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살·이혼…‘D-트라우마’ 경계령
범죄·자살·이혼…‘D-트라우마’ 경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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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을 뜻하는 ‘Depression’에는 우울, 울병(鬱病)이라는 뜻이 포함돼 있다. 경제가 위기에 빠지면 사회는 무기력해지고 불안해진다. 쌀과 옷가지를 훔치는 생계형 절도가 늘고, 술집에서 옆 좌석 손님과 싸우는 일이 잦아진다.
약국엔 우울증·불면증 치료제를 찾는 환자가 늘어난다. ‘욱하는 마음’에 불을 지르고, 사람을 찌르는 우발적 범죄자가 증가한다. 취업 못한 아들은 제 방에서 인터넷 게임으로 날을 새우고, 곤궁에 빠진 부부는 싸우다 지쳐 가정법원을 찾는다.
절망감에 외로운 죽음을 선택하는 아빠가 늘어나고, 그럭저럭 살아가던 가족은 빈곤층으로 전락한다. 어느 정도 큰 아이들은 차라리 가출을 택한다. 노숙인이 늘어난다. 툭하면 거리에서 반정부 시위가 열린다.
며칠 만에 몇 만원을 손에 쥔 일용직 노동자는 소주 한 병을 사 마신 후, 경마장으로 향한다. 그곳은 택시기사, 분식집 주인, 대학 휴학생으로 만원이다. 직장을 잃지는 않았지만 남편 월급이 자꾸만 밀리는 주부는 생활비를 위해 보험과 펀드를 깨고, 남편은 토요일 밤 TV 앞에서 로또 번호를 확인하며 욕을 내뱉는다.
‘우울한 사회’ ‘욱하는 사회’의 그림자가 다시 드리우고 있다. 차라리 외환위기 때의 데자뷔이기를 바라지만, 그림자는 빠르고 짙게 우리 사회를 덮치고 있다. 불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게 중론인데 ‘불황 후유증’은 벌써 시작된 듯하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D-트라우마(Depression Trauma)’ 실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보건복지가족부 콜센터에 위기가정 신청을 문의하는 상담 건수도 지난해 같은 기간 8408건에서 올해 2만5696건으로 무려 세 배나 증가했다. 위기가정 신청자의 대다수는 경제난으로 인한 소득상실, 실직·폐업 등을 이유로 들었다. 실제로 지원본부가 위기가정 신청 이유를 조사한 결과 소득상실이 27%(2만2656건)로 가장 많았고, 질병·부상 22%(1만8786건), 실직·폐업 14%(1만2321건), 가족 방임 2%(1639건) 등이었다.’(서울신문 2월 6일자)
경제 위기가 가정 위기로 이어지고, 결국 가정을 해체하는 현상은 외환위기 때 또렷이 목격됐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따르면 1995년 ‘기타 혼인을 계속할 수 없는 중대한 사유(민법 804조 6호)’로 이혼상담을 해 온 1695건 중 경제적 이유는 13%인 220건이었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터진 1998년에 20.9%로 늘었고, 다음해에는 22%로 증가했다.
사회취약층, 자살 위험에 노출
상담이 아닌 실제 이혼율도 외환위기 때 급증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0년 이후 전년 대비 이혼 증가율이 가장 높았던 때는 1998년으로 무려 28.0% 증가했다. 이후 다소 잠잠해졌던 이혼 증가율은 카드사태로 신용불량자가 양산된 2003년 전년 대비 15% 증가했다. 외환위기 이후 최고치였다.
그해 이혼한 부부 여섯 쌍 중 한 쌍은 이혼 사유가 ‘경제 사정’이었다. 최근에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구지법 가정지원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10월 말까지 접수된 전체 이혼사건은 8506건으로 전년도 같은 기간 7931건에 비해 7.3%(575건) 늘었다. 이에 따라 버려지는 아이도 늘고 있다.
원희목 한나라당 의원이 지난해 말 보건복지가족부로부터 제출 받은 ‘보호가 필요한 아동 발생·조치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1∼6월 보호 조치를 받은 아동 수는 모두 5902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 중 부모 이혼에 따른 보호 아동이 2054명(42.4%), 부모의 빈곤이나 실직이 이유인 아동은 1587명(26.9%)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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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분기 경제적 이유로 이혼을 상담해 온 건수가 전년 대비 10% 정도 늘었어요. 문제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시차를 두고 더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작년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경기가 나빠졌다고 봤을 때, 경제적 이유로 갈등이 자리 잡기 시작해 곪아 터지면서 이혼이 급증할 가능성이 큽니다.”
