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집게 점쟁이 자부하다 ‘재앙’ 불렀다
족집게 점쟁이 자부하다 ‘재앙’ 불렀다
한 의사가 있다. 환자의 건강이 악화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신기하게도 맞아떨어졌다. 명의(名醫)일까. 아니다. 어떤 이유로, 어떻게 나빠진다는 처방이 빠졌다.
건강 악화 진단을 받은 환자는 이를 예방할 수 없다. 진단받기 전이나 후나 속수무책이긴 마찬가지다.여기 경제 전문가가 있다. 미래를 제법 꿰뚫어본다. 그런데 다가올 미래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냥 ‘미래는 네모’라고 단언하고 끝낸다. 역시 좋은 전문가가 아니다. 경제 전문가에게 필요한 것은 빼어난 예측력이 아니다. 상황에 걸맞은 예방책을 제시하는 게 그들의 몫이다. 미래를 매번 정확하게 예측할 수도 없다.
경제학은 ‘미래를 맞히는’ 학문이 아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 경제학 거장들의 명성이 버블 붕괴와 함께 무너지고 있다. ‘족집게’ 예언자를 자부한 거장들의 오판이 ‘재앙’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시각도 있다. 경제학 거장의 오판과 그 이유를 살펴봤다.
대공황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즈음인 1931년 초. 미국의 한 변호사는 사태의 심각함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 역시 다른 사람처럼 대공황이 곧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엔 경기가 주기적 침체를 겪고 있을 뿐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유례없는 불황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이어졌다. ‘최악의 상황은 지나갔다’는 경제 전문가의 예측이 어긋난 것이다. 다음은 이 변호사가 기록한 엉터리 전망의 사례다.
1933년 그는 경제 전문가의 의견을 기초로 이전 경기침체가 얼마나 지속됐는지를 분석한 후 ‘역사가 반복된다면 불황은 2~3년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1935~37년 경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사무실이 있는 도시의 철강·고무공장은 ‘완전 가동’에 가깝게 돌아갔다.
# 1936년 크리스마스 이브의 일기“점심 먹고 방금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들 술 취한 뱃사람처럼 돈을 쓴다.” 일주일이 지난 후 그는 이렇게 썼다. “경기침체가 끝났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할 때가 된 듯하다.” 그러나 웬걸, 1937년 9월 증시는 또 무너졌다. 1939년 그의 기록엔 상심이 묻어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탁월한 경제학자의 예측을 다시 읽어 보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전부 틀렸다. 전문가에게 의지하는 건 시간낭비다.”
이 변호사는 벤저민 로스. 내용은 벤저민 로스의 아들이 아버지의 일기를 편집해 발간한 『대공황의 일기(The Great Depression: A Diary)』 중 일부다. 대공황 당시 경제학자 중 벤저민 로스의 비난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경제 거장의 무너진 명성계량경제학의 창시자, 뉴딜정책의 입안자로 명성을 날렸던 어빙 피셔는 대표적이다. 1929년 뉴욕 주식시장이 붕괴되기 며칠 전 피셔는 “주가는 영원히 이어지는 높은 고원에 올라선 듯하다”고 말했다. 뉴욕 증시가 그해 10월 3일부터 폭락해 대공황에 빠졌을 때도 “시장이 미쳐서 날뛰고 있다”며 “주가가 아직 기업의 내재가치를 따라잡은 게 아니기 때문에 더 올라야 한다”고 단언했다.
더 나아가 그는 증시 붕괴 넉 달 뒤 투자자에게 “경기회복이 멀지 않았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스스로 투자했다가 1000만 달러 가까운 돈을 날렸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1929년 대공황 이후 최악의 침체로 불린다. 불황 가능성을 제대로 경고하지 못한 경제학자, 경제 정책 담당자들의 명성은 버블 붕괴와 함께 속절없이 무너졌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2008) 폴 크루그먼 미 프린스턴대 교수는 올 초 미국경제학회 연례총회에서 “경제학자들은 미국의 금융시스템이 얼마나 허약한지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금융붕괴의 심각성을 포착하지 못했다”고 탄식했다.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도 “금융위기가 발생한 데는 경제학자들의 잘못이 크다”고 말했다.
