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팔려 나간다?
영국이 팔려 나간다?
영국은 어떤 면에서는 참으로 이상한 나라다. 나라의 핵심을 온통 외국 자본에 내주고 있으니 말이다. 영국을 상징하는 축구 프리미어 리그의 명문 구단부터, 자동차 산업, 런던 시내 중심지 부촌의 저택과 백화점, 심지어 유력 신문과 방송까지 외국 자본에 내주지 않은 부문이 별로 없다.
영국이 노동당 정권이든 보수당 정권이건 가리지 않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자본 이동을 자유롭게 하고, 외국에서 오는 자본투자에 대한 규제를 없애고 세금을 줄이는 등 적극적인 유인책을 쓴 덕분이다. 그 결과는 아주 독특한 개방 국가 영국을 만들어가고 있다.
프리미어 리그 축구팀 과반수가 외국인 소유영국은 축구의 발상지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흥행이 잘된다는 프리미어 리그를 운영하는 나라다. 영국인들의 축구 사랑은 너무도 유명하다. 그런 프리미어 리그의 20개 팀 가운데 영국인이 단독 또는 대주주로 소유하고 있는 팀은 9개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11개는 외국인이 단독 소유하거나 1대 주주다.
영국인 지분 없이 외국인들이 소유한 팀이 8개, 외국인과 영국인이 공동 투자한 팀이 3개다. 공동 투자 가운데 영국인이 1대 주주인 팀은 하나도 없다. 외국인이 단독 소유한 팀 가운데는, 심지어 최고의 프리미어 팀으로 인정받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들어 있다. 미국인 맬컴 글레이저가 14억 파운드를 투자했다.
식품가공업과 부동산업을 하는 재력가다. 올해 우승팀인 첼시는 러시아인 올리가르히(과두재벌)인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7억 파운드를 주고 사들였다. 그는 소련 붕괴 뒤 국유기업을 불하 받아 석유 등으로 큰돈을 벌었다. 애스턴 빌라는 미국인 은행가 랜디 러너가, 버밍엄 시티는 홍콩인 투자가이자 엔터테인먼트 사업가인 카슨이 각각 소유하고 있다.
풀럼은 해러즈 백화점을 소유했다가 얼마 전 카타르 국영기업에 넘긴 모하메드 알파예드 소유다. 리버풀은 미국인 톰 힉스와 조지 질레트가 지분을 반반씩 소유하고 있다. 맨체스터 시티는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의 왕족인 만수르 빈 자이드 알나하얀이 주인이다. 아부다비의 지도자이자 아랍에미리트 대통령인 칼리파 빈 자이드 알나하얀의 배다른 동생이다.
아스널은 미국인 스탠 크로잉크가 29.9%의 지분을 보유, 최대주주로 자리 잡고 있다. 부동산과 스포츠 프랜차이즈로 돈을 번 인물이다. 2대 주주도 광산과 투자은행으로 재산을 모은 러시아인 실업가 알리셔 우스마노프(지분 26%)다. 나머지를 영국인 세 명이 나눠 갖고 있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는 아이슬란드 은행이 지분의 절반을 갖고 있다.
나머지를 잉글랜드인 데이비드 골드와 웨일스인 데이비드 설리번이 보유 중이다. 포츠머스도 인도계 홍콩인인 바를람 차인라이가 90% 지분을 갖고 있다. 2부 리그라고 할 수 있는 챔피언스 리그는 외국인 주인이 별로 없다. 퀸스파크 레인저스의 지분 50%를 인도 출신의 세계적 철강재벌 락시미 미탈이 100억800만 파운드에 구입한 게 눈에 띄는 정도다.
세계 1위 철강 회사인 아셀로 미탈의 소유주인 락시미 미탈이 챔피언스 리그 팀을 구입하는 데 그치는 걸 보면 모든 걸 알 수 있다. 잉글랜드 축구의 자존심인 프리미어 리그가 자금이 부족해 외국 자본에 넘어간 게 아니고, 외국 자본이 투자하고 싶어 안달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287억 달러 재산으로 유럽 최고의 부자로 꼽힌 미탈은 영국의 부동산 역사를 새로 쓰기도 했다. 그는 2004년 영국 런던의 부자 동네인 사우스켄싱턴의 켄싱턴 가든 18~19번지에 있는 저택을 5700만 파운드에 구입했다. 당시로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집이었다. 그는 같은 거리 6번지와 9번지의 저택도 1억1700만 파운드와 7000만 파운드에 구입해 각각 아들과 딸에게 주었다.
