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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서 안창호 연설 듣고 민족교육 사업 투신

평양서 안창호 연설 듣고 민족교육 사업 투신

남강 이승훈은 오산학교 교주이자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44세까지 민족운동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유기점 사환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보부상을 거쳐 무역상으로 큰돈을 벌었다. 장사치로 팔도를 떠돌던 그는 어떻게 민족 지도자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이승훈은 1864년 평안도 정주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어머니를 잃고, 무식하지만 성격이 굳고 어진 할머니의 동냥젖으로 모진 목숨을 연명했다.

10세 때 할머니가 사망하고, 두 달 뒤 무능한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이승훈은 천애의 고아가 되었다. 다섯 살 터울의 형이 있었지만 그때 형의 나이는 고작 15세였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남의 집 허드렛일이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훈은 아버지로부터 세 가지 유산을 상속받았다. 첫째가 ‘업신여김’이었고, 둘째가 ‘가난’이었으며, 셋째가 ‘무식’이었다. 순전히 먹고살아야 한다는 일념에서 이승훈은 한창 뛰놀고 공부할 나이인 11세에 평안도 납청에서 큰 유기(鍮器) 상점을 하는 임일권의 집 잔심부름꾼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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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으로 유기점 기틀 마련그는 새벽부터 한밤까지 방 쓸기, 부엌에 불 때기, 사랑방 재떨이 비우기, 가래침 요강 부시기, 술심부름 다니기 같은 허드렛일을 했다. 어린 나이에 꾀를 부릴 만도 했건만 이승훈은 혹여 자기 일을 남이 할까 봐 부지런을 떨었다.

그 결과 4년 만에 경리장부와 서류철을 정리하는 경리로 승격되었다. 15세에 장가를 든 이승훈은 남의 집살이를 청산하고 임일권에게 외상으로 놋숟가락 한 짐을 얻어 지게에 싣고 보부상 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년간 이승훈은 지게에 무거운 놋그릇을 가득 싣고, 발바닥이 터지고 갈라지도록 걷고 또 걸었다. 장맛비에 옷이 젖어 사타구니가 쓸리고, 폭설에 허벅지까지 눈이 차오를 때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줌발도 얼어붙는 평안도 추위를 이기려고 때로는 비상(砒霜) 조각을 조금씩 떼어 물고 걷기도 했다.

그렇듯 앞만 보고 걸은 덕분에 이승훈은 보부상 생활 10년 만에 자신의 유기 상점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1894년 31세 되던 해에 이승훈에게 근면과 성실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뜻밖의 시련이 찾아왔다. 삶의 터전이던 납청이 청일전쟁의 격전장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승훈은 피땀 흘려 일군 전 재산을 남겨둔 채 가족을 이끌고 덕천 산골로 들어갔다. 옥수수죽과 감자밥으로 가까스로 연명하며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1895년 전쟁이 끝나자 이승훈은 피난 간 지 1년 만에 납청으로 돌아왔다. 집, 상점, 공장 할 것 없이 모조리 불탔고, 패잔병들이 죄다 쓸어가 놋숟가락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것이라곤 공장을 세우느라 오희순에게 진 빚뿐이었다. 물건을 주고 받아놓은 어음은 모조리 휴지조각이 돼버렸는데 오희순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었다. 비슷한 처지에 몰린 유기 공장 주인들은 차례로 야반도주했다. 여러 날을 고심한 끝에 이승훈은 난관을 수습할 방법은 장사를 다시 시작하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매점매석 실패로 도산

이승훈은 빚과 이자를 꼼꼼히 계산해 부채 명세서를 작성한 후 오희순을 찾아갔다. 오희순 역시 전란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다. 한때 빚을 얻으러 온 장사꾼들로 온종일 북적였던 오희순의 사랑은 인적이 끊기고 잡초만 우거졌다.

이승일이 명세서를 보여주며 말했다. “전쟁 통에 전 재산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명세서에 적힌 빚뿐입니다. 빚을 갚으려면 장사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영감님께서 돈을 더 빌려주셔야 하겠습니다.”

“내게서 돈을 가져다 장사한 사람이 열만이 아니요, 스물만도 아니네. 그런데 전쟁 이후 내게 와서 이렇단 말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네. 세상인심이 원래 그런 거라네. 이제 자네가 와서 보고라도 해주니 고맙기 그지없네.”

오희순은 붓을 들어 이승훈이 보여준 명세서에 줄을 죽 그으면서 말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청군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 우리 군졸들을 강제로 차출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청군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 우리 군졸들을 강제로 차출했다.

“나는 이 돈 없어도 사네.”

빚을 모두 탕감해 준 오희순은 새로 2만 냥을 빌려주었다.

“그 돈으로 다시 장사를 시작하게나. 이윤이 남거든 이자는 말고 본전이나 돌려주게.”

