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그들에겐‘기업가정신의 피’가 흐른다

그들에겐‘기업가정신의 피’가 흐른다

한국 기업사는 수많은 영웅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은 영웅이 없는 나라’라는 말은 기업 세계에서는 틀린 말이다. 정주영, 이병철, 구인회, 최종건, 박태준, 김우중, 유일한…. 이들은 불굴의 집념, 혁신, 열정, 도전정신으로 빈국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대국 반열에 오르는 토대를 만들었다.

1세대 창업자인 그들은 틀림없는 영웅이고 기업가정신의 표본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청년들에게 그들은 너무 먼 존재다. 그들 역시 맨손으로 시작했지만 그때와 지금은 모든 게 변했다. 허름한 상점에서 출발해 대를 이어 일군 대기업은 요즘 젊은이에게 창업의 모델이기보다는 들어가 일하고 싶은 곳이다.

몇 해 전부터 기업가정신이 부쩍 강조돼 왔지만 예비 청년 창업가가 영웅으로, 롤 모델로 삼을 만한 기준은 막연했다. 학교 교과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해 KAIST 배종태 교수팀이 ‘한국형 기업가정신 모델 정립에 관한 연구’를 통해 국내외 대표적인 기업가 30명을 선정해 16가지 유형(기술혁신 리더형, 기술창업 혁신형, 혁신기회 확장형, 기회추구 확대형, 현상돌파 집중형…)으로 나눈 것은 그래서 의미 있는 시도였다.

하지만 다소 이론적이었고 그룹 창업자나 현직에 있는 성공한 중소벤처 CEO만 대상이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코노미스트는 범위를 좀 더 넓혀 봤다. 성공한 기업가뿐 아니라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한 기업가, 회사를 세우고 키운 후 적절한 시점에 후배 경영인에게 물려주고 퇴장한 기업가, 열정을 다해 기업 가치를 높인 후 비싼 가격에 매각한 기업가, 소위 ‘맨땅에 헤딩’하며 꿈을 키워가는 1인 기업가를 기업가정신의 모델로 뽑아 봤다.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서른 살에 쫓겨난 후 10년 만에 복귀해 신화를 쓰고 있는 스티브 잡스, 페이스북을 팔아 억만장자가 된 주커 마크, 29세에 16억 달러를 받고 유튜브를 구글에 매각한 체드 헐리,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만 하는 야후의 제리 양, 넷스케이프 창업자에서 벤처투자가로 변신한 짐 클라크, 120위안(2만원)을 들고 거리 사진사로 시작해 번 돈으로 1998년 자동차회사를 세워 최근 볼보를 인수한 지리자동차의 리수푸 회장. 우리에게도 이런 영웅이 필요하다.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

“기업가정신은 광야에 피어나는 들풀”
기업가정신 하면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을 빼놓을 수 없다. 중앙정보부에서 18년간 공직생활을 한 그는 1983년 미래산업을 창업했다. 원래 꿈꿨던 것은 아니다. 강제 해직 후 먹고살기 위해 창업한 경우다. 정 전 회장은 미래산업을 우리나라 대표적인 반도체 장비 업체로 키웠고, 1999년 두루넷과 함께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나스닥에 상장했다(2008년 상장 폐지).

사실 정문술 전 회장은 창업 후 회사를 성장시킨 능력보다 퇴임 전후 행보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2001년 미래산업 경영권을 가족에게 세습하는 대신 종업원들에게 물려주고 떠났다. “공식 직책을 일절 맡지 않고 상담역 역할에 머물고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거나 관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사임의 변을 남겼다.

그는 이듬해 국내 첨단산업 발전을 위해 써달라며 KAIST에 사재 300억원을 기부해 화제가 됐다. 그는 한 강연에서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결코 굴하지 않고 스스로 힘으로 일어서는 불굴의 자세를 갖는다면 반드시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다”며 “기업가정신은 광야에 피어나는 들풀”이라는 말을 남겼다.

현재 KASIT 이사장을 맡고 있는 정문술 전 회장은 본지 인터뷰 요청에 “나 같은 퇴물이 자꾸 등장하면 후배들에게 민폐”라며 사양했다.



