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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들 잡는 엄마, 문제 푸는 엄마

핸들 잡는 엄마, 문제 푸는 엄마

오후 10시. 주부는 핸들을 잡는다. 학원 수업을 마친 아이를 태우기 위해서다. 주부는 엄마용 문제집도 따로 산다. 아이와 함께 공부하기 위해서다. 아이를 기다리는 게 지루하지도, 함께 공부하는 게 지겹지도 않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말이다.
▎학원이 끝나는 오후 10시, 대치동 학원가는 돌연 번잡해진다.

▎학원이 끝나는 오후 10시, 대치동 학원가는 돌연 번잡해진다.

완연한 가을에 접어들었는지 선선한 바람이 부는 9월 15일 저녁, 대치동으로 향하는 360번 시내버스는 테헤란로를 신나게 달리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 테헤란로의 빌딩은 화려한 불빛을 뿜어낸다. 두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저 대형 빌딩이 내뿜는 열정적 불빛이 대치동 학원가에서 사교육에 몰두하는 학생과 학부모의 열정을 따라갈 수 있을까?’

‘그런 학원가의 열정은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버스는 포스코 사거리에 멈춰 섰다. 하차 후 남쪽 방향 언덕길로 올라갔다. 이대로 쭉 가면 대치사거리를 지나 대치동 학원가 중심부인 ‘은마아파트 사거리’가 나올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원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핵심지역인 은마아파트 사거리까지는 아직 거리가 남았지만 사실상 이곳부터 ‘대치동 학원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주치는 다양한 사설 학원들. 속셈·보습학원 등 초등학생을 위한 학원부터 대학 입시를 위한 어학원, 수학학원, 예체능학원에 이르기까지…. 학원가에 세워진 건물들은 대부분 5~6층짜리 중소형이다.

강남 지역의 건물치곤 작은 규모에 속한다. 혹자는 다양한 학원이 입점하기 좋은 중소형 건물이 이처럼 많기 때문에 대치동이 사교육의 메카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대치동 거리는 술집 등 청소년 유해 업소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노래방조차 찾기 힘들다. 강남 개발 초기, 대치동이 변두리 지역으로 분류돼 유흥가가 발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대치동을 사교육 메카로 부상시킨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은마아파트 사거리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학원가. 동쪽 우성아파트 2단지부터 서쪽 베스티안 병원에 이르기까지 약 2㎞ 정도가 중심 거리. 최근엔 대치역 주변도 제2의 학원가로 각광 받는다고 한다.



대치동 학원가 카페 천태만상강남 메가스터디 학원이 자리를 잡으면서 주변에 다양한 학원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현재 영업 중인 대치동의 사설학원은 600개 정도로 추산된다. 지역 자체가 이른바 ‘학원 백화점’인 셈이다. 학원가 1층 상가에는 커피전문 카페들이 자주 눈에 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승용차로 아이들을 학원에 데려다 준 엄마들이 학원 수업이 끝날 때까지 이곳 카페에 모여 사교육 관련 정보를 나눈다고 한다.

일종의 사교육 정보 교류의 장이라는 이야기인데, 과연 그럴까? 오후 8시20분, 은마아파트 사거리 동쪽에 위치한 스타벅스 카페. 손님이 그리 많지 않다. 책을 읽으며 카페라테를 마시고 있는 여대생, 심각하게 비즈니스 얘기를 나누고 있는 직장인 2명 그리고 학부모로 보이는 40대 주부 3명이 전부다. 역시 아줌마 목소리가 크다. 옆자리까지 사교육 관련 이야기가 들린다.

“어머 정말이야? 그 집 아들이야말로 엄친아네. 미국 코넬 대학교에 들어갔다고?”

“그렇다네요. T학원에서 개최한 유학설명회에서 들었는데, 그 집 아이 예를 들며 설명하더라고요.”

“좋겠네. 우리 아이도 SAT 준비 중인데….”

미 아이비리그 진학을 목표로 대치동 학원을 다니는 아이의 엄마인 듯했다. 이후 이 주부들의 얘기는 미국 학생의 공부 습관, 학원수업 진도에 대한 불만, 아이들의 건강걱정 등으로 쉼 없이 이어졌다. 대치동 학부모의 화제가 무엇인지 짐작하게 하는 대화였다.

대치동에서 학부모들이 가장 많이 모인다는 파스쿠치 분위기도 비슷했다.

이 카페는 학부모 모임 장소로도 입소문이 난 곳이다. 이전 들렀던 스타벅스에 비해 규모가 크고 손님이 많다. 이 중엔 직장인, 대학생도 있지만 상당수가 학부모다. 낯선 풍경도 목격됐다. 주부와 자녀가 함께 문제를 풀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 학생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중간고사 기간인가요? 무슨 문제집을 그리 열심히 풀어요?”

“학원에서 시험이 있어서요.”

“아까 옆에서 함께 문제 풀던 분은 어머니 아닌가요? 근데 어머니가 왜 문제집을 보고 있나요?”

“엄마도 영어 잘하시거든요. 그래서 시험공부 도와주시느라고 함께 문제 풀고 있었어요. 미리 풀어보시라고 학원서 엄마 것도 따로 구입했어요.”

학원 시험을 치르기 위해 어머니와 자녀가 함께 공부하는 것도 모자라 어머니용 문제집까지 따로 구입하는 세상, 대치동의 현주소다.



“어머니용 문제집도 따로 있어요”카페에 머무르는 주부들은 대개 오후 9시50분이면 자리를 뜬다. 10시면 학원이 끝나기 때문에 아이를 빨리 태우려면 일찌감치 자리를 떠야 한다. 대치동 학원가는 실제로 오후 10시만 되면 교통체증에 시달린다. 아이를 태우기 위해 주부들이 몰고 나온 자동차 때문이다. 도로 불법 점거는 기본이고, 인도를 불법 침범하는 얌체차량도 적지 않다.

도로 끝 차선은 학부모의 자동차와 그것에 올라타는 학생들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한다. 한쪽에선 고성이 터져 나온다. 버스가 정차해야 할 공간을 학부모 자동차가 침범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버스 기사와 주부가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는 일도 종종 목격된다고 한다. 여기에 학원 버스에 오르는 학생, 끼리끼리 모여 택시를 잡는 학생들이 뒤엉킨다.

불과 1~2분 사이에 급작스럽게 연출된 복잡한 상황. 마치 영화가 끝나고 한꺼번에 관람객이 밖으로 쏟아져 나와 혼란을 빚는 오래된 극장 모습 같다. 어쩌면 이것이 사교육 1번지로 떠오르는 대치동의 현주소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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