박소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이혼 전문 상담역의 얘기다. 그는 “여러 이유로 이혼을 결정하겠지만, 경제 위기는 가정을 해체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1990년부터 지난해까지 경제 갈등과 생활 무능력 등 경제적 이유로 혼인상담을 해 온 건수는 전체 상담자 중 19.2%였는데 이 수치는 지난해 21%로 늘었고, 특히 지난해 4분기에는 29%였다”고 밝혔다.
‘서민경제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자살이 우려된다며 휴대전화 위치추적 요구가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3일 인천소방안전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한 달간 일선 소방서의 자살 관련 휴대전화 위치정보 조회가 93건으로 전년 같은 기간 45건에 비해 93.7%나 늘었다. 이는 12월 총 174건의 위치추적 조회 가운데 53.4%로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가족이나 지인의 자살을 염려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인일보 2월 4일자)
경제 불황으로 나락에 빠진 이들은 때론 가장 외로운 죽음을 택한다. 경제 위기와 자살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경제적 곤란은 개인 심리 불안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자살 동기로 꼽힌다. 형사정책연구원이 1997년부터 10년간 과천·동대문·목포 경찰서 세 곳에서 처리한 자살사건 1282건을 분석한 결과, 경제적 곤란이 자살 동기였던 비율은 22.7%였다(개인 심리 불안을 자살 동기로 판단한 비율은 24.3%).
경제적 곤란의 이유로는 사업이나 투자 실패가 27.9%로 가장 많았고, 다음은 부채(24.8%), 실직(12.9%), 장기적 빈곤(11.7%), 취업실패(8%) 순이었다. 이혼율과 마찬가지로 자살자도 1998년 외환위기 때 급증했다. ‘2008 경찰백서’에 따르면 1997년 자살자는 9109명이었다가 1998년 1만2458명으로 급증했다.
그해 자살자 중 직업이 없었던 비율은 절반에 달했다. 사업실패로 인한 자살은 1994~96년 200명대였던 것이 1998년 595명으로 증가했고, 이후 다소 감소하다가 2002년부터 다시 증가하고 있다. 장기적인 빈곤이 자살 동기인 경우도 사업실패와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 범죄 급증
사회·심리학자들은 ‘자살은 사회의 구조적 긴장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경제 위기일수록 저소득층, 노인, 만성질환자 등 사회적 취약계층은 자살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
박형민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사회학)은 “자살이 반드시 경제 위기 때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 10년간 추세로 볼 때 경제 위기가 자살을 유발하는 중요한 동인 중 하나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라며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예방하기 위해선 우리 삶 가운데 실패를 위한 교육이 필요하고, 실패하더라도 최소한의 삶이 보장될 수 있는 사회안전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글로벌 경제 위기 속에 무인경비업체나 경호업체의 매출이 오히려 증가하거나 큰 영향을 받지 않은 채 호황을 누려 눈길을 끌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장기간에 걸친 국내외 경기 한파와 관련해 경제가 어려울수록 범죄가 증가하면서 ‘안전’을 우선 생각하는 인식이 반영된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온라인 직거래장터 ‘옥션’ 등 온라인몰에서는 올 들어 호신용품 판매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5%가량 증가했다.’ (파이낸셜뉴스 2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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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잃을 게 없어진 사람들’은 잠재적 범죄자로 전락하기 쉽다. 이른바 범죄비용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범죄비용이란 ‘범죄가 발각될 확률’과 ‘수감돼 있는 동안 포기해야 할 소득’을 고려한 수치다.
경제 불황으로 부도와 실직, 실업이 증가하면, 범죄비용이 낮아져 범죄율이 증가한다는 게 범죄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1998년 한 해 동안 발생한 총 범죄는 171만 건이었다. 전년에 발생한 153만 건에 비해 11.4% 증가했다.
