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거목이 남긴 큰 발자취
조용한 거목이 남긴 큰 발자취
뚜렷한 일화는 없다. 에피소드도 많지 않다. 그는 조용한 성품이었다. 튀지 않았다. 술, 담배도 몰랐다. 모임에 나와서 사소한 우스갯소리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다. 그래도 동료와 선후배는 그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평가는 비슷하다. “탁월한 업무능력에 성실함까지 갖췄다.” 김명호 전 한은 총재(19대)는 “결함을 찾기 힘든 선배”라고 말했다. 그런 유창순 전 국무총리가 3일 오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조선은행 배출 해외 유학생 1호1918년 평남 안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평양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평양 인재 중 한 명이다. 1936년 조선은행 평양지점에 입행해 근무하다 미 헤이스팅스 대학에서 유학했다. 광복 후 조선은행이 배출한 해외 유학생 1호다.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이 학교를 졸업한 그는 한국은행 도쿄지점장에 발탁됐다.
고인은 업무 능력이 탁월했다. 한은의 대표적인 전천후 플레이어로 손꼽힌다. 물가안정, 은행규제, 중앙은행 독립성 등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식견을 뽐냈다. 풍부한 해외 경험에다 수리까지 밝았다. 특히 국가적 과업이라면 소매를 걷어붙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1955년 한은 뉴욕사무장 시절의 일화는 여전히 회자된다.
한국은 당시 IMF(국제통화기금)에 가입했다. 하지만 이게 거절될 수 있었다. IMF가 ‘기록이 전혀 없다’는 이유로 한국의 가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벼랑 끝 위기의 순간 그가 몸소 나섰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한국 통계를 수집·정리해 IMF에 제출한 것이다. 최창락 전 한은 총재(15대)는 “어떤 난제가 닥쳐도 안정적이고 침착하게 처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고 했다.
전문가답게 고집이 셌다. 소신에 어긋날 땐 타협하지 않았다. 그를 기억하는 한은 후배는 “옳지 않은 일은 스스로 하지 않았다”며 “기독교 신자여서 더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유 전 총리의 좌우명은 주기도문이다. 고인의 올곧은 성격이 읽히는 사례는 많다. 이승만 정권 말기, 한은 조사부장 시절의 이야기는 대표적이다.
이승만의 자유당은 1960년 3·15 선거 승리에 목말라 있었다. 집권을 연장하는 게 당면과제였다. 이 선거에서 유령유권자 조작, 입후보 등록의 폭력적 방해, 야당인사 살상 등 숱한 부정행위가 속출했던 이유다. 3·15 부정선거가 치러지기 직전, 고인에게 은밀한 지시가 하달됐다.
‘자유당에 선거가 유리하도록 경제지표를 조작하라’는 지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 전 총리는 이 지시를 한마디로 거절했다. ‘살아 있는 권력’의 명령을 단칼에 거절한 대가는 컸다. 곧바로 한은 조사부장에서 외사부장으로 전보됐다. 한은의 핵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 전 총리의 공직생활도 이대로 끝? 아니다.
때마침 정국이 소용돌이쳤다. 3·15 부정선거가 4·19 혁명으로 이어지면서 국민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급기야 이승만 정권이 붕괴했고 1960년 5월 허정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구성됐다. 유 전 총리는 이때 부흥부 차관에 올랐다. 부흥부는 한국전쟁 후 경제성장을 위해 설치된 조직으로 경제기획원의 전신이다.
허정 과도정부를 거쳐 1960년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민주당의 의원내각체제였다. 고인은 다시 한은 이사(현 부총재)에 발탁됐다. 그로선 1년 사이 한은 조사부장→외사부장→부흥부 차관→한은 이사를 거친 셈이다. 1961년 5·16 사태가 터진 직후 이번엔 한은 총재(6대)에 올랐다.
2대 한은 총재였던 김유택 전 경제기획원장이 추천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유택 전 원장은 유 전 총리와 마찬가지로 이북 출신(황해도 재령)이다. 한은 총재 재임 기간은 길지 않았다. 1년 만인 1962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총재직을 내놨다. 당시는 한은의 독립성이 크게 훼손되던 시기.
▎1997년 전경련 회장단 긴급회의에서 유창순 전 총리(왼쪽)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악수하고 있다.
1962년 한은법 개정으로 외환정책·관리기능이 정부로 이관됐다. 재무부의 한은 업무검사권이 신설됐다. 금통위 결정에 대한 재무부 장관의 재의요구권도 이 무렵 생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은의 상징 격인 금통위가 해산됐다. 한은 독립성을 유독 강조했던 고인으로선 수용하기 힘든 상황이었을지 모른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게 있다.
재임기간은 짧았지만 그는 한은 이사에 발탁된 지 단 1년 만에 총재에 등극했다.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혹자는 ‘당시는 격변기였고 군사정부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은 출신 사람들은 ‘업무 능력에서 따라올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그의 능력을 탐내지 않은 정부는 없었다.
박정희 정부 시절엔 상공부 장관(1962년), 경제기획원장(1963년)을 지냈다. 전두환 정부 땐 국무총리(1982년)를 역임했다. 무역협회장 시절인 1981년에는 서울 올림픽 유치 대표로 활동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각별한 인연이 맺어진 것은 이 무렵. 정 명예회장은 서울 올림픽 유치위원장이었다.
2001년 정 명예회장의 영결식에서 유 전 총리가 추모사를 낭독한 것도, 2002년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가 이끌던 국민통합21의 창당준비위원장을 맡은 것도 이런 인연에서다. 흥미로운 점은 관료 출신인 고인이 민간기업 회장으로도 여러 차례 재임했다는 것이다. 여기엔 롯데 가문과의 인연이 한몫 톡톡히 했다.
한은 도쿄지점장 시절 그는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과 각별하게 지냈다. 이런 인연으로 신 회장은 그를 롯데제과 회장(1967년)에 추대했다. 신격호 회장의 동생 신준호 푸르밀(옛 롯데우유) 회장과의 인연도 깊다. 1985년 롯데제과 고문을 역임한 유 전 총리에 대해 신준호 회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나와 함께 롯데그룹의 터전을 닦은 주인공은 유 전 총리다.” 그가 롯데계열 화학기업인 호남석유화학 회장(1986년)에 오른 데도 이런 배경이 숨어있다. 이채로운 이력은 또 있다. 공직자 출신으론 처음으로 1989~93년까지 전경련 수장을 맡았다. 하지만 누구도 원치 않는 자리였다. 고인도 처음엔 고사했다.
노사갈등과 반기업 정서가 판치는 분위기 탓이었다. 재계 회장들이 갖은 핑계를 대면서 뒷방으로 꽁무니를 뺐지만 그는 달랐다. 삼고초려 끝에 회장직을 수락했다. 소방수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그럼에도 주어진 임무를 무리 없이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규제개혁은 그의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정부 관리들은 흔히 기업가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민간 활동을 규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생각이 없어져야 우리 경제가 바로 설 수 있다….” 고인의 이와 같은 주장은 노태우 정부에서 대폭 수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국립 대전 현충원에 조용히 잠들었다. 한 시대를 조용히 풍미했던 재계 원로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는 깊고 선명하다.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그가 축적한 DNA도 후대에 전파될 게다. 책임감과 사명감 그리고 전문가다운 고집이 핵심 유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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