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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분별한 확장경영 ‘부실’의 단초

무분별한 확장경영 ‘부실’의 단초

지난해 10월 서울 명동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은행장 회의.

국제 신용평가사인 피치는 지난 12일 특별 보고서를 통해 “내년 말까지 국내 은행들이 42조원의 손실을 입을 수 있다”는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를 내놨다. 스트레스 테스트는 일정한 상황을 가정하고 그때 은행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외환위기 때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충격을 받는다고 가정했다는 것이 피치의 설명이다.

은행의 5대 원죄는?
■ 부동산 대출에 올인
■ 과도한 외형경쟁
■ 단기실적주의
■ 예대율 등 지표 관리 못해
■ 대외 홍보도 미흡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전망과는 다소 차이가 나지만 국내 은행권엔 엄청난 파장을 던졌다. 그 다음날 은행권을 대표하는 신동규 은행연합회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이런 분석 결과로 국내 은행들의 신인도를 훼손한 측면이 있다면 피치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며 “소송도 검토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내 대부분의 전문가도 피치의 가정이 과도하다고 지적한다. 금융연구원 신용상 연구위원은 최근 ‘피치사의 스트레스 테스트 관련 평가’라는 보고서를 통해 “피치가 가정한 손실률은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보인다”며 “이 가정이 맞아 42조원의 손실을 본다 해도 내년 말 국내 은행들의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은 8%를 웃돈다”고 밝혔다.

신 위원은 그러나 “기업부도가 늘어나는 것을 감안할 때 국내 은행들의 자본건전성이 충분한 수준은 아니다”며 “자본확충펀드 등 추가적인 자본 확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카드대란이 일어났던 2003년 국내 은행들이 낸 순이익은 6712억원에 불과했지만 2004년부터 은행권의 이익은 급증하기 시작했다.

2005년엔 9조원을 넘었고 2007년에는 10조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다. 이자 수입뿐 아니라 펀드 판매를 통한 비이자 부문의 이익도 늘었다. 하지만 지난해엔 순이익이 6조원대 초반으로 줄었다. 전체로는 이익을 냈지만 지난해 4분기만을 놓고 보면 적자를 낸 은행들이 있다. 경기침체가 본격화하는 올해엔 수익성이 더 악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외환위기 이후 잘나갔던 우리 은행들이 이렇게 의심을 받고 어려워진 이유는 과연 무얼까. 2004년 말 국내 시중은행과 지방은행의 총여신 규모는 512조원이었다. 하지만 4년이 지난 2008년 말엔 855조원으로 불어났다. 단 3년 동안 대출금이 340조원이 넘게 늘어난 것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시기는 유례없는 부동산 호황기였다.

아파트 가격이 크게 뛰어 정부는 부동산 대책을 수시로 내놔야 했다. 이 시기 국내 은행들은 부동산 관련 대출을 늘리기 시작했다. 외환위기 때는 대기업들에 돈을 빌려줬다 은행들이 망하거나 합병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이를 교훈 삼아 은행들은 기업 대출보다는 부동산을 담보로 한 대출에 주력했다. 담보가 확실한 만큼 은행이 손해를 보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부동산 과잉 대출 ‘부메랑’

수익원 다변화 차원에서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에도 나섰다. 이는 아파트 분양 수익을 담보로 돈을 대출해주는 것이다. 아파트 분양이 한창 잘됐기 때문에 은행으로선 짭짤한 수익을 내는 사업이었다. 한 지방은행의 임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은행이 연고인 지역인데도 유명 건설사가 하는 큰 사업장에 대출을 못했다.

서울의 대형 은행들이 싼 금리에 좋은 조건을 내세워 우리는 명함도 못 내밀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정말 다행스럽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 부동산에 과잉 대출한 것이 지금은 부담이 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국내 은행들의 PF 대출 규모는 52조5000억원으로 전년 말(41조8000억원)보다 10조7000억원 증가했다.

부동산 경기의 침체로 연체율이 2007년 말 0.48%에서 지난해 말 1.07%로 껑충 뛰었다. 신영증권 이병건 애널리스트는 “은행권의 부동산 대출을 건별로 보면 담보가 충분하지만 부동산 경기가 나빠지면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총량 차원의 리스크 관리를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외환위기의 경험을 살려 나무는 봤지만 숲을 보는 위험 관리가 불충분했다는 의미다.

NH투자증권의 김은갑 애널리스트도 “카드대란 때처럼 돈이 된다고 생각하면 과도하게 쏠림 현상을 보이는 것이 우리 은행들의 문제”라고 말했다. 최근엔 경기침체에 따라 중소기업 대출의 연체율이 늘고 있다. 2월 말 기준 중기대출의 연체율은 2.67%로 지난해 2월 말(0.76%)보다 1.27%포인트 상승했다. 대기업 대출도 안심할 수 없다.

최근 1~2년 새 급증한 M&A 관련 대기업 대출이 경기침체 여부에 따라 은행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하는 주택담보대출도 수도권의 집값 하락세가 지속되고, 직장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면 연체가 크게 늘 수 있다. 대출뿐 아니다. 영업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선 출혈 경쟁도 불사했다.

우리은행은 지난해 7월 인천공항에 지점을 냈다 최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계약기간이 남았지만 수익성이 없어 문을 닫기로 한 것이다. 한국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공항에 은행의 지점이 있다는 상징성 때문에 수백억원의 보증금을 내고 입점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우리은행이 실패한 그곳에 다음달부터는 하나은행이 들어간다.



