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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뇨약으로 비만 치료하라니…

당뇨약으로 비만 치료하라니…

당뇨약이 비만약으로, 여드름약이 피임약으로 둔갑하고 있다. 이들 약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대상 의약품으로 관계 당국의 감시권 밖에 있다. 이로 인해 무분별하게 오·남용되고 있음에도 얼마나 팔렸는지, 어디에 사용됐는지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른바 ‘해피 드럭(Happy drug)’으로 불리는 비급여 대상 의약품의 실태를 추적했다.
“이러다가 생사람 잡겠네….” 100kg에 육박하는 비만환자의 처방전을 확인한 30대 중반의 약사 A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처방전에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약품이 기재돼 있었기 때문. 식욕억제제 ‘푸링’은 기본 처방. 보조제로 감기약, 간질약, 당뇨약 등을 사용했다. 심지어 변비약, 신경안정제까지 첨가했다. 비만환자에게 웬 감기약, 간질약?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다. 감기약은 열 생성 촉진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간혹 비만 해소 특효약으로 둔갑하기 일쑤다. 간질약과 당뇨약은 각각 식욕 억제와 지방 분해 효과가 있다. 그렇다면 변비약은 뭘까. 감기약, 간질약 등 보조제들은 교감신경을 흥분시켜 변비를 유발한다. 이 때문에 변비약을 처방한 것이다. A씨는 “아주 친절한(?) 의사들은 종종 소화제까지 넣는다”며 너털웃음을 친다. 수많은 약품을 봉투에 담던 A씨는 한마디를 더했다. “푸링, 리덕틸 등 기본 식욕억제제는 정도껏 사용하면 괜찮다. 하지만 비만 치료를 위해 당뇨약이나 간질약이 사용되는 것은 문제다. 더욱이 이런 약들이 비법처럼 유통되는 것은 시정돼야 마땅하다. 모두 비급여 대상 의약품(비만약)이 가지고 있는 한계들이다.” 비급여 대상 의약품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최근 일부 제약사가 간질약을 비만약으로 둔갑시켜 판매한 사건이 논란을 키웠다. 비급여 대상 의약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 신고되지 않은 약품을 말한다. 말 그대로 급여약품의 반대다.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약품이라는 뜻이다. 보건복지가족부 고시에 따르면 ▶단순한 피로 또는 권태 ▶사마귀 ▶여드름 ▶탈모 등 피부질환 ▶발기부전 ▶불감증 등에 사용되는 약제 및 치료제가 비급여 대상 의약품이다. 심평원 약재기준부 이영미 차장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쓰이는 약품 대부분이 비급여 대상 약품”이라며 “그래서 이 약을 해피 드럭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급여 대상 의약품은 또 있다. ‘허가된 용법 또는 용량을 벗어나 의약품을 사용하는 경우’(Off-Label Use)도 비급여다. 가령 간질약이 간질환자에게 사용되면 급여약품이지만 비만환자에게 처방되면 비급여로 분류된다.
문제는 비급여 대상 의약품의 오·남용 사례가 잦다는 점이다. 피임약이 여드름약으로 둔갑하는 한편, 신경안정제나 우울증약이 다이어트 특효약으로 판매되기 일쑤다. 한때 ‘피임약’으로 인기를 끌었던 다이안느35 파동은 대표적이다. 다국적 제약사 쉐링의 다이안느35는 애초 ‘여드름이 있는 여성의 피임약’으로 허가 받아 판매됐다. 이는 젊은 여성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는데, 전체 피임약 시장의 10%를 장악할 정도였다. 그러나 다이안느35를 복용한 여성에게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간독성과 정맥혈전색전증(정맥에 혈전이 고였다가 심장 또는 폐로 흘러 들어가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현상) 등 역효과가 발견됐던 것. 실제 독일에선 다이안느35를 장기 복용하던 여성이 간암으로 사망한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에서도 혈전이 생겨 목숨을 잃은 여성이 속출했다. 