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의 신천지 동유럽
디자인의 신천지 동유럽
약 2년 전, 런던의 빅토리아&앨버트 미술관에서 ‘냉전기의 현대 디자인(Cold War Modern)’이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렸다. 미국과 옛 동구 진영 국가들이 디자인 세계에서 치렀던 대리전쟁을 돌아보는 자리였다. 전시회의 명백한 지정학적 측면 이외에도 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디자인이 그 지역에 그렇게 많았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를 끌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중부와 동부유럽(CEE) 디자이너들이 점차 활동범위를 넓히면서 몇몇 세계 최대 시장의 미술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지난 4월 런던의 민트 갤러리는 체즈 체코라는 전시회를 한 달간 열고 체코 유리와 도기를 선보였다. 지난 5월의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Milan’s Salone Internazionale del Mobile)에서는 슬로베니아의 니카 주판츠, 헝가리의 야노스 휘블러 같은 디자이너가 전위적인 작품으로 상당한 화제를 불러모았다.
상하이 엑스포의 폴란드관은 오려낸 종이조각으로 만든 건축 구조물을 전시했다. 폴란드를 상징하는 민속예술에 갖는 긍지의 표시다. CEE 지역에서 나오는 디자인은 그 지역의 국가들만큼이나 다양하다. 대부분 모국의 미술적 유산을 활용하는 디자이너가 많다. 예컨대 체코는 예로부터 최고급 유리제품으로 유명한데 상당수 현대 디자이너가 그 유산을 계승해 유리공예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폴란드는 유구한 가구제작의 전통을 이어받아 상당히 흥미로운 가구를 생산한다. “어느 정도까지는 전통의 부활이라는 측면이 있다”고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의 윌리엄 나이트 부사무국장이 말했다. “그런 문화적 자산이 경쟁우위가 될 수 있다.”보렉 시펙이 그 표본이다.
그의 환상적인 칸델라브룸(가지 뻗은 촛대)과 화려한 샹들리에는 전통 도기와 유리 공예에 실험적 디자인을 접목했다. 세계 각지에서 그의 작품을 수집하며 갖고 싶어한다. 그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자 체코의 젊은 미술가들도 조국의 유리공예 전통에 긍지를 갖게 됐다. 맥심 벨코브스키는 프라하 소재 쿠부스 스튜디오의 공동 설립자이자 민트 전시회의 대표 미술가다.
그는 특이하고 불규칙한 형태로 자기 꽃병을 만들어 관람객으로 하여금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게 한다. 하지만 정교한 꽃 그림 장식을 넣어 2차대전 전의 디자인을 연상케 한다. 민트 전시회에 출품한 야쿱 베르디히도 ‘카프카니스탄’으로 초현실주의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이 우뚝 솟은 자기 작품은 청색과 금색의 찻주전자 위에 아기 머리를 얹어 놓아 카프카의 부조리를 떠올리게 한다. 슬로바키아도 체코에 뒤질세라 지난 5월 브라티슬라바에서 아치 데이스 2010을 개최했다. CEE 지역 전체의 현대 건축을 조명하는 축제다. 나이트에 따르면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CEE 지역 출신 출품자 수가 해마다 증가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폴란드인들이 특히 해외홍보에 탁월한 능력을 과시했다. 폴란드의 젊은 디자이너들이 적극적으로 국제 전시회에 참가한다. 이들은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와 같은 시기에 밀라노의 트리엔날레 디자인 미술관의 한 전시회에 가구·그래픽·애니메이션·건축을 출품했다.
폴란드인들은 사업의 세계화에도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뉴욕이나 도쿄 등지에서 전시를 했던 가구 디자이너 토멕 리갈리크는 런던과 폴란드 우지에 스튜디오를 뒀다. 기능적인 테이블과 전등으로 짧은 시간에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오스카르 지에타는 취리히와 폴란드 브로츠와프에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콤포트는 바르샤바·런던·마드리드에서 활동하는 폴란드 디자이너 네 명의 공동체다. 그들의 6디그리스 모듈라 선반은 균형이 잡히지 않은 가변형이다. 현재 런던의 매장에서 판매된다. “밀라노 전시회에서 사람들이 다가와 ‘폴란드 디자인? 그런 게 정말 존재하오?’라고 물었다”고 콤포트의 마야 간시녜츠가 웃으며 말했다. “폴란드 디자인을 뚜렷하고 독특하다고 규정짓기는 어렵지만 사람들이 품질을 연상하게 됐으면 좋겠다.”
헝가리의 디자인은 4년 전 3명의 여성이 WAMP를 창립하면서 크게 발전했다. 부다페스트에서 매달 열리는 이 디자인 전시회에는 현재 패션·장식미술·그래픽 분야의 디자이너 100여명이 출품한다. WAMP는 또한 현재 매년 2월 국제 디자인 페스티벌을 주최하며 헝가리 미술가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일익을 담당한다.
WAMP는 올 후반 여러 명의 젊은 디자이너를 헬싱키와 런던의 전시회에서 소개할 계획이다. 휘블러는 밀라노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서가를 선보였다. 보관된 책의 수에 따라 형태가 변하는 기능적인 책장이다. 그리고 헝가리 건축가 아론 로손치가 발명한 투명 콘크리트는 건축과 디자인의 주요 소재가 됐다.
발칸 지역의 디자인도 활짝 꽃을 피우는 중이다. 발군의 스타 중 한 명이 주판츠다. 그녀는 레이스와 나비 매듭 등 전통의 여성적인 감각을 전등·소파·테이블에 접합했다. 그녀가 디자인한 가리비 모양 장식의 스칼렛 테이블은 크림 색과 검정색 두 가지로 나온다. 이 파이 껍질 모양의 테이블을 뒤집으면 평평한 표면이 나온다.
발트해 국가들은 디자인 세계에서도 인지도를 높여 왔다. 지난 5월 빌니우스에서 개최된 디자인 주간에는 리투아니아 밖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유어자스 브룬자, 라사 바라딘스키에네 같은 미술가가 참가했다.
한편 탈린은 오는 9월 디자인의 밤을 주최한다. 사실상 여러 곳에서 3일간에 걸쳐 열리는 축제다. 이런 추세라면 이들이 세계 디자인 수도의 전당에서 뉴욕·런던·파리·밀라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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