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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고 똑똑한 ‘이공대생’들의 도전

예쁘고 똑똑한 ‘이공대생’들의 도전

무더운 어느 날 보스턴의 터프츠 대학. 짧은 반바지와 민소매 차림의 여학생 10여 명이 여느 때처럼 캠퍼스 안의 시선을 끈다. 하지만 오늘은 이유가 다르다. 여학생들이 둘러싸고 있는 우주선처럼 생긴 길고 널따란 340kg의 기구 때문이다. 큰 물방울 모양의 조종석 안쪽으로 파이프와 배선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태양광 자동차다. 여학생들이 처음부터 직접 제작해 내년까지 완성할 작정이다. 갑자기 불꽃이 튀자 여학생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난다. 아무리 기계공학의 명수들이라도 위험할 땐 몸을 피해야 한다. 그래서 교수를 불러 도움을 청한다. 그 사이 3학년 학생인 알렉스 맥거티(21)가 시험 운전 준비를 한다. 얼굴에 주근깨가 난 금발의 맥거티는 고등학교 때 처음 자동차를 제작했다. 맥도널드에서 버리는 식용유를 이용한 바이오디젤 ‘야채 자동차’였다. 맥거티가 가속 페달을 밟아 도로로 올라서자마자 자동차의 체인이 벗겨진다. 캠퍼스 안전요원이 도로를 차단하고 야구부원들이 구경하러 몰려든다. “저것 봐.” 한 건설 인부가 외친다. “너드(nerd) 걸들이야!”(‘너드’는 과학기술 지식은 풍부하지만 사회생활은 서툰 ‘왕따’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너드 걸’들은 책만 파고 사회생활은 젬병인 기존의 공부벌레 이미지와는 전혀 다를지 모른다. 이들의 상담 교사인 너드 걸의 원조 캐런 파네타는 핑크색 뾰족구두를 좋아한다. 어쨌든 이들처럼 스스로 너드임을 자처하는 신세대 젊은 여성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지적인 측면을 섹시하게 꾸미거나 패션·메이크업·하이힐 같은 여학생들의 일반적인 관심사와 자신의 너드 취미 양쪽에 모두 열성을 보인다. 너드란 이렇게 생겨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타파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그들은 너드라고 불러도 전혀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들이 입은 티셔츠에는 너드 걸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멤버 중 크리스티나 산체스는 생의학 공학과 대학원생(치어리더 출신)이며 공기역학에 관해서라면 몇 시간이고 혼자 떠들 수 있다. 신입생인 카이트린 이턴은 작년 크리스마스 때 남자친구에게 납땜 인두를 선물해 달라고 했다. 3학년생인 커트니 마리오와 페리 로스는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시시덕거린다. ‘킬러들의 공기총이 어떻게 작동됐을까’ 하는 것이다. 이들 ‘너드 걸’은 사회의 왕따가 아니다. 그들은 결코 들러리 인생을 살려 하지 않는다. 과학기술 분야에 관심이 많지만 그래도 여자는 여자다. 그리고 여성임을 자신의 매력으로 부각시킨다. 이들이 본받고자 하는 몇몇 우상이 그들의 성향을 말해준다. 우선 티나 페이. TV 시트콤 ‘30 록’에서 그녀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스타 워즈’를 좋아하고 첨단기술에 빠져 있으며 안경을 쓴 너드지만 자신은 주류사회에서 인기가 높으며 몇몇 패션 잡지의 커버에도 실렸다. 그리고 배우 대니카 매켈라는 수학 이론을 공동개발했고 여학생 대상으로 ‘수학도 재미있다(Math Doesn’t Suck)’는 책을 펴냈으며 스터프 잡지의 비키니 모델을 하기도 했다. 밀스 칼리지의 엘런 스퍼투스 교수는 구글의 연구 과학자이며 2001년 실리콘 밸리에서 열린 ‘가장 섹시한 너드’ 대회의 우승자다. 이들은 26세의 칼리 루이스가 매일 진행하는 웹 시리즈 GeekBrief.TV 같은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너드 걸 만찬모임에서 친구들을 만난다. 이들은 의식적으로 너드의 주요한 고정관념 두 가지를 비튼다. 하나는 매력 없는 왕따의 이미지, 또 하나는 너드는 남자라는 생각이다. “공부를 잘하면 못생겼다거나 얼굴이 예쁘면 수학·과학 또는 공학 전공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이 오래전부터 존재했다”고 ‘그녀는 완전 너드(She’s Such a Geek!)’의 공동 편집자 애널리 뉴이츠가 말했다. 2006년에 출간된 수학·첨단기술·과학 관련 여성 저술가들의 에세이 선집이다. “요즘 X세대 너드와 보통 10대 소녀들이 다른 점이라면 태도뿐이다. 여성들이 너드의 이미지를 전보다 훨씬 편안하게 받아들인다는 표시다.” 그런 변화는 과학기술뿐 아니라 문화와도 관계가 있다. 너드가 사교성이 떨어지는 수학 신동의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MIT의 ‘부두’ 같은 1950년대 공과대학 유머 잡지의 풍자만화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MIT의 너드들은 철저히 남성이었으며 그런 이미지는 그 뒤로도 계속 변함이 없었다. 예를 들어 1984년작 영화 ‘기숙사 대소동(Revenge of the Nerds)’에 나온 너드 남성들과 ‘베이사이드 얄개들’의 스크리치가 그랬다. 요즘의 여학생 너드는 실제로 첨단기술 교육을 받으며 자란 1세대다. 