논란이 일자 쉐링 측은 ‘피임 단독 목적으로 사용해선 안 된다’는 문구를 삽입,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했다. 여드름약을 피임약으로 둔갑시킨 ‘죄’를 자인한 셈이다. 비아그라로 통칭되는 발기부전 치료제의 오·남용 사례도 심각한 수준이다. 가짜 비아그라가 버젓이 유통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무분별한 처방 탓에 안면홍조, 혈압상승 등 부작용에 시달리는 소비자도 적지 않다. 국회 보건복지위 김충환 의원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2004∼2006년 3년간 다국적 제약사 ‘한국화이자’의 비아그라 부작용 보고 사례가 599건에 달했다고 밝혔다. 한국릴리의 시알리스, 바이엘쉐링의 레비트라, 동아제약의 자이데나 역시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고 그는 주장했다. 김 의원에 따르면 비아그라의 부작용은 안면홍조, 일시적 혈압상승, 두통, 안구충혈, 망막혈관 폐쇄 또는 파열 등이다. 비급여 대상 의약품의 오·남용 사례가 가장 심각한 분야는 비만약이다. 앞서 언급했듯 간질약, 감기약 등이 은근슬쩍 비만약으로 바뀌는 사례가 다반사다. 대한약사회는 최근 간질 치료제나 당뇨병성 신경염 치료제를 비만약으로 홍보·판매한 광동제약, 휴온스, 닥터스메디라인 등 3개 제약사를 무허가 의약품 판매행위 및 허위 과장광고 혐의로 식품의약품안전청(식약청)에 고발했다.
약사회에 따르면 광동제약은 처방의약품 생산 품목리스트 홍보책자에 당뇨병 치료제 ‘아디옥트정’과 간질 치료제 ‘토피리드정’을 비만약으로 기재해 왔다. 휴온스는 간질약 ‘세티정’을 ‘식욕억제제’로, 감기약 ‘아페린정’ ‘에모젠정’을 각각 ‘열생성 촉진 및 지방분해제’로 허위광고했다. 닥터스메디라인은 감기약 ‘슈카민정’을 ‘열생성촉진제’라고 버젓이 판매해 왔다. 여기까진 빙산의 일각이다. 심혈관계약, 우울증약, 소염진통제, 이뇨제, 위궤양약 등 환자에게 치명적인 약품도 비만 치료용으로 사용된다. 심지어 마약 성분이 포함된 향정신성 비만약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다. 식약청 마약관리팀에 따르면 향정신성 비만약품 시장 규모는 2004년 228억원, 2005년 353억원, 2006년 345억원으로 나타났다. 마약류 비만약 시장 규모가 300억원대를 훌쩍 넘어선 것이다. 마약 성분이 포함된 비만약은 포만감을 증가시킨다. 식욕 억제 기능도 있다. 뇌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남용할 경우 혈압상승, 가슴통증, 불안감, 현기증, 불면증, 두통, 구토, 어지럼증, 떨림, 정신이상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3개월 이상 장기 복용하면 우울증에 시달릴 위험이 적지 않다. 때론 판막성 심질환에 걸릴 우려도 있다. 한국소비자보호원에 따르면 향정신성 비만약을 잘못 복용했을 때 졸도, 우울증, 위경련, 구토, 현기증, 호흡곤란, 심박증가, 뇌염, 마비증, 뇌경색, 설사, 두통 등 숱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건강세상네트워크 이정례 건강보장팀장은 “향정신성 비만약의 위험성은 그동안 여러 차례 경고돼 왔다”면서 “하지만 다이어트 열풍이 불면 항상 이 같은 의약품이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 팀장은 또 “살을 빼야 한다는 집착이 오히려 죽음의 문턱으로 이끄는 지름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한국의 마약류 비만약 소비량은 적지 않은 수준이다. 국제마약통제국에 따르면 브라질, 아르헨티나에 이어 세계 3위로 조사됐다. 국제마약통제국 측은 “덴마크, 프랑스, 칠레 같은 국가들은 이러한 자극제의 부적절한 사용을 줄이기 위한 특별조치를 도입해 사용량을 줄이는 데 성공했다”며 “하지만 호주, 브라질, 한국, 싱가포르 등 5개국은 1인당 소비량이 크게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렇게 비급여 의약품이 활개치고 있는데도 정부 당국은 뾰족한 해법을 내놓지 않고 있다. 처방양상, 처방량 등에 대한 정확한 통계조차 산출하지 못하고 있다. 심평원 관계자는 “비급여 대상 약품을 관리할 수 있는 근거자료(back data)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정부 관리대상에서 아예 제외돼 있다는 것이다. 실제 비급여 대상 의약품은 직거래 형식을 띤다. 의사와 환자, 약사와 환자 외엔 거래량을 알 수 없다. 가령 마약류 비만약이 어디로, 어떻게 판매됐는지, 비아그라가 누구에게 팔려나가는지 확인할 길이 전혀 없다. 제약사들이 ‘간질약’을 ‘비만약’으로 둔갑시켜 판매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급여 대상 의약품이 거래되는 과정에서 의사들이 적지 않은 리베이트를 받는다’‘제약사들이 의약품을 팔기 위해 로비를 한다’는 뒷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급여 약품 통계조차 없어