이 중 불황기 범죄로 분류할 수 있는 생계 침해형 범죄는 24%나 증가했다고 한다. 빈집을 털고, 쌀을 훔치고, 밤길에서 지갑을 빼앗는 범죄가 느는 것이다. 우리 경제가 본격적으로 침체국면으로 빠지기 시작한 지난해 3분기부터 이런 현상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9~11월 전국에서 발생한 절도·강도 사건은 6만2349건. 이전 3개월에 비해 6.3% 늘어났다. 올 초 경찰청이 ‘생계침해범죄 대책 추진단’을 발족한 배경이다.
강력범죄도 점차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황영철 한나라당 의원이 최근 경찰청으로부터 제출 받은 ‘최근 3년간 5대 범죄(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력) 발생 현황’에 따르면, 경제 위기와 현실 불만에 따른 우발적 범죄가 많이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6년 우발적 살인사건은 473건에서 지난해(1~11월) 583건으로 증가했다. 현실 불만을 이유로 발생한 살인 건수는 2006년 37건, 2007년 51건, 2008년 82건으로 증가 추세다. 우발적이거나 현실 불만에 따른 강도, 절도, 강간 사건도 모두 증가했다.
경마장·카지노·로또 ‘마지막 탈출구’
김지영 형사정책연구원 박사(심리학)는 “사회적 좌절로 인해 공격성이 분출되고, 감당할 수 없는 궁지에 몰리면 우발적 범죄와 생계형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며 “최근 심각한 경제난이 범죄 증가의 방아쇠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치안 강화와 정부의 강력한 사회안전망 대책이 절실한 시점이다.
‘2000년 6조7000억원이던 사행산업 규모는 2007년 14조5000억원으로 껑충 뛰었습니다. 로또와 카지노 등이 합법화될 때마다 사행산업 매출이 급팽창했습니다. 도박중독 상담자도 함께 급증해 불과 3년 사이에 4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성인 10명 중 한 명꼴인 360만여 명이 도박에 중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치료시스템은 전무한 상황입니다.’(MBC뉴스데스크 1월 26일자)
불황기엔 ‘한탕 심리’가 들끓는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소득감소, 실직 등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 심리적 허탈감, 회피 욕구 증가로 로또, 도박, 경마, 인터넷 게임 등 사행성 사업이 증가할 전망”이라고 밝혔다. 실제 그렇다. 2003년 이후 감소 추세이던 로또 판매량이 지난해 증가세로 돌아섰고, 특히 하반기부터 급증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로또 연간 판매량은 2조2680억원이다. 2003년 4조원에 육박한 후 2007년까지 매년 10% 정도씩 감소하던 추세가 반전된 것이다. 지난해 11월 로또 판매액은 전년 동기와 비교해 7% 증가했다. 올 들어 다섯 주 동안 판매된 로또복권은 회차당 평균 476억원어치 팔렸다(2006년 475억원, 2007년 435억원).
경마장도 북새통이다. 지난해 경마로 6조5000억여원의 매출을 올린 마사회는 올해 매출액을 7조4000억원으로 예상하고 있다. 전년 대비 13% 늘어난 수치다. 지난해 서울경마공원을 방문한 누적 입장객 수는 1945만 명이었다. 13년 만에 500만 관중을 돌파한 프로야구에 비해 4배 가까운 수치다. 지방도 마찬가지다.
부산경마공원은 지난해 10월 말 기준으로 매출 700억원을 돌파해 전년 총 매출 대비 23%나 늘었고, 하루 평균 입장객 수도 전년 대비 18% 증가했다. 제주경마공원도 입장객 수가 14% 늘었다. 카지노와 불법 도박도 ‘한탕의 유혹’을 부추긴다. 내국인 출입이 허용되는 강원랜드의 경우 지난해 총 입장객은 291만 명. 전년 대비 18.8% 증가했다.
강원랜드 관계자에 따르면 적정 수용 규모가 2500명 정도로 알려진 강원랜드에 요즘 하루 입장객이 1만 명을 넘는 날이 잦다고 한다. 북새통의 카지노장만큼 불법 오락장도 성황이다. 경찰에 따르면 2004년 1만 건을 갓 넘었던 불법 성인오락실 적발 건수는 지난해 11월 말 현재 3만3465건에 달했다. 인터넷 도박으로 적발된 건수는 2007년 2600여 건에서 지난해에는 6000여 건으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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