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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세나 베푸는 기업이 수혜자”

“메세나 베푸는 기업이 수혜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화예술계 관련자들에게조차 ‘메세나’ 는 낯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황임에도 메세나 활동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이 줄고 있지 않다. 실로 놀라운 변화다. 그 중심에 2005년에 메세나협의회 회장을 맡아 헌신해 온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이 있다. 예술경영 전문가 강은경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박 회장을 만났다.

이건산업이 매년 해외의 연주단체를 초청해 개최하는 이건음악회가 올해로 20회를 맞는다. 이건음악회는 “작은 합판공장에서 무슨 클래식이냐”는 시큰둥한 반응 속에서 첫 선율을 선보였다.

초청돼 공연한 연주단체가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으면서 점차 관심을 끌게 됐다. 이건음악회에 초청된 연주단체를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 생겼고 매니어층까지 형성됐다.

이건음악회로 기업 메세나 활동의 전범을 보여온 박영주(68) 이건산업 회장은 “한 가지 분야를 선택해 20년, 30년 집중적으로 하다 보면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분야 선택과 관련해 “회사의 색깔이 담겨 있고 직원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작은 규모의 ‘틈새 시장’을 택하면 어떨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박 회장은 “현재 대기업 위주인 메세나 활동이 중소기업에 확산돼 작은 예술단체가 후원을 받는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메세나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담은 서울 양평동의 이건산업 회장실에서 이뤄졌다.

강은경(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최근엔 많은 기업이 적극적으로 메세나 활동에 나서는 것 같습니다. 회장님께서 한국메세나협의회를 이끌어 오시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일종의 시혜적 활동으로 인식되어 오던 메세나 활동을 문화마케팅 개념과 연결 지어 ‘상생(相生)’이라는 신선하고 파격적인 개념으로 기업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내신 결과가 아닐는지요.

박영주(메세나협의회 회장) 메세나는 기업이 직원이나 소비자에게 혜택을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행하는 기업 자신이 메세나의 수혜자라는 점을 최근에는 많은 기업이 깨닫는 것 같습니다. 임직원의 애사심이 높아지고 기업문화가 풍요로워지는 등 혜택은 무궁무진하지요. 기업이 물건이 아니라 문화를 파는 시대가 아닙니까.

저만 해도 전쟁 중 부산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헤드라이트를 조명 삼아 마리아 앤더슨이 펼친 공연의 강렬한 감동이 여전히 기억에 남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메세나 활동에 밑거름이 됐습니다. 기업은 예술 덕에 한계를 뛰어넘는 모멘텀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어찌 보면 예술가도 기업을 도울 수 있어야 하지요.



메세나는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

강은경 그런데 기업인들이 예술체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경영에 적용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와 닿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예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박영주 예술적 체험을 통해 직원들이 감동을 느끼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직원들의 생활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은 결국 예술가가 일종의 사외이사 역할을 해 주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혀 관계 없는 분야의 전문가를 초청해 강의를 듣는 것도 직장이라는 장소가 주는 매너리즘을 방지하고 다양한 기초역량을 육성한다는 목적에서 같은 맥락이지요. 이건음악회의 예를 들어 볼까요. 이 행사를 운영해 오면서 우리 회사가 얼마나 변화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메세나는 기업이 직원이나 소비자에게 혜택을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행하는 기업 자신이 메세나의 수혜자라는 점을 최근에는 많은 기업이 깨닫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업이 물건이 아니라 문화를 파는 시대가 아닙니까.”

작년에 내한한 영국 연주단체 스미스 4중주단의 현대 레퍼토리는 청중의 대부분이 음악전문가가 아닌 임직원 가족이라 지루하고 난해하게 느낄까 봐 걱정했는데 기우였어요. 앙코르 곡까지 한 명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열광적으로 즐기더군요. 강은경 저도 이건음악회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올해로 20회째를 맞는 이건음악회는 회장님께서 해 오신 대표적인 메세나 활동으로 알려져 있지요. 메세나 활동이 기업에도 성과를 내려면 다소 대중적인 성격의 공연이 안전했을 텐데 이건음악회는 처음부터 연주자와 프로그램 선정에서 실험적인 면모가 다분했습니다. 음악회를 어떻게 처음 시작하시고 또한 지속해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박영주 초기에는 내부 반대가 심했지요. 딱 10년만 해 보자고 임직원들을 설득했습니다. 10년간 꾸준히 하면 뭔가 남는 게 있을 거라고요. 20년 전 첫 음악회를 준비하던 생각이 납니다. 체코의 아카데미아 목관5중주단이 이건음악회의 첫 초청연주단체였죠. 조그마한 합판공장 강당이 공연장이었는데 아는 사람은 모두 다 말렸어요.

간부들은 “공장 친구들이 무슨 클래식을 듣겠느냐”고 했지요. 다들 행복해 했다는 점에서 결과는 대성공이었어요. 강은경 “실력 있는 외국 공연단체를 초청해 협력업체와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 프로그램으로 운영한다”는 이건음악회의 확실한 컨셉트는 앞으로 기업들이 메세나 분야를 선정할 때 참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박영주 요즘엔 다양한 예술 장르가 생겼으니 메세나 활동을 시작하는 기업이라면 아직까지 시도되지 않은 작은 규모의 ‘틈새 시장’을 찾아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최근 메세나 활동을 통해 시각장애인에게 미술교육을 하는 것을 봤어요. 메세나 활동이 다양해지고 있다는 데 감명을 받았습니다.

