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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찬바람처럼 ‘노후의 꿈’도 사라졌다

겨울 찬바람처럼 ‘노후의 꿈’도 사라졌다

금융 위기는 서민들의 노후 꿈마저 반 토막 냈다. 노후용으로 들어놨던 펀드는 물론이고 변액보험·퇴직연금 등 각종 개인연금상품의 수익률도 추락하고 있다. 부동산에 묻어뒀던 안전장치도 허물어지고 있다. 서울 아파트 119만여 가구의 시가총액은 불과 한 달 사이 11조원이나 빠졌다. 초고령 사회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은퇴 후를 보장할 자산은 확 줄었으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노후 준비를 포기하거나 반 토막 난 통장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방법을 찾아야 한다.

60대인 L씨는 펀드의 ‘펀’자도 모르던 평범한 장사꾼이었다. 그는 ‘고수익 절대 보장’이라는 은행 직원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주식형 펀드에 1억1000만원을 넣었다가 8900만원을 날렸다. 철물점을 운영했던 그가 쌈짓돈 30만원을 매월 납입해 모은 피 같은 돈이었다.

L씨는 요즘 끼니를 거를 때가 많다. 펀드통(痛)이 한 노인의 생계까지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 중구에 사는 전업주부 K씨(59)의 사정도 딱하다. ‘펀드 열풍’이 불었던 지난해 중순, K씨는 노후자금 6억원을 남편 몰래 14개 주식형 펀드에 분산투자 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한 상품’이라는 은행 직원의 말에 솔깃해 정기예금에서 펀드로 갈아탔던 것.

‘펀드에 2000만원 투자해 4000만원 만들었다’는 옆집 아줌마의 자랑도 그를 부추겼다. 그런데 지금 남은 돈은 1억9000만원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3분의 1 토막’이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발을 뺄 처지도 못 된다. 펀드에 가입했다가 망한 사실이 들통나면 남편이 가만있지 않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선 주가가 다시 오르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는 요즘 가시방석 위에서 사는 기분이다. 혹여 남편이 알까 노심초사다. 더구나 내년이면 남편이 퇴직할 텐데 이후 살길도 막막하다.



금융 위기 쓰나미에 속수무책

1998년 외환위기 후 달라진 사회 풍토가 있다. 무엇보다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졌다. 아직은 창창한 나이인 40~50대 실업자도 양산됐다. 구조조정 칼바람의 결과다. 사오정·오륙도·38선(38세에는 퇴직도 선선히 받아들인다) 등 조기 퇴직을 상징하는 우울한 신조어가 양산된 것도 그 무렵이다.

또 다른 변화는 청년 실업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점이다. 이는 늦게 출발하고 빨리 은퇴하는 사회가 도래했음을 뜻한다. 게다가 평균 수명은 꾸준히 늘고 있다. 부모 세대의 평균 수명은 60세(1971년 62.3세)를 갓 넘는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80세에 육박한다. 그만큼 돈 벌 수 있는 시간은 짧아진 반면 소득 없이 보내야 하는 날이 길어진 것이다.

노후자금 마련을 위한 재테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도 이런 이유다. 그렇다고 현직에 있는 동안 노후자금을 차곡차곡 모으기도 쉽지 않다. 1998년 평균 13.39%에 달했던 정기예금 금리는 현재 5% 안팎이다. 저축만으로 노후자금을 모아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더욱이 10원(1970년)에 불과하던 버스요금이 1000원으로 훌쩍 뛸 정도로 물가가 급등했고, 사교육비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95년 월 7만원(1인당)이던 사교육비는 현재 38만원까지 올랐다. 이렇게 마음은 급하고 들어갈 돈은 늘다 보니 사람들이 ‘한 방’을 은근히 기대하며 주식이나 부동산 등에 공격적 투자를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엔 공적연금제도에 대한 불신도 한몫 톡톡히 했다. 공적연금이 노후를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공격적 투자 기류가 확산된 것이다.

국민연금연구원이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연금을 ‘다소 불신한다’ ‘매우 불신한다’는 응답이 50.8%에 달했다. 국민 절반이 국민연금을 신뢰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우재룡 동양종합금융증권 자산관리컨설팅연구소장은 “별다른 세제혜택도 없는 적립식 펀드 계좌 수가 1400만 개까지 증가하고, 변액보험 규모가 50조원을 넘어선 것은 국민연금보다 개인투자로 노후자금을 마련하겠다는 심리를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락한 노후의 보증수표로 여겨졌던 각종 금융상품들은 시쳇말로 죽을 쑤고 있는 형편이다. 불티나게 팔리던 펀드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한국펀드평가에 따르면 설정된 지 1년이 넘은 50억원 이상 규모의 주식형 펀드 401개 중 손실률이 50%를 넘은 펀드만 128개에 달했다. 전체의 31.8%가 반 토막 난 것이다. 개인연금상품도 추락하는 수익률에 비명을 지르고 있다. 비교적 안전한 상품으로 꼽혔던 변액보험의 추락도 속절없다.



