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과 박정희 이제 역사로 품어야’
‘5·16과 박정희 이제 역사로 품어야’
장편 ‘태평천하’ ‘탁류’의 작가 채만식이 해방 이듬해 썼던 단편소설 ‘민족의 죄인’을 최근 읽다가 무릎을 쳤다. 친일파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이 문제작에 나타나는 갈등 양상이 2000년대 초 지금과 어쩌면 그리 똑같을까,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변화가 없나 싶어 우선 놀랐다.
전율마저 일었던 대목은 따로 있었는데, 작품 속 주인공인 남편을 아내가 달래는 발언이었다. 남편은 어떤 위인이던가? 일제 말 등 떠밀려 애국 강연에 두 번 나갔다는 이유로 문인·기자 친구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았고, 이 때문에 이제 죽은 셈 치자며 자책하던 ‘여린 사람’이다. 자칭 민족의 죄인에게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죽은 셈 치면 못 참을 건 (또 뭐가) 있으며, 못 견딜 건 (뭐) 있어요? 이를 악물고, 다른 것 다 돌아보려 (하지) 말고 저것들 남매 잘 길러, 잘 교육시키고… 남 앞에 떳떳한 사람 노릇 하도록 해줍시다. 아버지로서 자식에 대한 애정으로나, 죄인으로서 민족의 다음 세대에다 속죄하는 정성으로나.”
해방전후사, 이후 5·16 반세기사의 빛과 그늘을 말해주는 메타포로 이 이상은 없지 않을까 싶다. ‘죄인’ ‘속죄’라는 강도 높은 표현이 좀 걸린다. 하지만 크게 보아 작가 채만식이 후대에 남겨주는 비원(悲願)의 언어로 유감없다는 게 내 판단이다. 참고로 6·25 직전 결핵으로 타계한 그의 만년작 ‘민족의 죄인’은 픽션이 아니고 자기 실화다.
그렇다. 채만식을 포함한 앞 세대는 식민지 시절 모두가 빛나는 항일 무장투쟁의 영웅적 삶을 산 게 아니다. 이후에도 그랬다. “도둑처럼 찾아온” 광복과 혼란 그리고 전쟁의 복판을 살아야 했다. 죽은 셈치고 악착같이 버텨 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2차 대전 후 독립한 많은 국가 중 가장 성공했다. 진정 거대한 역설이다.
소설가 채만식이 남긴 비원 ‘성난 얼굴로 과거사를 바라보는데’ 익숙해진, 그래서 자기모멸과 내출혈의 생리에 익숙해진 이른바 좌파들이 동의하건 하지 않건 우리는 오래전 OECD 회원국이 됐고, 세계경제 10권의 중강국가(middle-power)로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런 성공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계기가 있다면 과연 무엇이었나?
그건 하나로 모아진다. 모두 5·16이라는 유례없는 빅 푸시(big push)가 거둬들인 열매다. 그걸 균형 잡아 지적한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어떤 글에서 5·16 전후의 남북 체제경쟁까지 함께 분석했다. 그게 채만식 아내의 말과 울림이 같았다. 이는 우연만은 아니다.
“사회주의 국제체제가 붕괴되자 선군정치를 내세운 (북한의) 수령체제는 인민을 기아의 늪으로 몰아넣었다.…(명분 좋은) ‘민족과 혁명의 이중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인간정신의 자유가 철저히 말살됐기 때문이다. 반면 남한의 민주주의적 시장경제는 온갖 잡동사니 문명소(文明素)들이 뒤엉켜 출발이 심히 불안정했지만,…(이후) 최대의 물질적, 정신적 성과를 축적했다. 이 대조적인 현대사를 역사의 신, 클리오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왜나하면 그녀의 손에 들린 역사의 잣대는 자유와 (인간의) 이기심을 눈금으로 하기 때문이다.”(‘해방전후사의 재인식’ 1권 65쪽)
올해로 49돌을 맞는 5·16을 전후해 한국사회가 무얼 말하고 논의할지를 나는 가늠한다. 우리는 유교적 명분론이 우심하기 때문에 논의도 그 연장선에서 맴돌 것이다. 우선 4·19의 연장선에서 비교된다. 미완의 시민혁명이 피워냈던 반독재의 꽃이 5·16에 의해 꺾였으니 5·16은 헌정질서의 훼손이라는 것이다. 경제개발의 공로는 조금 인정하겠지만, 5·16으로 시작된 개발독재의 폐해가 훨씬 많았다.
그런 역사의 장애물을 87년 민주화 대항쟁으로 비로소 극복하기 시작했다고 그들은 자못 흥분한다. 그런 대중적 관념은 70년대 담론의 주류로 등장했지만, 나는 그걸 편승의 오류(bandwagon fallacy)에 불과하다고 본다. 비과학적인 내용인 데다가 검정을 거치지 않은 속류(俗流) 견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걸 퍼트린 게 민중그룹이고, 그쪽을 대표하는 간판스타의 한 명이 민족경제론자 박현채다. 오래전 학문적 파산 선고를 받은 종속이론에 토대를 둔 그의 거짓 예언이 처음에는 제법 멋지게 들렸다. 한국 경제발전은 민족경제의 자급자족 기반에서 이뤄져야 옳다는 것이었다.
5·16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논리다. 그런 철 지난 유사 과학을 지금도 좌파는 진실인 양 받아들인다. 그들의 허구적 신념을 뒷받침해주는 또 하나의 도그마가 ‘시민사회의 신화’다. 괴력을 가진 이 신화는 박정희 권력은 물론 이승만 정부에도 소급 적용돼 두 권력은 시민사회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오늘, 그들에게 물으려 한다. 시민사회라는 게 바다 건너 민주주의 헌법을 수입·채택하면, 어느 순간 허공에서 나타나는 꽃일까? 상식이지만 시민사회란 개념 자체는 19세기 중·후반 서유럽에서 창안됐으며, 그걸 만든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말대로 철두철미 서양적 현상이다. 절대왕정이 씨앗을 뿌렸고, 혁명·반혁명의 혼란을 거쳐 근대적 대의정치의 뼈대를 만들었다.