이승훈은 오희순에게 빌린 2만 냥으로 유기 공장을 재건하고, 납청정에 유기점도 다시 열었다. 청일전쟁 이전 납청에는 수십 개의 유기 공장이 난립했는데, 전란 이후 유기 공장 주인들이 모두 도망가 버려 이승훈의 유기 공장 하나만 남았다. 전란 통에 잃어버린 세간을 마련하느라 유기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승훈의 유기 공장은 재건된 지 불과 몇 달 만에 정상 궤도에 올랐다. 청일전쟁 이후 이승훈은 장사꾼으로서 황금기를 구가했다. 납청 유기 공업을 독점했고, 평양 지점을 다시 열고, 곧이어 진남포 지점도 개설했다. 평안도 사람치고 이승훈이 만든 놋그릇을 쓰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유기 사업으로 자본을 축적한 이승훈은 1901년 평양으로 나와 무역상으로 변신했다. 제물포로 수입되는 각종 서양 상품을 구입해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판매하는 사업이었다. 무역으로 크게 성공해 그의 명성은 평안도의 경계를 넘어 서울에까지 자자했다. 웬만한 물품은 매점했기에 “이승훈이 사면 물건 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승승장구하던 이승훈의 사업은 40세 되던 1903년부터 급격히 기울었다. 황해도에서 옥수수와 잡곡을 매점했다가 벼농사 풍년이 들어 큰 손실을 보았고, 이듬해에는 원산에서 명태를 매점했다가 명태 값이 폭락해 큰 낭패를 보았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6월, 이승훈은 이태 동안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쇠가죽 2만 장을 매점했다.

쇠가죽은 군장과 군화를 만들 때 사용되는 군수물자였다.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동해에서 도고 제독이 이끄는 일본 함대에 도륙당한 후,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전쟁 기간 동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물가도 조금씩 하락했다. 그러나 전쟁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가 전쟁 배상금 지불을 거부하는 바람에 종전 협상은 연일 제자리걸음이었다. 일본은 전쟁을 재개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배상금을 받아낼 기세였다. 전쟁이 재개되면 물가는 반등할 것이고, 쇠가죽 값은 폭등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승훈의 간절한 염원과 달리, 그해 9월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돼 러일전쟁은 싱겁게 끝났다.

러시아는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하는 대신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과 남사할린 섬을 넘겨주었다. 넉 달 동안 창고에 쌓아둔 이승훈의 쇠가죽은 악취를 풍기며 썩어갔다. 전쟁이 끝난 이상, 쇠가죽 값이 폭락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군대에 납품하지 않는다면, 좁은 조선 땅에서 쇠가죽을 2만 장씩이나 판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지막 남은 재산을 창고에서 말 그대로 썩힐 판이었다. 고심 끝에 이승훈은 쇠가죽 2만 장을 모조리 배에 싣고 랴오닝(遼寧)성 잉커우(營口)에 가서 헐값으로 내다팔았다.

쇠가죽 매점에 실패한 이승훈은 평안도 정주 용동 자택으로 돌아와 칩거했다. 장사를 다시 시작하자면 못할 것도 없었다. 서울과 평양의 동업자들은 ‘방황’은 그만하면 됐으니 어서 돌아오라고 보챘지만 이승훈은 한사코 뿌리쳤다.



이모작 인생

▎유기점

▎유기점

그는 쇠가죽 매점 실패로 잃은 돈이 아까워 칩거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서 돌아와 보니 모든 게 허무해졌다. 11세에 유기점 사환으로 들어간 후 30년간 전국을 장돌뱅이로 떠돌면서 실패도 숱하게 맛보았지만 그처럼 무기력해지기는 처음이었다.

단지 돈만 벌기 위해 남은 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승훈이 고향에서 칩거하는 동안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이승훈은 가끔씩 평양과 서울에 들러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살폈다.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차에 평양에서 안창호의 연설을 들었다. “일본을 막으려면 하루빨리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옛날처럼 상투를 틀고 앉아서 관을 쓰고 공자 왈, 맹자 왈 해서는 안 됩니다. 썩어빠진 과거의 모든 나쁜 버릇을 버리고, 새 힘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힘을 기르려면 어서 바삐 새로운 교육을 하여 국민이 일체가 되어 새 사람이 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안창호의 연설에서 자신이 할 일을 깨달은 이승훈은 상투를 풀어 단발하고, 고향에 돌아가 학교를 세웠다.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는 시인 김소월, 백석, 경제학자 서춘, 의사 백인제, 화가 이중섭, 사상가 함석헌, 목사 한경직 등 걸출한 인재를 배출했다.

44년 동안 장사꾼으로 떠돌던 이승훈은 1930년 67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나머지 반생을 교육자, 민족 지도자로 헌신하며 살았고,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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