메세나 활동이 뻔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박물관 식으로 해서 그렇습니다. 한 가지 분야를 선택해 20년, 30년 일정 기간 그것만 집중적으로 하다 보면 큰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강은경 많은 경영자나 관리자가 메세나 활동을 시작할 때 분야를 선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토로합니다.

이건산업과 회장님께서는 이 부분에서 특히 타의 모범이 돼 오셨는데요. 박영주 메세나 분야를 정할 때 경영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고집하면 안 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 회사의 색깔이 담겨야 하는 거예요. 많은 직원이 공유하는 관심이나 분야를 다루는 것이 좋습니다. 이건산업이 연고 없는 인천에서 생산활동을 하면서 1년에 하나씩 시비(詩碑)를 세우는 것부터 사회공헌활동을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놀이터를 세워 볼까도 했었지요. 그러다가 우리의 주요 구성원들이 모두 음악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게다가 인천은 서울보다 좋은 음악회가 들어올 확률이 적으니까 음악회가 적합하다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박영주 누구인가?
박영주 회장은 어릴 때 피아노·가야금·서양화를 배웠다. 음악 애호가이자 판화 컬렉터로 유명하다. 박 회장은 예술의전당 후원회 부회장과 런던 테이트갤러리 국제이사로도 활동한다. 합판 원료를 확보하기 위해 남태평양의 솔로몬에 숲을 가꾸면서 현지에서 의료·교육사업도 펼쳤다.

그 인연으로 1993년 이래 솔로몬 명예영사를 맡고 있다. 2005년에 ‘몽블랑 예술후원자상’을 받았다. 박 회장이 1978년에 창업한 이건산업은 지난해 매출 2009억원, 1988년에 설립한 이건창호는 1933억원을 기록했다. 이건창호는 이전까지 바람막이 정도로만 여겨지던 창에 과학기술과 예술을 접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 회장의 요즘 관심사는 ‘그린 창호’다. 창문에 태양광전지를 깔아 에너지를 만드는 시스템이다. 박 회장은 “태양광전지 일체형이면서도 투명해 밖이 보이도록 하는 기술에서 우리가 앞서 있다”고 말했다. 한옥에 어울리는 창호를 개발하는 일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풀뿌리 메세나’ 위해 특별법 필요

강은경 기업경영자의 개인적 선호와 그 기업의 문화적 가치를 분리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문화예술 현장 실무자로 있다 보니 이 부분이 생각보다 큰 애로로 작용하기도 하더군요. 전사적(全社的)인 가치 공유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메세나를 시작한다는 것은 무모한 측면도 있고요.

기업도 살고 예술도 살린다는 상생의 이념에 적합하도록 해야 비로소 성공적인 메세나 사례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기억에 남는 메세나 사례가 있습니까? 박영주 얼마 전 일본 최대의 출판·교육 그룹인 베네세의 후쿠다케 소이치로 회장을 만났는데, 2대에 걸쳐 18년째 추진 중인 ‘나오시마 프로젝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단한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나오시마 섬 전체를 미술관으로 만드는 이 프로젝트는 메세나 역할 모델로서 향후 일본 전체에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강은경 최근 어려워진 경제상황에서 문화예술 지원이 위축되면서 예술경영계에서는 대공황이나 외환위기 때의 사례를 되짚어 보기도 합니다. 메세나 리더를 맡으신 입장에서 불황에도 메세나를 지속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보십니까?
박영주 최근 현대·기아자동차 해비치재단의 소외계층 아동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협약식에 참석했는데, 큰 예산을 들여 뭘 하겠다는데 의지가 대단해 고마웠습니다. 경기가 어려워질 때 이렇게 할 수 있어야 해요. 규모가 작더라도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시작해야지요.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재미있게 메세나 활동을 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은경 회장님께서는 1970년대 말에 창업한 이래 산업 사이클과 경기변동 등 큰 파도를 여러 차례 넘으셨으리라고 봅니다. 어려움은 없으셨는지요?
박영주 물론 어려움이 많았죠. 1960년대 국가를 이끄는 산업군 중 하나로서 각광받던 합판사업이었습니다. 수출 100대 기업 중 상위 10위 안에 합판 회사들이 주를 이뤘지만, 해당 분야는 그 이후로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최전성기에 들어가 계속 어려워지는 환경에서 일해야 했는데 감사하게도 살아남았어요. 가장 발전할 수 있는 때는 가장 어려운 때라는 걸 배웠죠. 어려움이 많은 때일수록 성장 잠재력이 준비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강은경 국내 예술영재들을 발굴하시는 일에도 관심이 있으신지요?
박영주 왜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손에 꽉 차 있는 상태이니 당장은 어렵지만 기회가 닿으면 꼭 해 보고 싶습니다.



강은경 최근 한국메세나협의회는 한 세미나를 통해 메세나특별법 제정을 주창했습니다. 불황으로 힘든 시기에 기업의 예술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법제도 지원은 기업, 문화계, 일반국민 등 모두의 사기를 진작하는 계기가 될 상당히 실천적 제안인 것 같은데요. 주창의 구체적 배경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박영주 작은 예술단체들이 후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취지입니다. 현재 메세나협의회에 중소기업 매칭펀드 제도를 두고 적극적으로 중소기업과 예술의 만남을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전체적으로 메세나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실현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에요.

한마디로 ‘풀뿌리 메세나’를 제안하고자 한 것입니다. 중소기업도 자발적으로 메세나에 참여하도록 세금을 감면하는 등 제도를 시행하자는 겁니다. 중소기업도 손쉽게 메세나 활동을 펼치면 작은 단체에까지 실질적인 이득이 돌아가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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