국내 일부 경제학자도 비판에 동참한다. 채희율 경기대 교수는 “(경제학자들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고 난 후 시장이 극도로 마비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털어놨다. 강석훈 성신여대 교수도 “아카데미컬한 경제학이 현실 경제를 쫓아가지 못한 측면이 많다”고 지적했다.
사실 미래를 잘못 예견한 경제 전문가는 수없이 많다.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전 의장. 재임 시절 ‘경제 마에스트로’라는 찬사를 한 몸에 받았던 그는 ‘버블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의 첫 번째 오판은 1995년 불어닥친 닷컴 버블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그린스펀은 당시 인터넷 기술 발달이 생산성 증대를 꾀해 풍요로운 미래를 만들 것이라고 단언하다 버블을 읽지 못했다. 주가가 하루 두 배 이상 폭등했음에도 “인플레 위협은 없다” “지금은 버블이 아니다”고 강변했다. 글로벌 경제를 침체에 빠뜨린 부동산 버블도 그린스펀의 패착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닷컴 버블 붕괴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저금리를 너무 오래 가져가 부동산 버블의 원인을 제공했다. 부동산 버블이 한창 가열된 2004년 2월엔 그린스펀은 “부동산 거품은 없다”며 주택대출에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그 결과 2003~2005년 미국의 모기지 부채 잔액은 3조7000억 달러나 증가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의 뇌관으로 작용했다.
벤 버냉키 FRB 의장도 마찬가지다. 미국 주택시장이 연일 끓어오를 때 그는 “금융시스템이 매우 강해졌다”고 과대평가했다. 2005년 열린 미 상원의 FRB 의장 인준 청문회에선 “미 금융시스템은 여러 차례 위기를 거치며 역량이 강화됐고, 그 결과 금융시장의 유동성, 유연성이 향상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금융시스템이 얼마나 허약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집단주의 골짜기에 빠진 경제학계장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 총재는 2008년 7월 “유로 지역 경기는 2~3분기 하락한 뒤 점차 지속적 성장으로 돌아설 것”이라고 내다봤지만 정작 유로 지역은 깊은 침체의 골짜기로 빠져들었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의 머빈 킹 총재도 “경제가 어느 시점부터 한두 분기 동안 위축될 순 있지만 침체는 예상되지 않는다”는 낙관주의를 견지했다가 망신살이 뻗쳤다.
래리 서머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은 글로벌 불황의 심각성을 오판하고, 파생상품 위기를 잘못 진단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 비평가 조셉 엡스타인은 래리 서머스 의장에 대해 “예측의 정확성을 타율로 바꾸면 2할3푼 정도 될 듯하다”고 날을 세웠다. 최근 진행되는 국내외 경제 토론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은 “경제학자의 예측 능력이 형편없다”이다.
그러나 글로벌 불황을 예측한 학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는 『비이성적 과열』(2005)에서 이렇게 예측했다. “미국과 전 세계에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한 주택 투기 열풍이 뿌리내리고 있다. 사람들은 집값이 계속 오르면 나중엔 집을 결코 사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해 주택 매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는 버블의 조짐이며, 궁극적으로 파멸을 부를 수 있다.”
나심 니컬러스 탈레브 뉴욕대 폴리테크닉연구소 교수도 2007년 펴낸 『블랙 스완』에서 “예기치 못한 위기 상황으로 세계 경제가 휘청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스터 둠’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도 불황을 경고한 대표적 학자로 손꼽힌다. 하지만 이들의 경고는 메아리 없는 외침에 그쳤다.