6번지의 저택도 구입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집의 기록을 깼다. 미탈 덕분에 그와 자식들의 집이 있는 켄싱턴 가든은 ‘억만장자의 가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중동과 러시아, 인도의 신흥 부호들이 너도나도 집을 산 덕분에 런던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영국 소유 자동차 브랜드는 역사 속으로
애스턴 마틴은 2007년 7월 문을 닫았다. MG 로버는 2005년 4월 공장을 폐쇄했다. 최고급차의 대명사인 벤틀리는 폭스바겐 그룹에 팔렸다. 재규어-랜드로버는 인도의 타타 그룹으로 넘어갔다.
영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회사였는데도 생산량이 30만 대가 채 안 된다. 007 영화에 나오던 롤스로이스도 BMW 소유다. 팬텀 모델을 1000대 정도 만든다. 복스홀은 GM 소유다. 12만 대 미만을 생산한다. 영국의 국민차로 코미디물 ‘미스터 빈’에 단골로 등장했던 초소형 자동차 미니도 독일 BMW에 넘어갔다. 여러 모델을 합쳐 23만 대 정도를 생산한다.
영국에는 대신 내수를 노린 외국 자동차 회사의 생산기지가 여럿 있다. 남부 사우샘프턴에는 포드 공장이 들어서 연 7만~8만 대를 생산한다. 런던 근처 루턴에는 GM 루턴 공장이 세워져 연 7만여 대를 만든다. 일본차도 빠질 수 없다. 닛산은 35만 대 생산 규모의 영국 공장을 두고 있다. 도요타가 28만 대를 현지 생산한다.
산업혁명이 시작됐던 영국에서 이제 산업이란 게 별로 남은 게 없다. 조선소는 최고급 요트를 만드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폐쇄됐다. 한국과 일본의 조선 산업이 활기를 띠면서 1980년대에 이미 몰락했다. 제철소도 별로 남은 게 없다. 제철소에 석탄을 공급하던 탄광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보조금으로 버티다가 마거릿 대처 총리에 의해 대부분 폐쇄됐다.
제조업의 상징이라는 자동차 산업이 이렇게 외국 자본에 의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 영국은 어떻게 생각할까? BBC 보도에 따르면 “외국이 자금을 투자해 우리의 자동차 브랜드와 공장을 매입해 가동해 주니 고마울 뿐”이라는 게 영국인들의 입장이다.
영국 브랜드를 외국 자동차 회사가 사가고, 외국 자동차 회사가 영국 현지 공장을 세움으로써 투자가 들어오고, 고용이 이뤄지지 않느냐는 것이다. 문제는 공장 가동과 고용이지, 브랜드의 소유자가 누구인지가 아닌 것이다. 자동차만이 아니다. 현재 영국 상장기업의 절반은 외국계다.
런던 럭셔리의 상징인 해러즈 백화점의 비애 ‘럭셔리 런던’의 상징으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쇼핑지의 하나인 해러즈 백화점은 지난 5월 8일 주인이 바뀌었다. 새 주인은 페르시아만의 산유국 카타르의 투자청 산하 카타르 홀딩스다. 이 나라가 국왕이 다스리는 왕국이니 사실상 카타르 왕족들에게 넘어간 것이다.
가격은 15억 파운드에 이른다. 이 백화점의 새 주인이 된 카타르 홀딩스의 회장인 셰이크 하마드 빈 자심 알사니(카타르의 총리이기도 하다)는 “영국인과 런던을 찾는 외국 관광객을 위해 해러즈 백화점을 업그레이드하겠다”고 말했다.
영국을 상징하는 유통업체와 부동산을 구입한 그는 이를 바탕으로 런던에 오는 관광객을 겨냥해 영업을 확대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백화점이 중동 카타르인에게 넘어간 것은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직전 주인이 이집트인 모하메드 알파예드였기 때문. 알 파예드는 1985년 이 백화점을 6억1500만 파운드에 매입했다.
런던의 부촌인 나이츠브리지에 자리 잡은 이 백화점은 오랫동안 부자들의 쇼핑지로 각광 받았다. 영국 왕실은 이 백화점을 공식 물품 납품처로 지정했다. 하지만 1997년 다이애나비가 모하메드 알파예드의 아들 도디와 파리의 리츠 호텔에서 나오다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지위가 흔들렸다.
영국 왕실은 이 백화점에 발을 끊었고, 알파예드는 영국 왕실과 정보기관의 음모로 아들이 죽었다며 고발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알파예드는 자신이 개발했던 런던 시내의 최고급 레지던스와 개인 항공기로 VVIP를 모시는 항공사도 함께 매각했다. 런던을 찾는 부자들은 영국 기업이 아닌 중동 아랍계 업체의 최고급 서비스를 받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카타르가 해러즈를 매입한 뒤 거액을 들여 백화점을 업그레이드하겠다는 데 주목했다. 런던에 외국 자본이 들어와 백화점을 사들이고 관광객 수요를 겨냥해 거액을 들여 개조 작업까지 하는 것은 영국이 투자지로 매력적이라는 소리다. 외국 자본이 들어오는 것은 투자지로서 영국의 장점 때문에 돈이 몰리고 있다는 증거지, 영국의 기업이 외국에 팔려 나가는 걸로 보는 건 곤란하다는 인식이다.
