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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의 끝없는 상상력

한식의 끝없는 상상력

미국 캘리포니아주 나파 밸리에 있는 프랑스 레스토랑 ‘프렌치 런드리’의 주방장 코리 리(32)는 네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코리안 아메리칸’이다. (토머스 켈러라는 선구적 셰프가 이끄는 프렌치 런드리는 레스토랑 평가서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세 개를 받은 세계적인 레스토랑이다.

요즘도 식사 예약을 하려면 두 달을 기다려야 한다.) 그가 사는 캘리포니아 북부는 참나무가 많아 도토리가 흔하다. 그 도토리를 볼 때마다 코리 리는 새삼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미국을 방문하신 외할머니가 손수 만들어 식탁에 올린 도토리묵의 정겨운 맛 말이다.

“할머니는 동네 공원에서 도토리를 주워와 묵을 만드셨어요. 집 안팎에 도토리를 널어 말리고 빻고 씻어내는 과정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더군요. 그게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나중에 요리사가 됐을 때 그는 할머니의 손맛을 요리에 재현해 냈다.

재료의 조합은 자연의 법칙을 따르려고 애썼다. 자연에서 서로 어울리는 식재료를 한 요리에 쓰면 조화로운 맛을 내기 때문이다. “일례로 검은 트러플(송로버섯)은 참나무에서 기생하는 버섯입니다. 그래서 도토리묵을 트러플 즙에 담근 다음 ‘광부의 상추’로 불리는 야채를 곁들였어요. 이 상추 또한 참나무 주위에 나는 식물입니다.”

스페인의 고급 수제 이베리코 햄과 도토리묵을 접목하기도 했다. 이베리코 햄은 떡갈나무 아래서 도토리를 먹고 자란 흑돼지로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프렌치 런드리를 방문한 손님 중 대다수는 도토리를 먹어본 적이 없다. “도토리의 풍미가 부드럽기 때문에 주재료보다는 요리의 체계를 세우는 보조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도토리를 처음 먹어본 손님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듯합니다.”

코리 리는 최근 세계의 파인 다이닝(수준급 셰프가 최고급 식자재로 최고의 품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레스토랑과 그들의 요리를 지칭) 업계에서 한국 고유의 식재료를 응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발효 흑마늘이 대표적이다. “스페인의 ‘엘 불리(El Buli)’나 뉴욕의 ‘대니얼(Daniel)’ 같은 고급 레스토랑들이 흑마늘을 사용합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실험이 활발하다. 해외 스타 셰프들과 경쟁해야 하는 국내 셰프들에게 한국적인 전통은 그들과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색깔’이기 때문이다. 스테이크 레스토랑 ‘테이스티 블루바드’(www.tastyblvd.com)는 주요리보다 셰프의 기발한 발상이 담긴 전채요리로 더 유명세를 탄다.

순수 국내파로 올해 요리 경력 14년째를 맞은 최현석 셰프는 2년 전 ‘테이스티 블루바드’를 열면서 매달 메뉴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그 후 지금까지 개발한 메뉴가 600가지를 훌쩍 넘어섰다. “이탈리아 요리를 기본으로 일식 퓨전, 모던 프렌치 등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꾸준히 변화를 시도해 왔다”고 최 셰프가 말했다.

“그 때문에 평론가들마저 테이스티 블루바드가 어떤 레스토랑인지 헷갈려 할 정도예요.” 최 셰프는 올 들어 특히 한식에 푹 빠져 있다. 서양요리와 한식을 접목하려는 시도를 계속한다. “저희 레스토랑에 오신 손님들에게 저희가 만든 두부김치를 내놓으면 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외양과 달리 서양요리의 맛이라는 걸 알면 또 한 번 놀라게 되지요. 엔다이브(치커리의 일종)를 라즈베리와 토마토에 절여 김치 모양을 내고 모차렐라 치즈를 두부처럼 잘라 낸 요리거든요.” 파 에스푸마(거품)를 곁들인 삼계 수프나 전복 차우더 수프는 반대로 우리 전통 음식인 삼계탕과 전복죽을 서양식으로 풀어낸 요리다.

“동양인은 서양요리를 아무리 잘해도 2인자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파인 제게는 한식이 가장 호소력이 큰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최 셰프는 최근 테이스티 블루바드를 떠나 ‘오너’ 셰프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한편 ‘뉴 코리안’을 내세운 정식당의 임정식 오너 셰프는 업계가 주목하는 신인으로 꼽힌다.