단기 실적주의가 발목 잡아


은행들은 또 서울 명문대에 지점을 내기 위해 100억원의 학교발전기금을 내는가 하면 각종 건물을 지어 대학에 기부하기도 했다. 확장 경영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면 괜찮았다.

증시의 호황으로 은행 예금이 줄고 있었지만 은행은 양도성예금증서(CD)와 은행채를 발행해 대출 자금을 조달했다. 2006년 말 95조원이었던 은행채 발행 잔액은 지난해 11월 말 현재 137조원으로 불어났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은행의 총 수신액 가운데 CD와 은행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1년 고작 5.7%였지만 지난해 11월엔 30%로 크게 늘었다. 들어오는 돈보다 과다하게 대출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금 잔액 대비 대출액이 얼마나 되는지를 나타내는 예대율을 보면 금방 드러난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은행의 예대율은 118.8%다. 예금으로 받은 돈이 100이라면 대출로 나간 액수가 118.8이라는 것이다.

일부 외신은 높은 예대율을 근거로 한국 은행들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더 나간 대출은 결국 다른 곳에서 빌려온 빚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금융위원회와 국내 은행들의 설명은 다르다. 118.8%라는 것은 순수한 예금만을 기준으로 한 것이며 사실상 은행 창구에서 예금처럼 판매되는 CD를 예금에 포함하면 지난해 말 예대율은 101.6%로 낮아진다는 것이다.

또예대율이 낮다는 것은 유치한 예금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도 예대율이 100을 넘는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은행들의 외화 차입도 마찬가지다. 외화를 빌려와 무역금융 재원으로 쓰기보단 중소기업의 운전자금이나 병원 등 자영업자들에게 대출해줬다.

그러다 지난해 9월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사태 이후 국제금융시장이 급속히 경색되자 만기가 돌아오는 돈을 갚는 데 허덕거렸다. 한은이 달러를 직접 공급하고 미국과의 통화 스와프를 체결해 이 돈을 공급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2007년 말 2622억 달러에 달했던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이 1년 만에 2012억 달러로 줄어든 것도 은행들이 외채를 대거 상환했기 때문이다. 현재 한은은 원화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 맡기고 160억 달러를 교환해 와 국내 은행에 빌려주고 있다.

한도인 300억 달러 중 절반을 써 미국 측에 한도를 1000억 달러로 늘려줄 것을 요청한 상태다. 은행들은 왜 이런 확장 경영을 했을까? 여기엔 단기실적 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정부가 대주주인 우리은행과 일부 외국계 은행을 제외한 국내 은행들은 대부분 주인이 명확하지 않다.

이렇다 보니 사외이사의 입김이 강하고, 이들이 은행장을 결정하는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 사외이사들이 은행장을 평가하는 기준 중 하나가 바로 외형이다. 한 금융지주사의 고위 임원은 이런 말을 했다. “은행장이 취임하고 2년째가 되면 시장 점유율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수익성이 높고 리스크 관리를 잘해도 시장 점유율이 떨어지면 인정을 받지 못한다.”

한국 기업들이 갖고 있는 뿌리 깊은 외형주의가 깔려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럴 때 한 은행이 공격적으로 자산을 늘리면 최소한 시장 점유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방어적인 경쟁이 불가피하다”고 덧붙였다. 은행장이 실적에 압박을 받는다면 임원들은 말할 것도 없다. 말이 좋아 임원이지 1년 단위로 평가해 실적이 나쁘면 옷을 벗어야 한다.

한 시중은행의 간부급 직원은 “경쟁 은행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는 기사가 나오자 위에 불려가 호된 추궁을 당했다”며 “경쟁 은행의 사업은 실패해 결과적으로 우리가 안 한 게 득이었지만 당시엔 무척 괴로웠다”고 회고했다. 은행연합회도 과도한 실적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임원들의 임기를 1년에서 2~3년으로 늘리는 방안을 은행들에 권장하고 있다.

정부의 감독에도 문제가 있었다. 위기 상황에서 외국 언론이나 투자자들에게 부정적으로 비칠 수 있는 예대율 같은 지표를 사전에 관리하지 못한 것이다.



장부 기록 없는 외화자금 철저히 모니터링해야

동국대 경영학과 강경훈 교수는 “금리가 높은 증권사 종합자산관리계좌(CMA)로 예금이 빠져나갔지만 정부는 은행들에 중소기업 대출의 만기 연장을 요구했다”며 “이렇게 되면 예대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중기 대출을 늘리는 정책은 이해가 가지만 금융 시스템 전반의 체계적인 관리에 아쉬운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또 은행들의 외화자금 조달을 건전하게 하고 있는지 유동성 관리를 더 철저히 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강 교수는 “미국이나 영국의 금융회사에 문제가 된 것은 장부에 나타나지 않는 파생금융상품으로 거래를 해 위험과 부실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며 “국내 금융사도 장부에 나타나지 않는 방법으로 외화자금을 거래하고 조달했는지 철저히 모니터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외신이나 해외 투자자에게 우리 상황을 제대로 이해시키는 데도 한계를 보였다. 외국계 은행의 한 관계자는 “외신에 나쁜 보도가 나간 뒤에 설명회를 하면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처럼 오해를 산다”며 “사전에 충분히 우리의 상황을 잘 설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영국 이코노미스트 등의 부정적인 보도가 이어진 것도 외국 언론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진단이다.

이달 초 홍콩과 싱가포르의 투자자와 접촉했던 신환종 우리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해외 투자자들이 몇몇 대형 투자은행이 내는 정보에만 의존하고 있었다”며 “정부뿐 아니라 국내 금융사도 해외 투자자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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