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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 출신 점장의 분투

아르바이트 출신 점장의 분투

일본식 현장경영의 ‘현장’에는 정작 무엇이 있을까. 작업복 입은 CEO, 시찰 중인 대규모 임원단이 먼저 떠오를지 모르겠다. 그러나 잃어버린 10년을 현장경영을 통해 넘어섰다는 일본 기업의 현장에 가보면 CEO는 없다. 대신 CEO처럼 담당 파트를 경영하는 중간관리자를 만날 수 있다. 일본 현장경영의 핵심이다.

일러스트:남동윤·backgama1@hanmail.net

지난해 12월 13일 도쿄 빅사이트에서 일본 국내 최대 규모의 환경전시회 ‘Eco-products 2008’이 열렸다. 보통 전시회라면 입장객의 눈길을 끌기 위해 늘씬한 내레이터 모델이 안내를 맡는 경우가 많겠지만 이 전시회에서는 유난히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안내원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의 직함을 물어보니, 부장 이상 임원들이 적지 않았다. 도요타자동차 부스에서 만난 오나카 히데미 연료전지개발부 부장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한 50대 관람객에게 5년 후 자동차시장 전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요즘같이 자동차산업이 위기를 맞이한 때에, ‘현장’에서 벗어나 관람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한가로워 보여서 질문해봤다.

도요타 방식이라면, 자신이 맡은 생산라인을 끊임없이 개선해 효율성을 높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생산직 직원이라면 공장에서, 연구원이라면 연구실에서 개선책을 내놓아야지 전시회에서 설명이나 하고 있는 것은 효율성 제고에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수년을 연료전지 자동차 개발자로 살아왔다. 앞으로 자동차산업은 친환경 자동차 개발에 몰두할 것이다. 우리의 일은 당장 돋보이진 않지만 2015년 이후 친환경차가 시판되면 도요타의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다. 조 후지오 회장도 적극 지원하고 있다. 문제가 있다면 높은 시장가격이다. 가격을 낮추려면 전지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기술개발이 우선이다. 그러나 기술 자체를 발전시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더 많은 고객의 니즈를 이끌어내 시장가격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업이 향후 친환경자동차시장의 선두가 될 것이다. 전시회는 고객의 니즈와 경쟁사의 수준을 가늠하기에 좋은 현장이다.”

오나카 부장은 자신이 박람회에서 일반 관람객과 대화하는 것도 현장경영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LG텔레콤 등 한국 기업에 도요타 방식을 전수해준 와카마쓰 요시히토는 현장경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관람객과 얘기하는 도요타 부장

“생산현장에서 일하는 관리직 사람들은 현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전부 알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도요타 방식에서 현장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직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앞으로 할 일 등에 대해 디자인하고 재점검하는 것까지를 의미한다. 이것이 도요타식 현장경영이다.”

흔히 현장경영은 경영진과 근로자 간 소통이 없어, 경영진이 탁상공론만 하게 되는 경우 강조되곤 한다. 최고경영자가 숲은 봐도 나무 한 그루는 못 보는 경우도 왕왕 있기 때문이다. 최고경영자가 자꾸 현장을 방문하는 이유다. 그런데 도요타의 현장경영론은 최고경영자뿐 아니라 중간관리자도 여러 현장을 방문함으로써 CEO의 눈을 갖기를 권장한다.

CEO의 책상에서 계획되는 일이 현장에서 실현될 수 있으려면 실무자가 회사의 청사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세계 자동차산업은 한 치 앞을 모르는 벼랑 끝을 걷고 있다. 도요타자동차도 사상 첫 영업적자라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오나카 부장은 “고비마다 온 직원이 함께 이겨왔고, 미래 성장동력을 가져가기 위해 모든 직원이 현장에서 오늘도 달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위기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현장 경쟁력을 키워온 것이 도요타가 세계 1위 자동차 업체로 우뚝 솟은 비결이기도 하다. 현장의 실무자가 경쟁력을 최대치로 이끌어내려고 노력하다 보면 기적 같은 일도 일어난다. 최근 일본인의 소비 심리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학습효과가 있었다는 분석이 대세다.

