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모사드 국장의 ‘나 홀로 전쟁’

모사드 국장의 ‘나 홀로 전쟁’

▎테헤란 거리에 붙은 포스터. 이스라엘의 메이어 다간 모사드 국장(왼쪽)과 에후드 바락 국방장관의 이마에 조준선이 그려져 있다.

▎테헤란 거리에 붙은 포스터. 이스라엘의 메이어 다간 모사드 국장(왼쪽)과 에후드 바락 국방장관의 이마에 조준선이 그려져 있다.

이스라엘에서 보안국장은 대개 강한 성격으로 호가 났다. 그중에서도 메이어 다간은 항상 거침 없고 무모한 행동으로 유명했다. 훈련병 시절 그는 휴식 시간에 기지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서커스 단원처럼 나무나 전봇대에 칼을 던지곤 했다고 한 동기 사병이 기억했다.

젊은 시절 특공대원으로 가자 지구에서 작전 중에 적군의 손에서 안전핀이 뽑힌 수류탄을 낚아챈 공로로 자신의 첫 훈장을 받기도 했다.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자신만만했던 다간은 때로는 기습작전에 도베르만종 애완견 파코를 데리고 나타나기도 했다. 문제를 힘으로 해결하려는 그의 성향은 군에서 제대한 뒤에도 계속됐다.

2001년 테러 자금조달 루트를 조사하는 특별대책반을 이끌 당시 팀원들이 이란으로부터 하마스에 이르는 자금 유통 경로로 사용되는 유럽 은행을 알아냈다고 보고했다. 그 회의에 참석했던 목격자(이름을 밝히지 않았다)에 따르면 다간은 부하들에게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묻더니 말했다.

“불태워 버려!” 대경실색한 부하들은 그 지시에 반발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다간은 이 일과 관련해 아무런 논평도 하지 않았다).

그 직후 이스라엘의 전설적인 대외첩보기관 모사드의 기능을 활성화하는 임무가 그에게 맡겨졌다. 그 뒤 8년 동안 모사드가 주도했다고 알려진 비밀작전이 잇따라 성공하면서 그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장수하는 그리고 가장 영향력 있는 정보 책임자가 됐다. 부하들은 그를 존경한다(모사드 관계자들이 인용한 최근의 내부 조사에 따르면 모든 상급자가 존경 받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의 민간 지도자들조차 그의 전략적 조언을 귀담아 듣는다. 그러나 그가 영향력을 키우는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비판도 있다. 현재 64세의 다간(그리고 대다수 이스라엘인들)은 이란을 최대 위협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다간은 이란에 거의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도록 모사드의 체제를 완전히 뜯어고쳤다.

그는 이스라엘의 거의 모든 국가안보 문제를 그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다. 이스라엘 정부가 이란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면서 오바마 정부와도 마찰을 빚었다. 오바마 정부는 이란을 포용하고 팔레스타인과 협상을 촉진하는 정책을 추진한다. 대외적으로는 양국 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 중단을 유도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지지한다고 말한다(다만 아무런 진전이 없을 경우 강경 제재를 가한다는 조건이 따른다). 그러면서도 일방적인 공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미국이 이란과 협상할 때 그런 위협을 카드로 활용하기에는 좋겠지만 실제로 공격하면 이란은 중동과 남아시아 주둔 미군에 보복 공격을 가할 공산이 크다.

다간이 당장 이란을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진 않는다. 최근 들어 오히려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발사하는 수단을 보유하게 되리라고 추정하는 날짜를 2014년으로 늦췄다. 그러나 고집스럽게 이란에 초점을 맞추는 그의 태도는 적어도 네타냐후의 강경 성향을 부채질하는 효과가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느 프랑스 첩보 관계자는 다간을 가리켜 군사행동으로 기우는 네타냐후를 뒤에서 밀어주는 ‘순풍’으로 묘사한다. 다간이 이스라엘에서 가장 막강한 실력자 중 한 명으로 떠오른 데는 이란의 위협 확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게다가 2006년 레바논에서 헤즈볼라와의 전쟁과 스캔들로 이스라엘 정치 지도자들의 권력이 약화됐다.