이들은 ‘해커스’와 ‘매트릭스’처럼 남녀가 동등하게 묘사되는 영화를 보며 자랐고 ‘미녀와 뱀파이어’의 윌로가 어수룩한 너드에서 똑똑하고 멋진 섹스 심벌로 변신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과학기술 취미와 만화책이 변두리 하위문화에서 주류 대중문화로 올라서는 과정을 목격했으며 그와 같은 ‘너드는 쿨하다’는 심리에 편승해 주류사회로 파고들었다. 2007년 미국 기업 지멘스가 주최한 고등학생 대상 수학·과학·기술 경시대회에서 대회 역사상 처음으로 여학생이 단체와 개인 부문을 모두 휩쓸었다. 최근의 퓨 인터넷&미국생활 프로젝트에서는 12~17세 이용자들 중 블로그 세계와 친목 사이트를 여성이 주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접 웹사이트를 구축하는 비율에서도 여성이 앞섰다. 소비가전협회의 2006년 조사에 따르면 25~34세 연령대에서는 여성 게이머 수가 남성보다 훨씬 많다. “[2000년] 너드 걸이 처음 결성됐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큰 잘못인 양 ‘왜 스스로 너드라고 부르느냐’며 의아해 했다”고 그 단체를 창단한 터프츠대 전기 컴퓨터 공학과의 파네타 교수는 말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질문을 받지 않는다. 지금은 너드를 이상하게 보지 않으며 오히려 똑똑하고 멋지다고 여긴다. 여성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문화와 일터 사이에는 아직 넘지 못할 벽이 남아 있다. 40년 전엔 과학과 엔지니어링 직종의 여성이 3%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20% 선에 달한다. 발전적인 얘기 같지만 이 분야 학위 취득자의 56%가 여성이라면 분명 문제가 있다. 최근의 직업-생활 정책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여성의 52%가 그 직종을 떠나며 63%가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했고 절반 이상은 성공하려면 “남자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과거엔 여성들이 그런 현실에 두 가지 방법으로 대처했다. 여성임을 포기하거나 더 여성적으로 보이기 위해 기술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는 방법이다. “나는 거의 평생 동안 과학 분야에 대한 열정을 숨기고 ‘(사회적으로)용인되는’ 분야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고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살면서 현재 컴퓨터 제조사의 최고경영자인 38세의 아기 엄마 캐시 맘로즈가 말했다. “오빠의 TRS80[컴퓨터]을 갖고 놀거나 과학 공부를 하는 대신 초등학교 교육을 선택했다.” 그런 까닭에 과학기술을 좋아하는 너드 여성들이 그처럼 열심히 뛰는 건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과학지식뿐 아니라 성적인 매력에도 자부심을 가짐으로써 고정된 이미지를 깨뜨리려 하고 있다. “토요일 밤에 내가 빼입고 외출했다고 해서 월요일 시험을 남자들보다 못 본다고 단정하지 말라”고 너드 걸 산체스가 말했다. 너드가 완소녀로 변신하기가 그렇게 항상 쉬운 일은 아니다. 구글의 스퍼투스(39)가 자기 입으로 ‘나는 여자 너드’라고 말하기까진 여러 해가 걸렸다. 그러나 ‘가장 섹시한 너드’ 상을 타면서 저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이 대회는 피플 잡지의 ‘현존하는 가장 섹시한 남성’의 패러디로 2000년에 시작돼 연례 행사가 됐다. 스퍼투스는 그 대회에서 남성들을 모두 물리친 뒤 대관식에서 회로기판으로 만든 코르셋과 옆구리가 터진 스커트 차림으로 다리에 계산자를 끈으로 묶고 무대 위를 행진했다. 하지만 여성이 너무 섹시해도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올해 초 샌프란시스코의 너드 걸 만찬에 참석한 미니 블로그 프로그램 프라운스의 개발자 리 컬버(25)는 취업 면접 때 외모가 매력적인 여성도 능력이 있다는 점을 설득하느라 많은 애를 먹었다고 설명했다. “가방에 컴퓨터학과 성적증명서 한 부를 항상 지니고 다녔다”고 그녀가 말했다. 물론 아예 성별에 개의치 않는 사람도 있다. “나는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는 보통 여자라고 생각한다”고 산체스는 말했다. 그녀가 지금은 다수파가 아니지만 요즘 너드 걸들의 활약상을 보면 머지않아 그렇게 될 듯하다. 이들은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적극적인 홍보성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예컨대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과후 워크숍 테크브리지, 미래의 컴퓨터 과학자를 위한 전국적인 상담지원 프로그램 MAGIC 등 수십 개에 달한다. 물론 너드 걸들도 매주 봉사활동을 한다. “엔지니어들이 무엇을 하는지 실제 사례를 알려주려 한다”고 파네타는 말했다. “ ‘해리 포터’의 특수효과가 정말 멋지다고? 그게 바로 엔지니어의 일이다. 아이폰이 마음에 든다고? 엔지니어의 작품이다. 응원 안무나 춤에 관심이 있다고? 스포츠 엔지니어링은 어떨까?” 그러고 보니 정말 사회에 진출한 뒤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모두 너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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