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예루살렘 장벽
비극의 예루살렘 장벽
팔레스타인 건설 근로자 가산 아부 티르(22)가 좋아한 TV시리즈는 터키 드라마 ‘누르’였다. 동예루살렘에서 그 연속극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봤다. 드라마의 무대(보스포루스 해협 연안의 고급 빌라)는 비좁고 보수적인 예루살렘과는 다른 별천지다. 굴착기 기사인 그는 저녁에는 아우와 함께 조부모네 돌집의 발코니에 앉아 L&M 담배를 피우면서 어떻게 하면 자기도 빌라를 살 수 있을까 궁리했다. 도무지 계산이 맞지 않았다. 집을 짓고 굴착기를 사려면 10만 달러 이상이 들 것이다. 1000달러가 갓 넘는 월급으로는 평생을 저축해도 모으기 어려운 돈이다. 결혼하고 싶은 처녀를 만났지만 부모가 반대했다. “그 여자와 결혼하고 싶거든 먼저 독립부터 하라”고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런 암울한 미래에 좌절감을 느꼈다고 해서 그가 나중에 벌인 일이 용서되진 않는다. 다만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될 뿐이다. 7월 22일 오후 2시쯤 아부 티르는 굴착기를 몰고 유대인들이 사는 서예루살렘 번화가로 갔다. 그리고 그는 교차로에서 정지신호를 받고 서 있는 자동차들을 향해 돌진했다. 자동차들이 부서지거나 뒤집히면서 10여 명의 운전자가 다쳤다. 한 이스라엘 행인이 운전석으로 달려가 아부 티르를 쏴 죽이면서 이 공격은 끝이 났다. 올 들어 이런 광란극이 유행처럼 번진다. 아부 티르가 발작을 일으키기 3주 전엔 동예루살렘의 또 다른 건설 노동자가 복잡한 자파로에서 트랙터를 몰고 행인들을 향해 돌진해 3명이 죽고 45명이 다쳤다. 지난 3월엔 제3의 동예루살렘인이 서예루살렘의 메르카즈하라브 탈무드 학원에 잠입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 8명을 쏴 죽였다. 2차 인티파다(반이스라엘 봉기)가 한창일 땐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공격행위가 빈번히 일어났다. 그러나 근년 들어서는 비교적 적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예루살렘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요르단강 서안 주민들보다 높기 때문에 비교적 온순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뭔가 달라진 듯하다. 이스라엘 치안당국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올해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 사람 손에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 사람이 13명에 달한다. 지난해 전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희생된 사람 수와 맞먹는다. 올 들어 이미 동예루살렘 주민 71명이 이스라엘 보안군에 체포됐다. 지난 7년의 그 어느 해보다 많은 수치다. 이스라엘의 국내 보안대인 신베트는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은밀히 급진화돼 간다고 경고했다. 이스라엘 언론은 이 유혈극들을 정신질환자의 단독범행 혹은 무장세력의 음모로 묘사해 왔다. 하지만 두 가지 설명 모두 충분한 답이 못 된다. 각 사건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설득력 있는 증거는 없지만 공통분모는 있다. 3건의 공격사건 범인들이 모두 동예루살렘의 작은 돌투성이 언덕마을 출신으로 집들이 몇 분 거리로 가깝다는 점이다. 동예루살렘이 이스라엘에 병합된 1967년 여름 이후 이 지역은 이스라엘 경제와 팔레스타인 문화와 긴밀한 유대를 구축해 왔다. 그 두 가지 조합은 이 지역의 상대적 안정을 위한 공식처럼 여겨졌다. 그로 인해 동예루살렘 주민들은 서예루살렘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런데 근년 들어 이스라엘은 이 지역의 풍경을 크게 바꿔 버렸다. 2002년 당시 아리엘 샤론 총리는 팔레스타인 지역 깊숙이 들어가 이웃들을 갈라 놓은 740㎞ 길이의 장벽(예루살렘의 상당 지역에선 6m 높이의 콘크리트 벽)을 쌓기 시작했다. 곳곳에 새로운 진입로와 검문소가 세워지면서 팔레스타인 동네는 더욱 뒤죽박죽으로 나뉘어 고립됐다. 동예루살렘에 이스라엘 정착촌이 확대되는 데 반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주택 건축허가를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우리는 그들을 너무 괴롭히고 있다”고 이스라엘의 인권변호사 다니 사이드만이 말했다. “우리는 그들을 이스라엘에 병합하지 않은 채 서안으로부터 차단시켰다. 이도 저도 아닌 변방들을 양산해 냈는데 이는 1967년 이래 가장 극단적인 변화였다.” 