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동반침체에 한국도 휘청
세계 동반침체에 한국도 휘청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10월 11일(현지 기준) 선진 7개국(G7) 재무장관과 금융위기 대책을 논의한 뒤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성명을 발표했다. |
#장면 1. 1920년대 중반부터 미국인들은 끊임없이 플로리다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플로리다 반도 전체가 무위도식하는 돈 많은 휴가자들로 북적일 것이라 믿었다. 해안에서 수십 마일 떨어진 곳도 ‘해변’이라 불리며 높은 가격에 팔려나갔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서 서서히 주식시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25년 반짝했던 주가는 26년에 하락세를 보였다가 27년부터 본격적으로 올랐다. 돈이 넘치는데도 뉴욕연방준비은행은 지급준비율을 낮추는 등 ‘역주행 정책’을 썼다. 증거금만으로도 주식을 살 수 있게 하는 등 규제도 완화됐다. 펀드를 만들어 시중자금을 그러모은 투신사들도 이때 급격히 늘어났다.
주식을 하는 모든 사람이 일확천금을 거머쥐는 행복한 꿈에 젖어 들었다.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29년 10월 24일 목요일, 주가가 폭락했다. 사람들은 이를 ‘검은 목요일’이라 불렀다. 하지만 주가만 폭락한 게 아니라 세계 경제를 쑥대밭으로 만든 대공황(Great Depression)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장면 2. 2008년 10월 13일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유럽중앙은행(ECB) 등은 ‘무제한 달러 공급’을 선언했다. 영국 정부는 세 개 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하기로 했다. 세계 증시는 유례없는 폭등세로 화답했다. 같은 날 오후 미국 재무부 회의실엔
9명의 은행장이 소집됐다. 헨리 폴슨 장관은 이들에게 한 장짜리 서류를 내밀고 “서명하라”고 다그쳤다.
정부가 2500억 달러를 들여 은행 지분 일부를 사들이겠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였다. ‘무제한 달러 공급’에 이어 은행의 일부 국유화를 통해 금융위기에 쐐기를 박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시장은 환호성 대신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음날 소폭 하락세로 마감한 뉴욕 다우지수는 이튿날 7.9%나 폭락했다.
금융위기 속에 잠시 잊혔던 경기침체란 악령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금융위기가 대공황과 같은 경제 위기를 불러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제 전문가는 흔치 않다.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교수는 “세계 금융위기가 대공황 상태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공황 때와 달리 각국 중앙은행은 금리를 신속하게 내리고 있다.
국제 공조체제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공황 당시에 FRB는 원죄자인 금융회사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한다며 오히려 금리를 높였다. 게다가 각국은 자국 이기주의에 빠져 보호무역을 강화함으로써 위기를 증폭시켰다. 그러나 많은 점에서 현재의 금융위기는 과거 대공황을 떠올리게 한다.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많은 점에서 지금의 위기는 대공황 때와 비슷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부동산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자 금융시장이 급속히 붕괴하고, 이후 실물경제 침체가 모습을 드러내는 상황이 비슷하다고 본다. ‘부동산 거품 붕괴→금융위기→실물경제 침체→금융위기 심화의 악순환’이 이어질 공산이 커졌다는 것이다.
올 상반기까지만 해도 미국 경제가 침체기에 접어들었는지가 논란의 대상이 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경기침체를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어느 정도까지 무너질 것이며, 언제 회복 기미를 보일 것인지가 문제일 뿐이다. 삭스 교수는 “깊고 오랜 경기후퇴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개리 스턴 미니애폴리스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침체가) 3년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민은행의 이상원 뉴욕지점장은 “일부 지역에선 집값이 30% 이상 빠졌고, 마트 등 상점엔 눈에 띌 정도로 손님이 줄고 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알쏭달쏭했던 미국의 실물경제 지표도 확연하게 내림세로 돌아섰다. 10월 16일 발표된 9월 미국의 산업생산은 34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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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발표된 9월 소비판매도 3개월 연속 줄었다. 소비판매가 3개월 연속 하락한 것은 17년 만이다. 특히 하락폭 1.2%는 3년 중 최고치였다. 미국의 집값은 최고치를 기록했던 2006년 7월에 비해 20%나 떨어졌다. 실업률도 급등할 기세다. 지난 9월 마감한 2008 회계연도 재정적자는 사상 최대인 4548억 달러를 기록했다.
대규모 구제금융의 집행에 따라 내년도 재정적자는 최대 1조 달러로 늘어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물론 실물경제가 빠른 속도로 회복된다면 구제금융 투입액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 한국이 외환위기 이후 168조 원의 공적자금을 쏟아 붓고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실물경제의 회복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다.
반대로 미국의 실물경제가 오랜 시간 미궁을 헤맬 경우 미국 정부는 물론 미국에 투자한 각국 정부도 연쇄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오랜 시간 금융위기와 실물 위기가 반복될 수 있다는 얘기다. 유럽도 이미 실물경제의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1%(추정치)인 영국의 경제성장률이 내년엔 마이너스 0.1%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IMF를 비롯한 각국의 경제연구소들은 독일, 프랑스 등 유로존 국가의 경제성장률이 내년이 급속히 떨어질 것으로 경고하고 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중국으로 대표되는 개발도상국의 침몰 조짐이다. 특히 중국의 경제성장 엔진이 멈춰버릴 경우 세계 경제는 막대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중국의 9월 수출액은 일 년 전보다 21.5% 늘어난 293억 달러를 기록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은 증가분의 절반은 위안화 절상, 또 다른 절반은 중국의 높은 인플레이션이 반영되지 않은 데 따른 착시 효과라고 진단했다. 급기야 중국 최대의 장난감 제조업체로 생산량의 70%를 미국에 수출하던 허쥔(合俊) 그룹은 공장 두 곳을 폐쇄하는 조치를 취했다.