전문가들은 비급여 대상 의약품에 대해 정부가 통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심평원에 비급여 대상 의약품의 처방양상, 처방량 등을 의무신고하자는 얘기다. 비급여 대상 의약품의 정보를 정부 당국과 공유해 리스크를 관리하자는 취지다. 대한제약협회 소속 A약사는 “비급여 대상 의약품은 자칫 국민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며 “이 때문에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비급여 대상 의약품을 하루빨리 정부 관리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급여 대상 의약품에 약물코드를 부여하자는 주장도 제기된다. 세심한 복약지도로 오·남용 사례를 원천차단하자는 것이다. 가령 여드름약 이소트레티노인 성분 약의 경우, ‘복용시 한 달 동안 헌혈하지 말라’는 경고 문구를 넣는 등 세심한 복약 지도를 할 수 있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강아라 사무국장은 “미국과 영국에는 성분을 표시해주는 제도가 따로 있다”며 “성분을 알려 오·남용이 방지될 수 있는 처방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실 이선화 보좌관도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약사가 오·남용 우려 의약품을 조제한 경우 환자에게 약물 정보지 제공이 의무”라며 “복용법과 주의사항 등을 담은 약사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상술에 빠져 비도덕적 처방을 일삼는 의료인을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들자는 주장도 없지 않다. 건강보험연구원 김정희 부장은 “제약사들이 아무리 간질약을 비만약으로 속여 팔았다 하더라도 처방은 의사가 하는 것”이라며 “비급여 대상 의약품이라도 본래의 목적으로만 쓰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의사가 부적절한 처방을 했을 때 정부가 직접 행정처분을 내리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한의사협회 측은 유보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비급여 대상 의약품의 오·남용 사례는 극히 일부분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대한의사협회 김재경 대변인은 “비급여 대상 의약품을 처방할 때, 의사들은 대부분 학회에서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위반하지 않는다”며 “비급여 대상 의약품을 정부 관리 하에 놓을지 여부는 꼼꼼히 따져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명박 정부는 최근 급여 약품뿐 아니라 비급여 대상 의약품에 대한 소비, 판매조사를 실시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보건복지가족부도 매년 의료기관과 약국을 대상으로 한 ‘의약품 소비 및 판매 통계 조사’를 추진할 계획이다. 이 같은 정책이 ‘환자 잡는’ 비급여 대상 의약품을 적절하게 관리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비급여 의약품 오·남용 사례

■ 당뇨약 → 비만약 (지방분해)

■ 비아그라 → 남용 (안면홍조, 혈압상승, 두통 등)

■ 간질약 → 비만약 (식용억제, 구토, 운동장애, 우울증 등)

■ 마약류 비만약 → 남용 (우울증, 자살충동 등)

■ 여드름약 → 피임약 (간독성, 정맥혈전색전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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