그는 모사드의 활동이 한동안 위축된 뒤 아리엘 샤론 당시 총리의 부름을 받았다. 그리곤 무자비하고 효율적이라는 모사드의 옛 명성을 되찾는 데 크게 기여했다.

최근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성과를 올린 작전 두 건이 모두 모사드 요원들의 공로로 간주된다. 지난해 다마스커스에서 헤즈볼라의 악명 높은 지도자 이마드 무그니야흐를 암살한 일과 그 해 가을 시리아의 핵 원자로 폭격에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했던 핵심 정보를 입수한 일이다.

지난 9월 첩보 기관들이 이란 도시 쿰에서 여태껏 알려지지 않았던 우라늄 농축 시설을 찾아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그 뉴스는 미국인들이 발표했지만 숨은 공로자는 사실상 모사드 요원들로 알려졌다. 네타냐후는 다간을 부르는 대신 종종 그의 사무실로 직접 찾아가 브리핑을 받기도 한다(네타냐후의 대변인도 답변을 거부했다).

이스라엘 첩보세계의 경쟁자들은 그런 특별대우에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다. 그들은 그가 이란에만 너무 목매는 탓에 더 급박한 다른 위협에 대처하지 못한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어째서 이란이 시리아보다 더 위험한가”라고 어느 군 정보장교가 물었다(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시리아는] 이스라엘 접경에 대규모 부대를 배치했으며 나라 전체를 파괴할 만한 화학무기가 있다.” 시리아 정부에 더 적극적으로 유화정책을 펼쳐서 바스하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이란과 관계를 단절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략가들도 있다. 반면 다간은 이란이 시리아의 주요 동맹으로 남아 있는 한 아사드 정부와의 평화회담은 시간 낭비라는 입장이다.

다간의 강인한 성격은 위험과 시련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1945년 시베리아에서 폴란드로 향하는 화물차의 차디찬 바닥에서 태어났다. 원래 성이 후베르만이었던 부모는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이스라엘로 도피했다. 그들이 탄 배가 항해 중 폭풍우를 만나 침몰 위기를 맞기도 했다.

어린 메이어는 구명조끼 차림으로 오렌지 한 개를 손에 움켜쥔 채 갑판 위에 서서 이 세상과도 이제 곧 작별이라고 생각했다. 다간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이스라엘군에서 명성이 자자한 특공대 사예렛 마트칼에 지원했지만 탈락했다(군 첩보 본부 요원들은 다간이 아직도 그 일 때문에 반감이 남아 있다고 불평한다).

다간은 결국 기갑부대에 입대했다. 그는 이곳에서 나라의 존립이 위태롭다는 의식을 키우게 됐다. 그는 1999년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이 나라가 갑자기 휘말렸다”고 돌이켰다. 1970년, 당시 이스라엘 남부군 사령부 책임자였던 샤론은 25세의 다간을 발탁해서 가자 지구에서 활동하는 정예 특수군의 한 부대 지휘를 맡겼다.

이스라엘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한 번은 다간이 부하 몇 명과 함께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변장하고 어선을 이용해 가자 지구에 잠입해서 한 무리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전사들을 찾아내 몰살시킨 적도 있었다. 사예렛 리몬이라는 그 부대의 비정통적인 방식의 특공작전으로 이스라엘 내에서 테러 공격이 크게 줄었지만 훗날 다간의 부하 중 일부는 잔학 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한 명의 증언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등 뒤에서 총격을 가해 놓고는 그들이 도망치려 했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간은 기소되지 않았으며 1999년 예디오스 아흐로노스 신문에 이렇게 변명했다. “리몬 시절은 미국 서부개척 시대처럼 무법 치하가 아니었다.

