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그래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마트에서 물건을 고를 때 몇 개 더 얹어 묶어 파는 패키지 상품에 손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렇게 파는 유산균 음료를 사다 먹어 보면 정상 가격으로 파는 것보다 묽다는 것을 금방 느낀다.
정상 제품보다 물을 더 많이 탔는지 눈으로 봐도 멀겋고 맛도 심심하다. 금방 “속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며칠 뒤 마트에 가면 그 기억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또 그렇게 묶어 파는 상품을 집어 든다.
이마트발(發) 가격인하 선언의 후폭풍이 만만찮다. 롯데마트, 홈플러스까지 가세함으로써 상품 가격이 떨어져 얼핏 소비자로선 좋아 보이지만, 길게 볼 때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먼저 대형 마트가 가격을 내린 제품은 어떤 것들인가? 대부분 대용량 또는 묶음 상품이다.
조금 싸다는 이유만으로 사 와 집에 쌓아두다가 유통기간을 넘기면 되레 손해다. 당장 먹거나 쓸 것도 아닌데 필요 이상으로 많이 사 두면 알뜰소비가 아닌 낭비요, 정작 다른 필요한 데 돈을 쓰지 못하는 기회비용 손실까지 나타난다. 대형 마트가 진심으로 고객을 생각해 물건 값을 낮춘다고 선언했을까?
따지고 보면 그들의 속내는 온라인 쇼핑몰에 빼앗기는 고객을 되찾아오기 위한 판매전략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백화점 매출은 꾸준히 증가한 반면 마트 매출은 이태 연속 감소했다. 더구나 값이 싸다는 소식을 듣고 마트에 가 보면 정작 그 물건은 떨어져 매장이 비어 있다.
기대를 안고 마트를 찾은 고객으로선 낚인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대형 마트가 순수하게 자체 마진만 줄여 물건을 싸게 팔까? 지금 식품 등 중소 제조업체는 대형 마트 간 가격 경쟁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끌려가는 신세다. 평상시에도 정상 이윤을 붙여 마트 판매가격을 정할 수 없는 ‘을(乙)의 입장’인 중소 제조업체로선 팔면 팔수록 역마진이 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참다 못한 CJ제일제당이 햇반, 오리온이 초코파이 납품을 중단했다지만 대형 마트에 맞서 납품중단 카드를 쓸 수 있는 곳은 그나마 1위 브랜드를 갖고 있는 대기업이나 가능한 이야기다. 중소 제조업체로선 대형 마트의 가격인하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이런 상황이 오래가면 결국 용량을 줄이거나 하청업체를 대상으로 납품가를 내려 달라고 요구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대형 마트가 가격을 낮춘다고 내수가 살아날까? 대형 마트의 일방적인 가격할인 경쟁은 가격질서를 왜곡하는 한편 제조업체의 신제품 개발에 영향을 주는 등 소비재 산업의 기반을 흔들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대형 마트의 기업형 수퍼마켓(SSM) 진출로 타격을 받는 동네 일반 소매점들로선 엎친 데 덮친 격이 될 것이고.
마트 간 가격 전쟁이 혼탁해질수록 납품업체가 받는 가격인하 압력은 거세질 것이다. 고래(대형 마트) 싸움에 새우등(중소 제조업체) 터지고, 결과적으로 소비자에게도 별 이득이 가지 않는 이번 대형 마트 간 가격 경쟁에 대해 정부가 손 놓고 있어선 곤란하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나서 중소 제조업체와 납품업체에 부담을 전가시키지 않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서울 물가가 왜 세계에서 가장 비싼가? 한번 오른 물가는 왜 원자재 가격이 내려도 환원되지 않는가? 그 답은 상당 부분 유통단계에 있다. 적정선 이상의 마진을 유통단계에 빼앗겨온 것이다. 소비자에게는 이익이 되면서도 납품업체에는 불이익이 없도록 하는 것이 이번 가격할인 경쟁의 과제다.
숙제는 하지 않고 고객 빼앗기에만 몰두하면 곧 TV 프로그램 개그콘서트 ‘남성인권보호위원회’ 코너에서 “소비자 여러분! 대형 마트 간 가격 경쟁으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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