이런 상황은 거북스러운 아이러니투성이다. 사람들은 분리장벽 덕분에 잠재적 자폭테러범이 서안에서 유입되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동예루살렘의 아랍인 25만 명은 청색 신분증이 있어 이스라엘에서 서안의 팔레스타인 사람보다 왕래의 자유를 크게 누리고 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하마스, 헤즈볼라, 시리아 등 숙적들과의 싸움보다는 대화를 자주 했지만 예루살렘 한복판에서는 폭력사태가 급증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협상에서 최대의 난제는 예루살렘의 분할 문제다(레임덕 신세인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는 지난주 올해 예루살렘 문제를 포함해 교착상태에 있는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이 올해 안에 타결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평화협상이 지지부진할수록 현지 주민들의 분노는 더 커질 수 있다. 올메르트가 부패 스캔들로 오는 9월 총리직을 사임키로 하면서 분쟁 해결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나는 굴착기 사건이 일어나고 며칠 뒤 아부 티르의 가족을 찾아갔다. 부겐빌레아 꽃으로 둘러싸인 부모의 집은 말 많은 하르호마 이스라엘 정착촌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산등성이에 있었다. 아부 티르의 동생 빌랄(19) 역시 이스라엘 건설회사에서 굴착기 기사로 일한다. 두 형제 모두 8학년에서 학교를 그만뒀다. 동예루살렘의 소년들은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려고 건설현장에 뛰어드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그런 취직관행은 잔인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여성은 보통 20대까지 학교에 다닌다. 그래서 남성이 지배하는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결혼의 불균형이 초래된다. 월급이 많다고 해서 아랍 청년들이 이스라엘 회사에 일하면서 느끼는 죄의식과 개운치 않는 기분이 지워지는 건 아니다. 빌랄은 지난 4년 동안 하르호마에서 일했다고 말했다. “견디기 힘든 감정을 느끼지만 돈이 필요하다. 내가 일하지 않는다 해도 다른 사람이 맡을 것이다.” 형이 벌인 광란극에 따른 이스라엘 보안당국의 강압전술은 그의 적개심만 키웠을 뿐이다. 사건 직후 신베트가 그를 체포해 신문했다. 빌랄의 말에 따르면 그를 신문하던 한 사람이 이렇게 경고했다. “다시 만난다면 넌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은 투옥된 유명한 하마스 지도자와 친척관계인 아부 티르가 이슬람주의자들을 대신해 일을 벌였는지 모른다고 추측했다. 익명을 요구한 이스라엘의 한 정보 소식통은 동예루살렘 주민들이 “좀 더 급진적인 이슬람 생활방식을 받아들이는” 데 일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다른 지역의 팔레스타인 인들과 마찬가지로 근년 들어 동예루살렘에서도 하마스의 인기가 급증했다. 요즘 남쪽지역 여성들은 대부분 머리에 히잡을 두른다. 그러나 상황이 그리 간단치 않다. 2년 전 선거에서 하마스가 권력을 잡은 뒤 이스라엘 보안군은 동예루살렘과 서안을 이 잡듯 뒤져 하마스 고위인사 수십 명을 체포하고 이슬람 문화센터 등의 기관을 봉쇄했다. 물론 그런 센터는 이슬람 무장세력이 관심을 쏟는 곳이지만 동시에 사회복지시설이자 공동체의식을 제공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치안이라는 이름 아래 이슬람주의자들을 탄압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사회안정의 강력한 뿌리를 해치고 있다. 이제 동예루살렘에서 사원에 가는 사람은 “노인들”뿐이라고 불도저 기사 모하마드 아툰(25)이 말했다. “이슬람 지도자들은 대부분 감옥에 있다. 사흘 연속 사원에 가는 사람은 교도소로 끌려간다. 이제는 기도를 집에서 올린다. 사회가 완전히 해체됐다.” 동예루살렘의 비종교적인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20세기의 대부분을, 아랍계 예루살렘은 역사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영국인 총독들과 요르단의 하셰마이트 왕가와 친분 있는 소수의 지주 족장들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1967년 이후로 이스라엘 정부가 지배계급의 무력화에 나섰다. 3차 중동전쟁 전의 지방자치체를 해산하고 이스라엘 시정기관으로 대신하는 방법도 동원됐다. 