한 순간도 여자와 어린이를 죽여도 된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발포 명령이 당시에는 달랐다. 규제가 적었다”고 덧붙였다. 그 무렵 모사드는 전성기를 맞았다. 냉전 시절 미국 요원들은 모사드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1960년대 중반 이스라엘 요원들이 소련제 미그 21 비행기 한 대를 구해줘 미국 CIA 요원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1970년대 초,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들이 최대 골칫거리로 떠오르자 모사드가 뛰어난 작전수행 능력으로 명성을 날렸다. 모사드 공작원들은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한 테러범 수 명을 포함해 세계 각지에서 PLO 전사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1980~90년대 이스라엘 점령지 내에서 폭력사태가 확대되면서(이스라엘의 국내 첩보기관 신베트와 군의 소관이다) 모사드의 영향력이 약화됐다.

1997년, 당시 모사드 국장이었던 대니 야톰은 공작원들에게 하마스 지도자 칼레드 메샬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공작원들이 요르단 수도 암만으로 잠입해 그의 귀에 독극물을 주입하려던 음모가 발각되면서 결국 국장이 옷을 벗고 말았다. 야톰의 뒤를 이은 에프라임 할레비는 거의 모험을 하지 않았다.

국가 간 정보를 교환할 때 이스라엘이 내놓는 정보가 별로 없다는 불평이 구미의 첩보 요원들로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모사드의 예산은 국가비밀이지만 재무부 소식통의 말로는 할레비 시절 자금지원이 25%가량 감소했다고 한다. 다간은 팔레스타인인들의 2차 인티파다(저항운동) 직후인 2001년 모사드를 맡아 ‘화염방사기’처럼 화끈하고 저돌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다간이 그 전 해 샤론의 선거운동 본부에서 일하기는 했지만 그의 임명은 단순히 ‘보은 인사’는 아니었다. 샤론은 1990년대의 소심한 국장들과 정반대 성격의 인물을 원했다. 다간은 군대 경험은 많았지만 모사드에서 근무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조직을 뒤흔들기가 더 쉬웠다.

그는 곧바로 조직 내부를 완전히 뒤엎은 뒤 이스라엘의 다른 첩보기관들과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그의 공격적인 방식은 많은 적을 만들었다. 첩보 세계에서 1순위이자 가장 치열한 싸움은 항상 예산확보 경쟁이다. 다간은 누구보다도 이스라엘 군 첩보당국과 신베트를 상대로 부족한 자원과 영향력을 놓고 밥그릇 싸움을 벌였다.

권력다툼이 노골화하면서 다간은 부하들에게 다른 첩보기관들을 방해하라고 지시하기 시작했다. ‘미스터 A’라는 암호명의 담당자를 선임해서 군 첩보부의 경쟁자들을 따돌리는 일을 맡겼다. 익명을 요구한 모사드와 군 첩보부 소식통에 따르면 이후 긴장이 극에 달해서 군 첩보부 관계자들이 모사드 본부 방문을 꺼릴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미스터 A를 실명으로 부르면서 불만을 드러냈다. 다간은 모사드 내에서도 적을 만들었다. 그는 사전통보 없이 현장 사무소를 불쑥 방문하거나 요원들에게 “최근에 한 일이 뭐냐?”며 호통치기 일쑤였다. 그의 성화에 못 이겨 사표를 던지고 나가는 사람이 잇따랐다.

이 문제를 보고하자 다간이 “나가라고 그래”라며 코웃음을 쳤다고 한 소식통은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다간은 모사드가 이란과 해외로부터의 테러라는 두 가지 위협에만 자원을 집중하겠다고 공언하며 공격 표적 리스트를 대폭 줄였다. 주로 이란이 지원하는 단체 헤즈볼라, 하마스, 이슬람 지하드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뜻이다.