안철수 KAIST 석좌교수

“기업가정신 전도사로 변신”
안철수 전 안철수연구소 의장(현 KAIST 석좌교수)은 정문술 KAIST 이사장과 비슷하면서 다른 행보를 보였다. 의대 박사과정 때 국내에 상륙한 컴퓨터 바이러스 ‘브레인’을 퇴치하는 안티바이러스를 개발해 유명해진 그는 이후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해 국내 보안분야 대표 벤처로 키웠다. 그는 CEO가 회사 가치를 올리는 CEO 브랜드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2005년 3월 그는 대표이사직을 전격 사임한다. 당시 그는 “회사가 정상 궤도에 진입한 것을 보니까 내가 대표로 있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40대 중반에 미국 와튼스쿨 MBA 과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 세간에선 그가 벤처캐피털이나 컨설팅 분야에서 일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KAIST 교수직을 맡고 기업가정신 전도사로 변신했다(TV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그는 요즘 “실패하면 재기할 수 없는 환경, 한 번 실패하면 평생 신용불량자가 될 수밖에 없는 잘못된 구조가 패기 있는 젊은이들을 창업에 나서지 못하게 하고 월급쟁이로 전락시킨다”며 전국 방방곡곡을 다닌다.



김윤종 전 자일렌 대표

“미국서 세운 벤처 20억 달러에 매각”
김윤종(미국명 스티브 김) 전 자일렌 대표는 정글이라는 실리콘밸리에서 신화를 쏘아 올린 대표적인 재미 사업가다. 1976년 미국으로 건너간 김 전 대표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 대학원에 다니다 한 대기업에 입사한다. 하지만 자신의 뜻을 펼치고 싶은 열망으로 안정을 버리고 위험을 택한다.

그가 1984년 처음 차린 회사는 파이버먹스였다. 파이버먹스는 광케이블을 이용한 전혀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 미 연방항공우주국에 납품하는 등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김 전 대표는 7년 만에 5000만 달러에 회사를 매각했다. 그 후 김 대표는 두 번째 도전에 나섰다. 1993년 세운 인터넷 네트워크 장비업체인 자일렌이다.

이 회사는 2002년 세계적 네트워크 장비업체인 알카텔에 20억 달러에 팔려 화제가 됐다. 2006년 한국으로 돌아온 김윤종 대표는 현재 투자 및 컨설팅 회사인 SYK글로벌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한 강연에서 “대기업에 취업한 한국 젊은이 수천 명 중 회사에서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며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중소기업에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것이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올해 서강대에서 앙트레프레너 강의를 맡았다.



황규빈 전 텔레비디오 회장

“74세에 한국서 벤처경영 재도전”
기업가정신은 나이도 필요없다. 좋은 예가 황규빈 젤라인 회장이다. 황 회장은 한때 자산 12억 달러로 미국 포브스지가 선정한 미국 내 주식 부호 27위에 이름을 올렸던 인물이다. 그가 미국에서 벤처기업을 세운 것은 1975년.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처럼 집 차고에서 시작한 텔레비디오라는 회사였다.

자본금은 그가 5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무작정 건너가 10년간 허드렛일을 하며 모은 돈이 전부였다. 황 회장은 게임용 모니터를 생산하는 곳이 모토로라뿐이던 시절, 흑백TV로 게임용 모니터를 만들고 10달러짜리 마이크로 프로세서 칩이 탑재된 CRT터미널을 개발해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81년 개발한 PC네트워크 시스템이 히트하면서 1983년 5월 상장했다.

황 회장은 국내에서 투자를 많이 했다. 지금까지 14곳에 투자했는데, 한 곳만 살아남았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전력선통신 전문업체인 젤라인이다. 그는 지난해 12월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10년 전에도 젊었지만 지금도 젊다”며 “젤라인을 제대로 키워보겠다”고 말했다. 그의 나이 올해 74세다.



안영경 핸디소프트 전 회장

“국내 대표 소프트웨어사로 키우고 사임”
안영경 회장은 지난해 4월 자신의 지분과 경영권을 매각했다. KAIST를 졸업하고 1991년 회사를 창업한 지 19년 만이다. 당시 시장에서는 안 회장의 결정에 의아해했다. 경영 악화로 본사 사옥을 매각하는 등 어려움은 있었지만 지분을 털고 나갈 정도는 아니었다는 얘기였다. 이에 대해 그를 잘 아는 벤처기업 CEO는 “안 회장 스스로 한계를 느낀 것 같더라”고 말했다.