한동안은 예루살렘의 명문가 후손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예루살렘의 명문가 출신의 후손인 파이살 후세이니는 오리엔트하우스라 불린 자신의 예루살렘 본부에서 1차 인티파다 운동 초기의 지휘를 거들었다. 오슬로 협약 이후 팔레스타인의 권력 중심은 예루살렘에서 라말라(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있는 요르단강 서안지역)로 점점 더 넘어갔다. 2001년 후세이니가 죽은 뒤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사회에는 대체로 지도자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 지도계급의 완전 실종”이라고 알쿠즈 대학(예루살렘) 총장 사리 누세이베가 말했다. 권력 공백은 팔레스타인의 전통적 사회 관습에서 벗어날 기회를 노리던 동예루살렘의 젊은이들에게 호기를 제공했다. 동예루살렘에서 일하는 또 다른 건설 근로자 후삼 드웨이앗은 홍해 해변의 이스라엘 휴양지 에일랏에서 웨이터로 일하면서 반항기를 보냈다. 8학년을 마친 뒤 학교를 그만두고 마침내 같은 레스토랑에서 일한 이스라엘 처녀를 만났다. 이 청년은 마약도 해 보고 그녀와의 사이에 아기를 낳았다. 가끔 질투심이 솟을 때는 그녀를 때렸다. 결국 그녀의 신고로 그는 체포됐고 이스라엘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계속 연락하고 지냈다. 석방된 뒤 드웨이앗의 부모가 둘 사이의 관계청산을 요구했다. 그의 모친은 용케도 아들에게 좀 더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신부를 구해 줬다. 동예루살렘 출신의 팔레스타인 처녀였다. 드웨이앗은 이스라엘 회사의 불도저 기사로 취직했고, 적어도 표면적으론 인생의 전환기를 맞은 듯했다. 부인은 두 아이를 낳았고 남편이 자상한 아빠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빚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어났다. 20만 달러가 넘었다. 집을 무허가로 지었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당국이 부가한 벌금 때문이었다. “때로는 아들네 가족을 내가 먹여 살렸다”고 모친 사라가 말했다. “아들의 월급은 통째로 빚 갚는 데 들어갔다.” 7월 2일 아침 그는 트랙터를 몰고 서예루살렘 거리로 돌진해 이스라엘 사람 몇 명을 죽인 뒤 비번이던 병사가 쏜 총에 죽었다. 이런 공격의 대응방안을 놓고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논란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들, 특히 보안분야 종사자들은 공격자의 집을 부숴 버리자고 한다. 이스라엘은 지난 몇 해 동안 보복성 폭파행위를 중단했다. 그것이 집단 처벌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인권운동가들의 요구를 수용한 측면도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저지할 수단을 잃었다”고 앞의 이스라엘 정보통이 말했다. 보복성 공격이 단기적으론 동예루살렘 주민들을 위협할 것이다. 그러나 전체 주민의 분노를 살 것이 틀림없다. “장기적으로는 억지 효과가 없다”고 예루살렘 부시장을 지낸 이스라엘 역사가 메론 벤베니스티가 말했다. “초기 단계에선 모든 식민 열강이 억지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교훈을 얻는다.” 남편을 잃은 자밀라 드웨이앗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자기 집을 허물어 자신과 아들들에게 벌을 주려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매일 그게 걱정돼 평온한 저녁시간을 보내려 가끔 터키 드라마 ‘누르’를 본다. 그러나 이제는 행복한 삶이 불가능해 보여 연속극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그녀가 뉴스위크와 인터뷰하는 동안 굳은 얼굴의 이스라엘 공무원들이 집 주위를 맴돌았다. 집을 부수려고 측량하는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남자들이 현관으로 들어오자 자밀라는 입술을 깨물면서 자신의 배를 감쌌다. 남편이 사람을 죽이고 죽은 날 그녀는 또다시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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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JOANNA CHEN and NUHA MUSLEH in Jerusa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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