이런 와중에도 일본 최대 유통업체 세븐앤아이홀딩스 그룹 내 이토요카도는 일본 내 첫 할인점 성공이라는 쾌거를 이끌었다. 와타나베 야스미쓰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1개월 만에 죽어가던 이토요카도 니시아라이점을 리뉴얼해 할인점 ‘더 프라이스’를 오픈했다. 매출액이 30% 올랐고 연 매출 40억 엔을 기대하고 있다.

세븐앤아이홀딩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븐일레븐’과 함께 일본 내 170여 개 점포를 가지고 있는 ‘이토요카도’ ‘밀레니엄리테일링도세이부’와 소고 백화점을 거느리고 있다. 2006년 그룹 매출액만 5조 엔에 달한다. 이토요카도에서 일본 내 처음으로 시도한 할인점 ‘더 프라이스’는 세븐앤아이홀딩스의 스즈키 도시후미 회장의 결단으로 추진됐다. 스즈키 회장은 평소 “일본 시장에서는 저가 전술로는 어렵다”는 지론을 펼쳐왔다.



“내일부터 당장 새 업무에 착수하게”


그러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가계 소득이 줄고 점차 절약지향적 소비가 늘자 ‘할인점’에 과감히 도전한 것이다. 스즈키 회장 경영학의 기본은 변화대응이다. 그런데 대응을 빠르게 해야 했다. 유통업은 트렌드를 누가 먼저 읽고 만드느냐에 성공의 관건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스즈키 회장은 바로 초유의 인사를 단행했다. 요코하마의 이토요카도 점장인 49세의 와타나베 야스미쓰를 새로운 프로젝트의 리더로 발탁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일부터 당장 새 업무에 착수하게.” 당시 새 점포 오픈까지 남은 시간은 1개월이었다. 바로 2008년 7월 말의 일이다. 회장이 미쳤거나 와타나베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함은 아니었다.

회장이 현장의 고수를 알아보는 눈을 지녔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스즈키 회장이 젊은 점장을 높이 산 점은 바로 현장에서의 경쟁력이었다. 와타나베는 아르바이트로 체인소매점에 입문해 신시장 개척에 연달아 성공하면서 ‘소매의 프로’란 평가를 들어왔다.

그는 중국 시장에서는 제로에서 시작, 이토요카도 최고의 해외수익을 올렸으며 귀국 후에는 요코하마점으로 돌아와 회사 전체에서 매출 1위를 기록했다. 와타나베의 전략은 어찌 보면 간단했다. 각 현장에서 날고 기는 고수들의 노하우를 총동원하는 것이었다. 현장직원의 능력을 살려주는 스즈키 회장의 인재 용인술과 비슷하다.

와타나베를 필두로 각종 노하우가 모이자 10~30% 싼 가격에도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상품은 박스에 담긴 채로 약간 높게 진열한다. 비스듬히 놓인 박스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은 쉽기도 하지만 박스에서 꺼내 상품을 진열하는 직원을 줄일 수 있어 비용 절감 효과도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와타나베는 거래처를 다양화해 품질을 높게 유지하는 전략도 함께 가져갔다. 이 중에서도 와타나베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직원의 태도다. “상품구성이나 진열방법 등은 금세 다른 곳에서도 따라 할 수 있다. 언제나 차별화가 가능한 것은 사람이다.”

비정규직원을 주로 쓰면서 인건비를 줄였지만 그는 계산원 등의 서비스 교육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토요카도는 첫 ‘더 프라이스’가 성공사례로 판단되면 매장을 점차 늘려갈 예정이다. 세븐일레븐과 같은 히트상품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주목되고 있다.
도요타나 이토요카도의 예처럼 기업의 허리 역할을 하는 현장 중간관리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일본식 현장경영의 핵심이다.

미래성장력 확보와 신시장 개척으로 CEO가 다른 현장을 누비고 있는 사이, 자신의 영토를 철저히 지키는 것은 중간관리자다. 현장을 경영하는 것이 기업의 허리인 중간관리자라면 이들을 배치하는 것은 최고경영자다. 일본은 현재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차가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도요타의 첫 영업적자, 소니의 대량해고 등으로 거리는 흉흉하다. 일본식 ‘현장경영’에 항상 영광만 있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현장경영으로 10년 불황을 이겨냈다고 하지만 미국발 금융위기의 찬바람에 일본 역시 떨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의 현장경영주의자들은 오늘도 다시 현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장이 주는 교훈을 실천한 기업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교훈은 위기일수록 허리에서 힘이 나와줘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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