경제 정책 담당자와 또 다른 경제학자가 이를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4년 그린스펀 전 의장은 일각에서 제기되는 주택 버블 붕괴 가능성을 이렇게 일축했다. “(부동산의) 전국적 가격 왜곡은 불가능하다.” 버냉키 의장도 2005년 “주택 가격 상승은 강력한 경제 펀더멘털을 주로 반영한다”고 했다.
‘효율적 시장 가설’의 창시자 유진 파마 시카고대 교수는 아예 버블이라는 단어에 짜증을 내면서 “부동산 시장엔 거품이 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은 주택을 살 때 매우 신중하다. 주택을 매입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들에게 최대 투자고, 이에 따라 그들은 가격을 꼼꼼하게 비교하는 등 조심하게 된다.”
‘부동산이 위험하다’는 경고등이 시시때때로 울렸음에도 경제학 거장들은 왜 오판을 거듭했을까. 첫째 이유는 집단사고에 매몰돼서다. 경제가 별 탈 없을 때 경제학자들은 다수설에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하는 경향이 짙다. 로버트 실러 교수는 정치심리학의 거장 어빙 재니스 미국 예일대 교수의 저서 『집단사고』를 인용해 설명한다.
“전문가들은 집단적 공감대가 형성된 사안에서 혼자만 동떨어진 의견을 낼 경우 중요한 자리를 받지 못할까 걱정하고, 그래서 그룹의 공감대에 대한 개인적 의심을 자체 검열한다. 이에 따라 경고를 하더라도 변죽만 울리는 정도에 그친다.”
실러 교수는 자신의 경험담도 털어놨다. 그는 2008년 11월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개인이 집단을 거스를 땐 소리치지 못하고 속삭인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1990~2004년 뉴욕 연방준비은행 자문위원단으로 활동할 때 주식과 주택시장이 과열돼 있다고 보고 거품을 경고했지만 매우 완곡하게 표현했고, 그런 별난 견해를 표명하는 데 부담을 느꼈다”고 밝혔다.
그는 “그룹의 공감대를 의심할 때 주저하는 심리, 다시 말해 ‘이걸 문제 삼는 바람에 내가 혹시 꼴통으로 찍히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생긴다”고 했다. 그린스펀 의장 시절 FRB 내부에서도 ‘부동산 버블’에 대한 경고가 나왔지만 역시 공염불에 그쳤다.
2004년 FRB의 한 이코노미스트가 작성한 논문은 ‘임대료에 비해 높은 주택가격을 버블의 징후로 봐야 할지’ 거론하다가 은근슬쩍 “강한 결론을 내리지 말고 더 연구하라는 몇 가지 반박 논리가 있다”며 말끝을 흐렸다.
FRB 멤버 가운데 한 명인 에드워드 그램리치는 서브프라임에 대한 건전성 규제가 충분치 않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2007년 자신이 낸 책 『서브프라임 모기지』에선 아예 주택 거품을 거론하지 않았다. 경제학 거장들의 지나친 자부심도 귀를 막았다. 자신들의 판단과 전망이 틀릴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던 게 위기를 초래했다는 얘기다.
“경제학은 족집게 학문이 아니다”다음은 실제 사례다. 2005년 FRB 콘퍼런스에서 라구람 라잔 시카고대 교수가 비관론에 입각한 논문을 발표했다. 미국 금융시스템의 리스크가 위험 수위에 다다랐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보면 정확한 예측. 하지만 이 논문은 모든 참석자의 비웃음을 샀다. 이 콘퍼런스 자리엔 타율 2할3푼의 그저 그런 타자 래리 서머스 의장도 있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루커스 시카고대 교수도 그랬다. 그는 2003년 1월 미국경제학자협회 기조연설에서 “불황 예방의 문제는 사실상 수십 년 전 해결됐다”며 현대 경제학자들은 더 이상 불황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글로벌 경제위기가 터지자 “(불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탄식했다.