하지만 안 회장은 재임 시절 “창업 초기부터 50세가 되면 대표이사를 후배에게 넘기고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말을 자주 했다. 실제로 그는 2004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이후 회사가 4년 연속 적자를 보자 복귀한 적이 있다. 그가 창업한 핸디소프트는 그룹웨어 국내 시장점유율 1위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EKP(기업지식포털), BPM(비즈니스프로세스관리) 솔루션 등으로 관련 업계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특히 공공 분야에서 핸디소프트는 외국계 기업을 압도하며 성장해 왔다. 안영경 회장은 요즘 운동과 휴식을 취하며 새로운 구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회사 관계자는 절대 그냥 가만히 놀 분이 아니다”고 말했다.”



권도균 전 이니시스 대표

“창업자, 회사, 경영자는 별도의 주체”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니시스와 이니텍 등 내가 설립한 회사 5개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포항공대에서 열린 예스리더스 기업가정신 특강에서 김도균 전 이니시스 대표가 한 말이다. 곱씹어 볼 말이다. 벤처 생태계가 잘 돌아가려면 창업한 회사가 성장해 인수합병되는 시스템과 환경이 중요하다.

권도균 전 대표는 이를 몸으로 보여준 CEO다. 그는 1997년 이니텍을 창업한 이후 세운 회사 5개를 모두 매각했다. 매각액은 약 1000억원 정도다. 최근 강연을 통해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창업자, 회사, 경영자는 각각 별도의 주체”라며 “내가 성공했다면 그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 미쳤고 그 결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기업으로 성장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젊었을 때 창업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무모할수록 좋다. 성공하면 막대한 보상을 얻을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경험과 내공을 쌓을 수 있다.” 그는 현재 예비 벤처인에게 컨설팅과 투자를 해주는 프라이머 대표다.



허민 네오플 전 대표

“회사 매각해 강남 800억대 건물 인수”
지난해 강남 미래에셋타워를 880억원에 인수해 화제가 된 인물이 있었다. 화제가 증폭된 것은 매입자의 나이 때문이었다. 서른세 살. 그렇다고 재벌가의 상속자도 아니었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세운 회사를 1000억원대에 매각한 허민 전 네오플 대표였다.

허민 전 대표가 창업을 결정한 것은 2001년 서울대 재학 시절. 기숙사 친구들과 개발한 첫 아이템은 ‘고주파를 이용한 잠 깨우는 기계’였다. 특허는 받았지만 사업성은 없었다.

이후 네오플은 온라인 게임업체로 변신해 ‘캔디바’ ‘꿍꿍타 시리즈’를 히트시켰다. 그는 2005년 대형 온라인게임인 ‘던전앤파이터’를 출시해 화려한 날을 열었다. 2008년 7월 그는 자신의 네오플 지분 41%를 넥슨에 매각하고 한순간에 ‘청년 재벌’이 됐다.



장병규 본엔젤스 대표

“초기 단계 기업에 투자하는 창투사 설립”
장병규 본엔젤스 대표는 젊은 프로그래머 사이에선 선망의 대상이다. 1997년 나성균씨와 네오위즈를 창업한 그는 2005년 검색엔진 개발 업체 ‘첫눈’을 설립했다. 업계에서 알아주는 실력파 엔지니어를 모아 개발한 검색엔진 첫눈은 2006년 NHN에 350억원에 팔렸다. 처음부터 계획이 그랬다. 당시 그는 “최고의 엔진을 만들 자신은 있지만 직접 서비스를 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최초 100억원을 투자하기로 계획했는데 그 이상을 넘으면 더 이상 투자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었다. 장 대표는 이후 사재를 털어 에인절투자사인 본엔젤스를 설립했다.

본엔젤스는 미투데이, 윙버스 등 12개 회사에 투자했다. 최근에는 국내 창업투자사로는 처음으로 ‘초기 기업 전문 투자사’를 출범했다. 이 회사는 ‘떡잎’ 단계가 아닌 ‘씨앗’ 단계부터 투자에 나선다는 것이 기존 창투사와 다르다.



김양현 하나테크 사장

“2년간 소파에서 자며 개발”
지난해 말 중소기업청 주최로 처음 열린 ‘제1회 청년기업인상’ 지식경제부 장관상을 받은 김양현 하나테크 사장은 28세이던 2005년 창업했다. 그는 맨바닥에서 창업한 전형이다. 김 사장은 중학교 졸업 후 상경해 삼촌이 운영하던 공장에 취직하면서 야간 실업고등학교를 다녔다. 주경야독으로 기술과 이론을 익힌 김 사장은 창업을 결심한다.