미국의 경기침체가 본격화된 데다 안전 문제 논란까지 겹치자 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런 경제 상황을 반영한 중국 상하이 증시의 주가지수는 지난해 최고치에 비해 3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10분기 연속 두자릿수를 유지했던 중국의 경제성장률도 올 3분기엔 9%대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되면 2007년 2분기에 12.7%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정점을 찍은 중국 경제는 5분기 연속 미끄럼을 타게 된다. 중국 경제의 침체는 세계 경제, 특히 미국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정보기술(IT) 버블 붕괴와 9·11테러를 겪은 미국이 이른 시간에 성장동력을 회복한 데엔 중국 덕이 컸다.
중국이 싼 공산품을 대거 미국에 공급하면서 미국민은 안정된 물가 속에서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두둑해진 지갑을 마음껏 풀었다. 아프가니스탄·이라크와 전쟁을 치르느라 미국의 재정적자는 급속히 불어났지만 이 또한 중국이 효과적으로 메웠다. 수출로 벌어들이는 돈이 많아지면서 외환보유액이 1조8000억 달러에 달할 정도로 부자가 된 중국이 미국의 국채를 사들이면서 빈 금고를 채워줬던 것이다.
중국 경제의 침체는 미국 못지않게 한국에도 큰 상처를 남길 것으로 우려된다. 중국은 이미 2003년부터 미국을 제치고 한국의 최대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한국 경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커진 것이다. 지난 수년간 2%대의 낮은 소비자 물가상승률을 기록한 것도 중국 덕이 컸다. 미국에 적용된 똑같은 논리가 한국에도 성립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한국 경제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것은 러시아, 카자흐스탄 같은 신흥 자원 부국과 브라질, 인도 등이 금융위기의 여파로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2006년부터 미국과 유럽의 경기가 가라앉는 조짐이 보였는데도 한국의 수출증가율이 두자릿수를 기록했던 것은 중국과 이들 신흥국의 급속한 발전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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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의 꿈이었던 수출 다변화가 이뤄진 것도 이들 나라의 성장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나 인도의 상반기 경상수지 적자는 118억 달러로 한국의 53억 달러와 비교하면 두 배가 넘는다.
7월 말 6만 포인트에 육박했던 브라질 주가지수는 석 달도 못 돼 3만6000대로 주저앉았다. 끝없는 고도성장을 이룰 것 같은 나라들이 금융위기 역풍에서 비틀대고 있는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이시욱 연구위원은 “달러당 환율이 900원까지 떨어졌던 지난해도 우리가 14%의 높은 수출증가율을 기록했던 것은 중국을 포함한 신흥국이 뒤를 받쳐줬기 때문”이라며 “신흥국의 성장이 멈춘다면 한국 경제도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어두운 전망이 기정 사실처럼 돌고 있다. 올해 수출증가율이 20% 넘을 전망이다. 하지만 내년 수출증가율에 대해선 삼성경제연구소(Seri)가 8.3%, LG경제연구원이 8.9%를 제시했다.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에서 수출증가율이 이렇게 떨어지니 경제성장률이 낮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IMF는 애초 한국의 성장률을 4.3%로 전망했다가 최근 이를 3.5%로 낮춰 잡았다. Seri는 3.6%로 전망했다.
심지어 국제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는 내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외환위기 당시였던 98년 이후 가장 낮은 2.2%에 머물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런 암울한 전망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은 심상치 않은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올 들어 9월까지의 무역적자는 146억7000만 달러로 지난해의 119억3500만 달러 흑자와는 딴판이다.
물론 국제 원유가가 급등하면서 중동 국가에 대한 무역적자가 커진 것이 주요 원인이지만, 세계적인 경기침체도 적자폭 확대에 기름을 부었다. 제조업과 건설업의 부도업체 수도 9월에 203개로 3개월 만에 증가세로 반전됐다. 반면 신설법인 수는 2개월 연속 줄었다. 특히 부도 건설업체가 급증하고 있다.
올 상반기 부도가 난 건설업체는 180개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4% 늘었다. 이는 전국 미분양 가구가 급속히 늘면서 업체에 자금이 돌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7월 말 현재 전국의 미분양은 16만595가구로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98년 7월의 11만6433가구보다도 많다.
부동산 경기 악화는 금융권에도 직격탄을 날릴 것으로 보인다. 저축은행의 건설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 연체율은 지난해 말 11.6%에서 올 6월엔 14.3%로 크게 높아졌다. 저축은행 대출에서 PF가 차지하는 비중이 24%에 이르기 때문에 부동산 경기의 거듭된 하락세는 곧바로 저축은행의 도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시중금리가 급등하면서 500조 원에 달하는 가계부채의 부실 위험도 높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은행권은 돈이 없어 쩔쩔 매고 있다. 리먼브러더스의 파산보호 신청 이후 한 달여 간 은행들은 하루짜리 달러 대출인 오버 나이트로 연명하고 있다. 원화 유동성 압박도 심해지고 있다. 산업에 돈줄을 대는 게 은행인데 정작 은행의 금고가 비어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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