경제학 거장들이 미래를 번번이 오판한 이유는 또 있다. 경제학은 ‘미래를 맞힐 수 있는’ 학문이 아니다.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 『경제학 원리』 4판(2005)에서 “경기 변동은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하다”며 “불황은 불규칙하게 온다”고 말했다. 경제학의 한계를 언급한 것이다.
강석훈 교수도 “한두 번은 족집게처럼 (미래를) 맞힐 순 있지만 지속적으로 그럴 순 없다”고 못 박았다. 박원암 홍익대 교수 역시 “훌륭한 미래 예측 경제 모형을 만들어도 객관적 지표를 산출할 수 없다는 공감대는 형성돼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학은 전조등 역할에 초점 맞춰야이에 따라 제아무리 경제학의 거장이라도 족집게 예언자가 될 순 없다. 경제학의 합리성과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 예측과 전망을 남발하면 화를 자초할 수 있다는 얘기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몇몇 경제학 거장의 명성이 추락한 것처럼 말이다. 일부 경제 전문가는 이렇게 따진다.
“경제 모형이 발달하면 언젠가 정확한 예측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린스펀 FRB 전 의장은 “기업이 더 많은 자료를 실시간으로 접하게 되면서 제대로 된 의사결정에 다가설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정보 수준이 높아지면 미래 예측 능력도 그만큼 성장한다는 거다. 하지만 이는 실증주의를 지나치게 과신한 의견이다.
고대 그리스 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지렛대의 원리를 발견한 뒤 “내게 긴 막대를 준다면 지구를 들어 보이겠다”고 말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모든 자료가 실시간으로 들어온다 해도 정확한 분석과 전망은 보장되지 않는다. 채희율 교수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논리적,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예술의 영역”이라고 말했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경제학 이론과 현실의 괴리는 좁혀질 수 없다”며 “이는 경제학이 가지고 있는 한계”라고 했다. 거시계량경제학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유병삼 연세대 교수의 지적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경제학은 적절한 모형을 만들어 현실을 분석하고, 미래를 조망한다. 하지만 모형을 돌릴 때 모든 상황을 상정할 수 없다. 상황이 워낙 많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주 드물게 존재하는 상황은 생략할 때가 많다. 이는 필연적이다. 문제는 이 생략한 부분에서 사건이 일어날 때가 많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광받고 있는 루비니 교수, 실러 교수 등 ‘미스터 둠’은 전지전능한 족집게 점쟁이가 아니다. 옳고 그른 전망을 반복하는 경제 전문가 중 한 명일 뿐이다. 만약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스터 둠’으로 떠오른 학자가 FRB에 들어간다면 또다시 곤욕을 치를지 모른다. 그린스펀 전 FRB 의장도 한때 ‘마에스트로’라고 불리지 않았던가.
경제 전문가에게 필요한 것은 예측 능력이 아니라 좋은 예방책의 제시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의사가 ‘당신의 건강이 좋아지다가 다시 나빠진다’고 했다. 좋은 의사일까. 아니다. 어떤 이유로, 어떻게 나빠진다고 말해주는 의사가 더 훌륭하다. 그래야 환자가 유의할 수 있다. 경제 분야도 마찬가지다.
더블딥을 경고했다면 이를 피하는 길도 함께 제시하는 게 경제 전문가의 덕목이다. 더블딥을 피하기 어렵다면 충격을 덜 받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충실한 대책이 담긴 전망은 결과에 영향을 주고, 바람직한 쪽으로 결과를 바꿀 수 있다. ‘지금처럼 가면 어떤 이유로 암초에 부딪칠 수 있다’는 상세한 경고를 새겨들은 경제 주체가 항로를 바꾸면 위기를 피할 수 있듯 말이다.
미래는 만들어가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전망하는 게 아니다. 바로 이것이 경제학 거장이 미래를 오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자 경제학의 불편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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