래서 신윤복은 조선시대 회화의 이단아로 통한다. 여인네들은 당시 유행인 몸에 꼭 맞는 저고리와 풍성한 항아리 치마로 통일된 모습이다. 남자들은 반코트 차림으로 허리춤에는 주머니, 장도, 쌈지 같은 것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여덟 명의 인물은 각각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다. 빠른 걸음에서 보통 걸음, 느린 걸음 그리고 정지 동작까지 다양하다. 바라보는 방향도 산만하다 싶을 정도로 흐트러져 있다. 그런데도 이 그림이 빼어난 구성력을 갖췄다고 평가 받는 것은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 때문이다. 이 사람을 향해 일곱 명의 움직임이 모여들고 있지 않은가. 즉 이 인물을 꼭짓점으로 위의 네 명과 아래 세 명이 옆으로 누운 ‘V(브이)’자를 이루며 시선을 오른쪽 인물로 유도한다. 이것은 이 그림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 사람이 서 있는 곳이 봄나들이 가기 위해 모이기로 약속한 장소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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