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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의 지휘봉 녹슬지 않는다

노장의 지휘봉 녹슬지 않는다

▶(왼쪽부터)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 남용 LG전자 부회장, 구학서 신세계 부회장

정치인이든 기업인이든 ‘바이스’는 실권이 없는 게 현실이다. 사람에 따라 조금 다르긴 하지만 ‘부(副)’자가 붙으면 대체로 형식적인 자리로 인식됐다. 그런데 지금 재계에선 이런 상식이 깨지고 있다.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 남용 LG전자 부회장 등이 전면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것. 요즘 왜 ‘부회장’의 힘이 셀까.
재계는 지금 부회장 전성시대다. 열 손가락에 꼽히는 국내 대기업은 대부분 오너 회장이 아닌 전문경영인 부회장을 회사 얼굴로 내세우고 있다.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 남용 LG전자 부회장, 구학서 신세계 부회장 등이 그 예다. 이들은 대표이사 겸 ‘실세형’ 부회장으로 자문이나 고문역에 그친 예전의 부회장과는 구분된다. 이 외에도 민계식 현대중공업 부회장, 이상운 효성 부회장, 김창근 SK케미칼 부회장, 신헌철 SK에너지 부회장, 강유식 LG 부회장, 김반석 LG화학 부회장, 신훈 금호아시아나 건설부문 부회장 등이 요즘 속된 말로 잘나간다. 이들 부회장은 대표이사로서 경영은 물론 기업 인수합병(M&A)까지 오너급에 버금갈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행사하고 있다. 최근 부회장이 뜨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기업 각 부문이 커져 부문 사장을 총괄할 또 하나의 리더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회장, 부회장, 사장은 ‘직위’로서 조직의 ‘위계적’ 의미를 갖기 때문에 획일적인 역할을 규정하기는 불가능하다. 부회장은 직위의 하나로 해당 기업의 조직 규모나 개성, 발전하는 과정이라는 맥락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 휴잇어소시엇츠 박경미 대표는 “대표이사 사장이냐, 대표이사 부회장이냐는 사업이 얼마나 성숙하고 규모가 갖춰져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했다. 다소 예외적이지만 전문경영인으로 회장 직위에 있는 손욱 농심 회장이 부회장이 아닌 회장 지위에 있는 것은 중견기업 농심은 그가 예전에 있었던 삼성만큼 크고 시스템화된 조직이 아닌 이유도 있다. 실제로 재계 순위 중 상위에 있을수록 대표이사 부회장이 존재한다. 이때 부회장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계열사 사장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조정남 전 SKT 부회장은 “부회장은 리더로서 사장의 능력이 한계에 다다를 때 절실해진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의 경우, 부문별 사업 규모가 크기 때문에 이윤우 부회장이 일종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부회장은 황창규 기술총괄, 권오현 반도체총괄 등 부문별 사장들을 조정하고 조율하는 것이다. 둘째는 회장이 하워드 휴즈 스타일인 경우다. 미국의 전설적인 항공 재벌 하워드 휴즈는 대리인들을 두었을 만큼 세상과의 접촉을 꺼렸다. 이때 부회장은 회장의 대리인 자격을 갖게 된다. 이명희 신세계 회장은 웬만해선 세간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신세계그룹 결재란에 회장 서명란을 두지 않고 부회장에서 최종 결정을 모두 끝낸다. 이명희 회장은 1년에 딱 한 번 임원인사 때 그룹 결재서류에 서명한다. 이건희 전 삼성회장도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을 삼성전자의 얼굴로 내세우며 자신은 공식 석상에 되도록 등장하지 않았다. 최종 사인을 회장이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회장이 부회장을 믿고 맡긴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문서로 확인된 최종 결정자가 부회장일 경우 부회장에게 책임을 전가할 소지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오너의 영향력이 강한 기업의 부회장일수록 회장의 개인 집사가 아니냐는 의혹을 받는 이유가 여기 있다. 최대주주인 오너 회장은 굳이 사인하지 않아도 부회장을 통해 주주총회가 아닌 이사회 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이상운 효성 부회장, 민계식 현대중공업 부회장, 김창근 SK케미칼 부회장

