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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 만능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뉴딜 만능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조지형 이화여대 교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는 역사상 최악의 수렁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 올해 3분기에는 다시 경제가 나아질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도 있는 반면, 더욱 악화될 것이며 더 오래갈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도 있다. 미국 경제의 붕괴를 정확히 예측한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이번 경기침체가 올해 연말까지 지속될 것이며 실업률은 2010년에 약 9%로 정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루비니의 예언이 맞을까? 대공항의 역사를 더듬어보자. 80년 전인 1929년 10월에 발생한 대공황은 1932년 7월까지 추락을 거듭했다. 10월 29일 ‘암흑의 화요일’에 다우지수가 11.73% 폭락한 이후, 1933년까지 무려 증시 시가총액의 90%가 증발했다. 또 실업률은 27%까지 치솟아 무려 125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으며, 경제성장률은 -13%를 기록했다.

대공황은 전 지구적으로 확산돼 전 세계 무역은 60%나 감소했다. 최근 영국의 역사학자인 폴 존슨은 정부가 될 수 있는 한 경제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자유주의적인 관점에 선 그의 의견은 우리에게 생소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배운 세계사에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공황으로부터 자유주의 세계를 구원한 수퍼맨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100일 동안의 밀월기간에 루스벨트는 금융개혁, 농업개혁, 노사관계 개혁 등을 비롯한 각종 경제대책과 사회보장제도 등의 사회개혁을 제시했다. 당시 그의 정적들은 뉴딜을 ‘사회주의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비탈길’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그의 명성은 그를 러시모어 산의 대통령 기념동상 반열에 오르게 했다.

1월 20일에 취임할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도 루스벨트의 케인스주의적 자유주의를 모방한 경제대책을 모색하고 있다.
21세기의 뉴딜인 셈이다. 오바마는 도로와 다리의 신설, 학교와 병원 및 정보통신시설의 현대화 등 국가기간시설과 공공사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제시한 바 있다.

세계 경제위기에 대한 한국의 대책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명박 행정부는 4대 강 정비사업에 14조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박재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은 4대 강 정비사업이 “다목적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한국판 뉴딜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미국 사학자는 뉴딜이 미국을 대공황에서 구원했다는 평가를 거부한다.

뉴딜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가 나아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때문이다. 엄청난 군수물자의 전 세계적 수요와 공급을 통해 경제위기 극복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폴 존슨과 같은 자유주의적 역사가들은 오히려 뉴딜은 구제금융으로 부실기업의 수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했고 노동자의 권리를 지나치게 인정해 주었으며 사회의 환부를 제대로 도려내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더구나 정부의 지나친 간섭 때문에 개인의 자조, 시민적 덕성, 자유 등 개인의 보편적 가치가 상실되거나 심각하게 침해되었다고 파악한다. 그렇다고 해서 국내 투자를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1929년의 대공황과 오늘의 세계 경제위기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으로 경제의 지구화, 전 지구적 동조화 현상을 거론한다.

1929년의 대공황 역시 전 세계의 여러 국가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다분히 루스벨트 대통령의 금의 국외유출 금지 및 매입정책으로 미국의 경제위기가 세계적으로 확산된 결과였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의 경제위기도 미국발이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시작된 경제위기는 리먼브러더스 등 거대 금융기관을 침몰시키면서 금융위기를 가져왔고 지금은 실물경제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미국의 유례 없는 호황은 자본의 세계화에 힘입은 것이었다.


세계는 보다 많은 만남과 대화를 나눠야 한다. 지난해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G20 금융정상회의.



편협한 국가중심 정치·경제 모델

지난 수십 년간 세계의 막대한 잉여저축(8%)을 흡수하면서 미국은 호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만끽해 왔다. 지불능력 없는 사람들도 저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전통적인 ‘스위트 홈’ 이데올로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세계화된 자본의 덕분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세계 경제위기가 단순히 인간 덕성의 상실 혹은 탐욕의 결과라는 주장은 지나치게 도덕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이다.

물론 월스트리트의 탐욕과 무모함을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작금의 현상을 이런 식으로 분석하고 파악하는 것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탐욕이 지배하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는가. 오늘의 세계 경제위기를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이 지배하는 일극시대에서 다극시대로 변화하는 전환시기로 파악하는 주장도 있다.

결국 상대적인 주장이긴 하지만, 미국의 몰락을 역설한 경우도 있다. ‘무적(無敵)의 미국’ 혹은 ‘20세기는 미국의 세기’라는 이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금융위기 관리 능력은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이미 오래전 9·11 테러에서 보여준 것처럼 준(準)국가단체들의 도전뿐만 아니라 중국과 인도 등 신흥 강국의 등장으로 미국의 아성은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미국 몰락의 주장은 세계 현실을 반영하기보다는 오히려 국가 중심적 이데올로기의 편의적 발상에서 기인한 것이다. 국가 정치지도자들이나 행정부의 고위인사들의 정책 결정과정에서, 세계 경제위기의 진단과 극복 대안은 거의 필연적으로 국가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국가 중심의 정치경제 모델 및 역사발전 모델에 근거한 지식인들의 주장은 이러한 편협성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전 지구적으로 다양한 층에서 상호 관련성과 상호 의존성이 매우 빠른 속도로 강화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뉴딜의 이미지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는 지구사회에 대한 역사적 상상력의 빈곤에 기인한 결과다. 이들은 지구사회의 시작을 단순히 1960년대 이후의 세계화 현상에서 찾거나 19세기 이후 서구 제국주의의 ‘세계지배’에서 찾는다. 이들은 여전히 국가를 가장 강력한 역사 추동력으로 파악한다.

오늘의 세계 경제위기는 전 세계적 신용 시스템의 붕괴·동조 현상이다. 한때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세계 금융의 효과적인 통제기구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유로화와 신흥 강국의 등장, 부의 전 지구적 이동(특히 중국과 인도, 산유국으로의 이동), 전 지구적 인구이동과 자원경쟁, 기후변화 등은 FRB와 IMF의 역할을 대폭 축소시켰다.

세계화된 경제 기회와 지구사회의 개방성과 유연성은 국가 중심의 기존 경제관리 시스템을 훌쩍 뛰어넘는다. 돌이켜 보면 인류가 처음 등장한 이후 인류는 지속적으로 전 지구에 확산되었으며 상호 간에 연결고리를 놓치지 않았다. 인류의 등장 이후, 인류의 역사는 다양한 지역과 사회들의 수렴과 분기(分岐)를 반복하면서 진행되어 왔다.

인류의 역사는 일극시대와 다극시대를 오간 것이 아니라 여러 중심이 공존하면서 상호 연결되고 의존하는 다극의 모습으로 진행되어 왔다. 문제는 상호의존성과 상호 연결성이 어느 정도 강화되거나 약화되어 왔는가에 있다. 오늘의 세계 경제위기는 지구사회가 또 다른 분기시대로 접어들 것인가 혹은 새로운 형태의 수렴시대로 접어들 것인가의 기로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느 길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세계중앙은행’의 설립과 같이 새로운 지구사회의 이념과 질서를 어떤 방식으로 구축하는가에 달려 있다.

조지형 1963년생.
서강대 졸업.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어배나샴페인교 대학원 박사. 현재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현 이화여대 연구처장 겸 산학협력단장. 저서로 『헌법에 비친 역사』 『서양사』(공저) 『대통령의 탄생』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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