미디어에도 외국 자본 대거 투자
머독은 호주는 물론 영국과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의 수많은 신문, 방송, 잡지를 거느린 글로벌 미디어 그룹 뉴스코프의 대표다. 아들 제임스는 뉴스코프 유럽, 아시아 대표를 맡아 후계자 수업을 하고 있다.
그가 목소리를 높인 것은 그 날짜로 배포된 인디펜던트 특별판 30만 부의 1면에 난 ‘루퍼트 머독은 이번 선거를 결정하지 않는다-당신이 결정한다’는 제목의 사고 때문이었다. 제임스 머독은 이를 두고 자기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항의한 것이다.
인디펜던트는 한 달 전 러시아 재벌 알렉산드르 레베데프가 인수했는데, 그럼에도 자신들은 편집권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며 이 같은 사고를 냈다. 따지고 보면 외국인이 소유한 미디어들끼리 서로 다툰 셈이다.
머독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언론 재벌로, 영국에서도 그의 입지는 독보적이다. 그가 소유한 미디어 모기업 뉴스코프는 영국에 뉴스 인터내셔널이란 자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 회사엔 대중지인 ‘더 선’과 이 신문의 일요신문인 ‘뉴스 오브 더 월드’, 권위지인 ‘더 타임스’와 그 일요신문인 ‘선데이 타임스’, 그리고 영국 최고 인기 위성방송인 ‘스카이스포츠’를 비롯해 수많은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BSkyB 방송이 속해 있다.
이 가운데 BSkyB는 그 하나만으로도 거대한 제국이다. 2010년 3월 말 기준으로 가입자가 977만 명, 브로드밴드(인터넷) 고객 250만 명에 이른다. 1년 매출(6월 말 결산 기준, 2009년 6월까지)은 63억2300만 파운드로 7억8000만 달러의 이익을 냈다. 직원이 1만6000명이나 된다. 이 방송의 필살 무기는 프리미어 리그 중계권이다.
이 때문에 영국 내 1위 스포츠 채널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219년 전통의 더 타임스도 그가 낸다. 영국을 지배하는 사람들이 본다는 신문이다. 2004년부터는 젊은 세대에 호감을 사기 위해 판형을 콤팩트 사이즈로 바꾸었다. 50만 부를 찍는다. 사실 권위지인 ‘더 타임스’보다 더욱 큰 힘이 있는 매체가 ‘더 선’이다.
1963년 창간된 대중지 ‘더 선’은 69년 머독의 손으로 넘어갔다. 더 선은 300만 부가 넘게 팔린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선 별도로 ‘스코티시 선’을 발행하고 있는데 35만 부를 발행한다. 매일 770만 명이 이 신문을 읽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모든 언어를 다 합쳐 전 세계 10위에 든다. 1970년부터 3면에 항상 가슴을 드러낸 여성의 사진을 싣는 것으로 악명 높다.
물론 상당수 지식인이나 진보인사, 보수인사, 여성계에서는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벌거벗은 여성의 몸을 보느라 매일 수많은 사람이 이 신문을 사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이 신문의 논조나 지지 정당을 따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영국에선 총선에서 신문이 특정 정당을 지지할 수 있다.
호주 출신의 미국인인 머독은 1997년 총선부터 노동당을 지원해 이 정당이 집권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하지만 올해 총선에선 말을 갈아타 보수당을 지지해 이 정당을 제1당으로 만드는 데 1등 공신이 됐다. 외국인 머독이 매체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영국 정치에 실질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일간 ‘인디펜던트’를 매입한 러시아인 레베데프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이 회사를 단돈 1파운드에 인수했는데, 빚을 갚아주고 10년치 인쇄 대금 1500만 달러도 내고 앞으로 5년간 5000만 달러를 투자해 신문 경영을 정상화하기로 했다. 직원들의 고용과 임금도 보장하기로 했다. 상당한 투자다.
그는 이미 지난해 1월 유명 석간신문인 ‘이브닝 스탠더드’를 인수했다. 이 신문은 퇴근길 영국인을 노려 지하철과 기차역에 쌓아두고 파는 전형적인 석간신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무가지로 전환해 발행 부수를 이전의 4배로 늘렸다.
그는 과거 KGB(소련 보안국) 요원으로 런던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냉전 시절 영국에 스파이로 파견됐던 인물이 러시아의 개방 이후 갑부가 되어 영국 미디어의 일각을 차지하고 정치적인 입지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신문사 직원들의 반응은 “고용을 보장하고 급여가 제대로 나오고 회사가 생존한다면 주인이 누가 돼도 상관없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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