셋째, 직업이 ‘사장’인 전문경영인 예우 차원에서다. 성기영 머서코리아 대표는 “부회장이란 타이틀은 이미 사장이라는 최고경영자 위치에 오른 경영진을 예우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부회장은 남들은 벌써 은퇴했을 나이인 60세가 넘어서 되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민계식 현대중공업 부회장은 66세, 구학서 신세계 부회장은 63세로 모두 ‘노장’ CEO다. 그러나 두 사람은 나이와 관계없이 실무적 경영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하면 무엇이 달라지는 것일까? 민계식 현대중공업 부회장은 “실제 일하는 측면에서 본다면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한다.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직위’만 달라졌을 뿐 직책, 곧 역할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회장 직위에 오른 뒤 민 부회장의 활동이 더욱 왕성해졌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민 부회장은 부회장이 된 후 더욱 속도감 있는 경영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부회장이 되고 나서 적극적으로 추진한 태양광 사업이다. 태양광 사업은 현대중공업의 신성장사업이다. 사실 민 부회장이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은 1999년부터였다. 부사장 직위에 있었던 그의 처음 제안은 거부됐다. 결국 그는 2004년 부회장이 되자 태양광 발전사업을 차세대 신성장사업으로 정하고 지난해 말부터 모듈 공장을 가동하는 데 성공했다. 인수합병 최종결정권을 지닌 민 부회장은 6월 19일 기자와 만나 “대우조선해양이나 현대건설 인수에는 현재로선 뜻이 없다”며 “조선이 아닌 플랜트, 엔진기계, 환경에너지와 관련한 적당한 해외 매물을 찾아 사업을 다각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은 현재 회장 자리가 비어 있다. 오너이자 최대주주인 정몽준 의원은 정치에 더 힘을 쏟고 있다. 대신 정 의원은 민 부회장에게 회사 경영전반을 맡겼다. 민 부회장은 “정 의원은 나를 믿고 맡긴다”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예가 노사안정 사례다.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그의 의견에 정 의원이 2년간 참고 따라준 것이다. 휴잇어소시엇츠 박경미 대표는 “사장이든 부회장이든 이름표보다 CEO, CFO(Chief Finance Officer: 최고재무책임자)처럼 무슨 역할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글로벌 기업의 경우 ‘Vice Chairman’은 드물다”며 “미국 기업은 건강한 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인식이 더욱 철저해지면서 CFO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P&G나 GE도 기능별 책임자인 CFO가 Vice Chairman이라는 직위에 올라 있다. 이와 달리 한국의 부회장은 CFO보다는 CEO가 많다. 한국에서는 건강한 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사회의 요구로 전문경영인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오너는 경영 일선에서 한발 물러서는 대신 부회장을 내세운 측면도 있다. 부회장은 최대주주인 오너의 편에서 다수 주주의 이익도 책임져야 한다. 부회장 전성시대라지만 부회장의 무게는 예전보다 무거워졌다.


인터뷰 조정남 전 SKT 부회장


“누구에게 줄 설까 고민 마세요”
부회장 전성시대가 시작된 것은 조정남 SKT 부회장,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활약 덕이다. 이른바 실세 부회장 1세대라고 볼 수 있는 이 둘은 모두 올해 퇴임했다. 양재동에서 만난 조 전 SKT 부회장은 부회장이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고민에 대해 들려줬다. 가장 다루기 힘든 문제는 이른바 ‘줄서기’였다. 부회장이란 샐러리맨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로 취임하는 순간, 레임덕이 시작됐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부회장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임원 여러분, 저는 사장 중심의 경영을 할 것입니다. 부회장에 줄을 설까 사장에 줄을 설까 고민하지 마세요.” 그러나 사장단은 부회장 선에서 잡아야 했다. 그는 “내가 언제 무엇을 묻든 확실히 대답하지 못하면 끝이라고 사장단에 엄포를 놓는 수를 썼다”고 밝혔다. 사장단이 따로 보고 시간을 정해 달라고 청할 만큼 그는 사장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또 평소 16개 연구소에 의뢰, 따끈한 정보를 취합해 사장들보다 앞서 미래를 보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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