“리스트는 짧아야 한다”고 그가 말했다. “계속 만능 해결사인 척한다면 결국에는 아무 일도 못 하고 만다.”다간의 외골수 정책은 곧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미국과 이스라엘 요원들은 2002년 후반, 이란이 파키스탄 핵과학자 A Q 칸의 도움을 받아 나탄츠에 농축시설을 건설해 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전국저항회의라는 이란 재야단체가 그 정보를 입수해 2003년 공개하자 국제사회에 비난 여론이 비등했다. 그 뒤로 이란 핵프로젝트에 의문의 사고가 잇따르면서 농축 작업이 지연됐다. 과학자들이 실종되기 시작하고, 실험실에 불이 나고, 핵 프로젝트와 관련된 비행기가 불가사의하게 추락했다.

익명을 요구한 첩보 소식통들은 이 같은 사고 중 여러 건에 모사드가 개입했다고 말했다. 성공하는 작전이 급증하자 모사드 예산도 크게 늘어났다. 지금은 “원하는 건 모두 손에 넣는다”고 최근 은퇴한 모사드 고위 관계자가 말했다. 하지만 다간의 권력기반이 확대되자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너무 커지지 않았냐는 우려의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다간은 부시-체니 시절 미국 내 네오콘(신보수파) 정책입안자들과 긴밀한 인맥을 구축했으며 모사드의 정보평가가 다간의 개인적인 입맛에 맞게 손질된다는 비난도 있다. 부시 보좌관들이 자신들의 어젠다에 맞게 증거를 조작했다는 비판을 받았듯이 말이다. 특히 시리아에 강경한 다간의 입장은 아사드 정권이 이란 쪽에 완전히 붙었다는 부시 시절 네오콘들의 경고를 반영한다.

수년 전 이스라엘에서 근무했던 유럽의 한 첩보 책임자는 다간이 시리아 포용정책을 주장했던 동료들을 쓰레기 취급했던 일을 돌이켰다. “그가 백악관 정책을 제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그 첩보 책임자는 말했다. 하지만 이란의 위협이 심각하다는 다간의 견해는 널리 지지를 받았다.

이란의 핵프로그램을 과소평가하는 CIA의 2007년 국가정보평가에 그가 반론을 제기했을 때 독일·프랑스·영국 첩보요원들 모두 그의 편을 들었다. 그리고 정치적 영향력이 항상 군사적 용맹성에 비례하는 이스라엘에서 권력층이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모사드를 더 공격적으로 조련하는 임무를 맡아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그의 공격성이 장기적으로 이스라엘에 더 위험할지 이란 같은 적들에 더 위험할지는 앞으로 더 두고 봐야 한다.

[필자는 이스라엘 일간지 예디오스 아흐로노스의 선임 정치·군사 전문가이며 ‘이란과의 물밑 전쟁’의 저자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 이재명, '위증교사' 혐의 1심서 무죄..."재판부가 진실과 정의 되찾아"

2오피스텔 마지막 규제, 바닥 난방도 허용…생숙→오피스텔 전환 지원

3농심 오너家 신상열, 상무→전무 승진...3세 경영 속도

4MBK, 10년 내 고려아연 팔까…경영협력계약 ‘기한’ 명시 없어

5GS리테일 4세 허서홍 시대 열린다...오너가 세대 교체

68억 아파트, 6700억으로 '껑충'…손해만 봤다, 왜?

7이재현 CJ 회장 “마지막 기회 절실함” 당부…인사 이틀만에 소집

810조 대어 놓친 韓조선, ‘원팀’ 물꼬 튼 한화오션·현대重

9한동훈 "가상자산은 청년들의 희망, 힘겨루기 할 때 아냐"

실시간 뉴스

1 이재명, '위증교사' 혐의 1심서 무죄..."재판부가 진실과 정의 되찾아"

2오피스텔 마지막 규제, 바닥 난방도 허용…생숙→오피스텔 전환 지원

3농심 오너家 신상열, 상무→전무 승진...3세 경영 속도

4MBK, 10년 내 고려아연 팔까…경영협력계약 ‘기한’ 명시 없어

5GS리테일 4세 허서홍 시대 열린다...오너가 세대 교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