지금은 차분히 참고 기다릴 때


행복한 노후를 위해선 안정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 사진은 실버타운에서 운동하고 있는 노인들.
변액보험은 위험보험료(가입자의 보험료를 받아 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 등)와 보험료 사업비를 뺀 나머지를 주식 또는 채권에 투자해 수익을 올리는 상품이다. 생명보험협회의 ‘변액보험 운영현황’ 공시자료에 따르면 국내 583개 변액보험 상품 중 514개의 평균 수익률은 11월 말 현재 -18.20%로 나타났다.

순자산이 100억원 이상인 256개 변액보험의 평균 수익률도 -17.86%였다. 퇴직연금의 수익률도 별반 차이가 없다. 생명보험협회에 공시된 퇴직연금(실적배당형) 84개 상품의 지난 1년간 수익률은 평균 -16.18%(12월 4일 현재)로 조사됐다. 우재룡 소장은 “노후보장이 아닌 자산 불리기를 목적으로 개인연금 상품에 가입했다면 손해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연금상품도 잘못 운용하면 손실을 피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한국 사람들이 확실한 노후자산으로 꼽는 부동산도 ‘불패신화’가 깨질 조짐이다. 재건축 규제와 전매제한을 대폭 완화하는 내용의 11·3 부동산 대책이 발표됐음에도 부동산 가격 하락세는 계속되고 있다.‘부동산써브’가 서울 아파트 119만여 가구를 조사한 결과 시가총액은 666조원으로, 11·3 대책 발표 시점(677조원)보다 11조원 떨어졌다.

상위 10% 아파트 11만6000가구의 매매가 변화 조사결과에서도 MB정부 출범 이후 평균 1억원(가구당) 이상 하락했다. 노후자금으로 부동산을 산 사람들은 시장 침체로 고민이 많아졌다. 특히 돈벌이가 없는 은퇴자는 타격이 클 것으로 보인다. 제때, 제값을 받고 팔기가 어려워 목돈이 부동산에 오래 묶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난 15년간 부동산 가격이 폭락한 일본의 경우, 부동산에 투자한 은퇴자들은 아직도 ‘매매되지 않는’ 부동산을 붙들고 골머리를 앓고 있다. 투자 전문가들은 이 같은 자산 축소 시대엔 목적을 정확하게 가지라고 조언한다. 노후자금 마련이 목적이라면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투자하라는 것이다.

노후자금의 씨앗을 만들어 뿌리고 결실을 얻기 위해선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최고의 재테크 전문가로 손꼽히는 데이비드 바크는 자신의 저서 『자동으로 부자되기(The Automatic Millionare)』에서 카페라테 한 잔이 풍부한 노후자금을 만들 수 있다는 유명한 논리를 폈다. 3500원짜리 카페라테 한 잔을 먹지 않으면 한 달에 10만5000원, 1년에 126만원, 10년이면 1260만원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행복한 노후를 위해선 대박 욕심을 버리고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진리를 되새겨야 한다는 지적이다.
힘들어지는 노후자금 마련

■ 공격적 투자 했더니

펀드 반 토막 나고 (출처: 제로인, 기간:11월 26일 현재)
- 50억원 이상 주식형 펀드 401개 중 손실률 50% 이상 128개(31.8%)
- 주식형 펀드 3개당 1개 반 토막
개인연금상품도 수익률 하락 (출처: 생명보험협회)
- 변액보험 상품(514개) 평균 수익률 -18.20% (11월 말 현재)
- 순자산 100억원 이상 변액보험(256개)
평균 수익률 -17.86% (11월 말 현재)
- 퇴직연금 실적배당형 상품 평균 수익률 -16.18% (12월 4일 현재)

■ 부동산 믿었더니(기간: 11월 3일~12월 3일, 출처: 부동산써브)

불패신화 깨지고
- 상위 10% 아파트(11만6000가구) 매매가 평균 1억원 하락
- 송파구 매매가 1억6552만원 하락(평균 155.1㎡)
- 양천구 매매가 1억4319만원 하락(평균 155.1㎡)
- 강남구 매매가 1억1546만원 하락(평균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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