그런 서구적 그림이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식민지 국가에 민주주의 원형 내지 시민사회 모델로 보였을 뿐이다. 이 때문에 개발독재란 말도 순전히 허구다. 개발독재란 시민사회 형성 이후에 쓸 수 있는 용어인데, 이 상황에서 국가권력이 과도하게 커질 때 비로소 성립된다. 5·16 전후 한국사회에 시민사회가 존재했던가? 당시 우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인 김광섭의 절창(絶唱)대로 “전통도 없고 현대도 없는 나의 집”이 우리 모습이었다. 근대 이전의 질서는 완전히 부서진 상황이고, 애써 세워야 할 모더니티는 까마득한 신기루였다.
1961년은 남북 격차 최대이던 시점 그게 어느 정도였을까? 박정희가 등장했던 시점은 참으로 절묘했다. 61년은 남북한 경제 격차가 최대로 벌어져 있었다. 당시 우리의 1인당 GNP는 82달러였으며 북한(195달러)의 42%에 해당한다. 그들이 한국전쟁 이후 10년 동안 가파른 성장을 거듭한 결과인데, 1946년을 100으로 잡았을 때 전쟁 직후 70까지 떨어졌다가 59년, 60년 각각 305, 328로 커졌다.
특히 61년에 이르러 부쩍 성장했다. 연세대 박명림 교수의 자료에 따르면 공업생산의 경우 54~60년 연평균 39%씩 성장했다. 그리고 5·16이 일어난 61년 한 해 북한은 이전 10년(46~55년) 동안 생산한 것보다 더 많은 공업생산을 이룩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옛 소련의 지원이 컸지만, 그건 계획경제의 단기효과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다. 북한은 이내 추락을 거듭했다. 우리는 달랐다. 박정희의 집권 이후 잰걸음을 시작해 70년을 계기로 남북 첫 역전을 만들어냈다. 그때가 252달러 대 230달러였다. 박정희가 사망한 79년은 5·16 당시의 정반대로 나타났다. 북한 1114달러, 한국 1920달러. 우리가 두 배에 가까웠다. 나는 이걸 위대한 유산이라고 본다.
누가 이걸 부인할까?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이영훈 교수가 지적했던 자유와 인간 이기심이라는 효모 없이 장기지속의 발전은 불가능한 법이다. 그런데 북한은 그게 없었다. 우리는 있었다. 그 차이다. 즉 그 시절이 아무리 독재라지만 권력 부문을 제외하고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의 여지는 남겨놨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60~70년대를 말할 때 “어둡고 암울했던 시대”라고 상투적으로 말한다. 나는 진부한 어휘를 반복하는 이들을 살짝 경멸하는 버릇이 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태도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나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 기회에 조금 전 말했던 ‘편승의 오류’에 빠진 건 아닌지도 되짚어보시길 바란다. 좌파연하는 무리에 묻어가면서 아직도 현대사를 “정의가 실패해 온 역사”라고 믿는 허위의식에 빠진 건 아닌지를 생각해 보시라.
그런 이들은 아직도 5·16이 쿠데타냐 혁명이냐를 따져 묻는다. 씁쓸한 이분법이다. 프랑스혁명, 미국독립혁명, 러시아혁명을 포함한 서구의 그 어떤 혁명도 그토록 단기간에 5·16에 필적할만한 사회적 대 전변(轉變)을 창출해내지 못했다. 그 점에서 5·16은 혁명, 그 이상이다. 반면 헌정질서를 무너뜨리고 집권했다는 점에서는 쿠데타가 맞다.
외양은 쿠데타, 내용은 초(超)혁명이다. 그런 5·16을 주도한 핵심 인물, 근대 이전은 물론 근대 이후까지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동원체제를 통해 경제개발에 성공한 주인공 박정희에 연민과 애정을 함께 느낀다. 지난주 커버 스토리대로 박정희는 현대사의 역설을 구현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젊은 시절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몰렸을 만큼 반일 성향을 가졌고, 실제로 광복군 탈출을 고민했을 만큼 민족주의 기질이 강했다. 또 하나 분명한 건 그가 무시 못할 결격사유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해방 이후 정치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결정적 자산인 항일 무장투쟁 경력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작가 채만식이 말한 대로, 지금껏 ‘민족의 죄인’ 취급을 받는지 모른다. 박정희란 세 글자는 그래서 상처 입고 용렬한 앞 세대 선배들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그런 그의 집권 18년, 우리는 20세기 정치사 기적의 한 장면을 보았다. 5·16은 그 출발 지점이었다. 반복하지만 49년 전 그걸 주도한 박정희는 무균질의 정치인, 무결점의 항일투사는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시대의 흙탕물과 얼룩이 묻어 있다. 그는 위인전에 나오는 초월적 분위기의 성(聖)가족에서 나고 자란 위인도 아니다. 이후 그의 선택과 성장 그리고 집권 과정이란 대의명분만큼 기회주의적 선택의 요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통치기간도 모순과 기적적 성취가 함께 있었다. 본디 역사가 그런 것이 아니던가? 그 놀라운 역설을 받아들이자. 때가 됐다. 박정희와 5·16의 본모습을 역사화할 시기가 지금이다.
[필자는 문화평론가이며 ‘박정희, 한국의 탄생’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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