미국 CIA(Culinary Institute of America)를 졸업한 뒤 미국과 스페인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올 초 자신의 이름을 딴 정식당을 열면서 점심과 저녁 한 가지씩 두 개의 코스 요리만 선보이고 있다(점심은 4만원이 넘고 저녁은 10만원이 넘는다).

그러나 메뉴는 매월 바뀐다. 임 셰프는 아뮤즈 부시부터 샐러드, 주요리, 디저트까지 서양 코스 요리의 형식을 지키면서 알맹이는 한식으로 채웠다. 신사동 미역 빠에야나 인삼 발, 명이나물에 싸먹는 돼지보쌈, 당귀 아이스크림 등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요리들이 임 셰프의 손에서 나왔다.

메뉴 구상은 주로 ‘패밀리 밀’(레스토랑 직원들이 근무 중 먹는 식사)을 직접 요리하면서 한다. “신사동 미역 빠에야의 경우 올 1월에 생일을 맞은 직원을 위해 미역국을 끓이다 착안했어요. 한우를 쓸 때 맛은 좋은데 미관상 문제로 내다버리는 부위가 많거든요. 그 부위를 재활용하려고 시험 삼아 만든 요리가 의외로 반응이 좋아 주요리가 됐어요.”

그는 항상 “어디에도 없는” 요리를 추구한다. 하지만 자신의 요리가 퓨전 한식이나 서양식 한식으로 불리는 게 못마땅한 눈치다. 그저 ‘새로운 한식’(New Korean)으로 평가되길 바란다. 임 셰프는 올 연말엔 뉴욕에 정식당 2호점을 낼 계획이다. 이미 투자는 받아놓고 법적 문제를 조율 중이다.

이와 별도로 가격이 저렴한 캐주얼 레스토랑도 구상한다. 임 셰프는 “파인 다이닝은 한식의 이미지를 높일 훌륭한 통로”라고 말했다. “워낙 재료 단가나 레스토랑 유지 비용이 높아 수익성이 좋지는 않지만 한식의 풍부한 미감과 영양성을 알리는 가장 뛰어난 수단”이라고 말했다.

한국 최초의 양식당으로 알려진 호텔 웨스틴 조선의 프랑스 레스토랑 ‘나인스 게이트 그릴’(twc.echosunhotel.com)도 지난 2월 메뉴를 대폭 바꾸면서 ‘한국적 양식당’으로 변신했다. 85년 역사를 가진 이 레스토랑은 “역사나 전통 외에 새로운 브랜드 정체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2005년 조리사로는 최초로 신세계 그룹 임원이 된 이민 상무가 총괄 셰프를 맡았다(이 상무는 조선호텔의 모든 레스토랑 업장과 그래머시 키친, 페이야드 등 신세계 그룹의 외식 사업부도 책임지고 있다). 그는 나인스 게이트의 새 메뉴를 “한국 고유의 제철 식재료를 창의적으로 접목한 프렌치”라고 소개했다.

특히 양갈비에다 백김치를 곁들인 요리가 외국인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처음에는 김치를 곁들일까 하다가 레스토랑 고객 중 25%를 차지하는 외국인 손님의 기호를 반영해 백김치를 선택했어요. 3~4일 숙성한 배추에 코냑을 첨가했더니 김치보다 훨씬 양식과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주요리에 곁들이는 야채도 한국적이다. 고구마순, 머윗대, 두릅, 부추 같은 야채에 들깨와 된장으로 간을 한다. “일본 된장인 미소는 서양요리에 많이 쓰이는데 우리 된장이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요.” 생선도 농어, 민어, 서대 등 우리의 제철 생선을 쓴다. 이 상무가 요즘 각별히 관심을 쏟는 부분은 전국에 널려 있는 재래시장이다.

“한국적 식재료를 찾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워요. 그래서 장날마다 지역 재래시장을 돌며 새 아이디어를 찾아 나설 생각입니다.” 실제로 홍도미 요리에 육수를 붓는 아이디어도 장터국수에서 힌트를 얻었다. 요즘 들어 부쩍 관심이 커진 ‘한식의 세계화’가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더 많은 주방 지휘자의 창의적 노력이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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