자본금은 적금 2000만원과 거래처 사장들로부터 빌린 5500만원. 그는 경기도 부천공단에 사무실 겸 공장을 차렸다. 설비 기계 1대에 직원은 3명이었다. 아이템은 휴대전화 부품인 키패드였다. 김 사장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일체형 키패드를 개발해 특허를 따냈고 2008년 매출 52억원에 직원 60명을 고용하는 회사로 키웠다. 하나테크의 키패드는 노키아에도 공급된다.

“2년간 소파에서 먹고 잤다”는 그는 비슷한 규모에 머물러 있는 회사 생활이 싫어 창업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영석 총각네 야채가게 대표

“혁신이 성공 창업의 열쇠”
이영석 총각네 야채가게 대표는 대단한 기술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성공 창업의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젊은 CEO다. 이제는 중견 경영인 대열에 오른 그는 1998년 소비자가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야채가게를 열면서 창업 때부터 화제를 모았다. 창업 후 이 대표는 하루 18시간씩 일했다.

그는 한때 맛있는 과일을 구입하기 위해 하루 7시간을 돌아다녔다. 당시 그는 바나나를 팔기 위해 원숭이를 활용하는 등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단순한 과일·야채 유통업을 혁신적인 서비스업으로 바꿔놨다.

현재 이 회사는 2개 직영점과 350개가 넘는 가맹점을 갖고 있다. 정식 법인명은 ‘자연의 모든 것’. 지난해에는 손질 없이 곧바로 먹을 수 있는 소포장 과일 및 샐러드, 야채 전문점인 베리핀을 선보였다. 현재 직원은 200여 명. 그는 요즘도 새벽 3시에 가락시장으로 출근한다.



정찬호 신지모루 대표

“평범한 직장인에서 1인기업 창업가로”
정찬호 신지모루 대표는 1인기업 CEO다. 평범한 직장인이던 그는 운전을 하던 중 ‘애플의 MP3 아이팟을 좀 더 편하게 들을 수 없을까’ 하는 아이디어를 창업으로 연결했다. 2008년 3월 서울벤처인큐베이터에 입주한 정 대표는 4월에 법인 전환을 하고 같은 해 7월 시제품을 내놨다. 신지모루는 지난해 두 차례 해외 전시회에 참여한 후 미국과 독일 등 해외 바이어들 눈에 띄면서 5개월 만에 매출 2억원을 올렸다

. “국내보다는 외국에서 더 통할 제품”이라고 했던 정 대표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신지모루의 출발은 산뜻하다. 하지만 싹이 쉽게 튼 것은 아니다. 그가 창업 당시 쓴 창업일기는 기업가정신이 무엇인지 들려준다. ‘2009년 1월 10일. 보유한 현금을 다 쓰게 될 것이라는 걸, 이미 10월에 예상했고 11월 말에 구체적으로 드러났으며 12월에 현실로 맞닥뜨리게 됐다.

꽤 어려운 상황일 수 있지만, 사업을 하면 이런 일이 다반사로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잘 다룰 수 있어야 하며, 오히려 사업이 커지기 전에 능력을 키울 좋은 기회를 갖게 됐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업무효율 저하 부담에…대기업 10곳 중 3곳만 60세 이상 고용

2尹대통령 내외 사리반환 기념식 참석…"한미관계 가까워져 해결 실마리"

3 대통령실, 의료계에 "전제조건 없이 대화 위한 만남 제안한다"

4이복현 금감원장 "6월 중 공매도 일부 재개할 계획"

5정부 "80개 품목 해외직구 전면차단 아니다…혼선 빚어 죄송"

6 정부 'KC 미인증 해외직구' 금지, 사흘 만에 사실상 철회

7"전세금 못 돌려줘" 전세보증사고 올해만 2조원 육박

8한강 경치 품는다...서울 한강대교에 세계 첫 '교량 호텔' 탄생

9서울 뺑소니 연평균 800건, 강남 일대서 자주 발생한다

실시간 뉴스

1업무효율 저하 부담에…대기업 10곳 중 3곳만 60세 이상 고용

2尹대통령 내외 사리반환 기념식 참석…"한미관계 가까워져 해결 실마리"

3 대통령실, 의료계에 "전제조건 없이 대화 위한 만남 제안한다"

4이복현 금감원장 "6월 중 공매도 일부 재개할 계획"

5정부 "80개 품목 해외직구 전면차단 아니다…혼선 빚어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