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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마음을 훔친 남자

여자의 마음을 훔친 남자

레슬리 왝스너가 속옷 사업에 첫발을 들여놓은 30여 년 전만 해도 시장은 정확히 둘로 나뉘었다. 미국 여성들은 대형몰에서 세 개들이 한 세트로 구매한 룸이나 헤인즈, 자키 등의 실용 속옷 브랜드를 주로 입었다.

‘기본 의류’라는 고리타분한 이름으로 불렸던 백화점 란제리 코너는 촌스럽기 그지없었고, 조금이라도 화려한 속옷은 신혼여행처럼 특별한 날에만 입는 옷으로 분류됐다.

레이스 달린 T자 팬티와 가슴을 모아주는 푸시업 브라처럼 요즘 언더웨어와 비슷한 제품들은 입 밖에 내기 민망하다는 취급을 받으며 화려한 깃털 목도리나 도발적인 해적 의상과 함께 ‘프레데릭스 오브 할리우드’ 같은 전문 속옷 매장에서 판매했다.

그러나 리미티드 브랜드의 설립자 왝스너가 파산 직전에 있던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란제리 체인 빅토리아 시크릿을 인수하면서 상황은 변했다.

그는 란제리에 담긴 홍등가 이미지를 씻어내고 패션쇼를 통해 제품을 선보여 란제리를 하나의 패션 상품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미국 여성 대부분이 빅토리아 시크릿 속옷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정도다. 황금 시간대에 방영되는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와 섹시한 TV 광고, 남성들을 설레게 하는 카탈로그, 미국 전역 거의 모든 쇼핑몰에 들어선 매장까지, 왝스너는 “은밀히 감춰져 있던 란제리를 전면에 내세웠다”고 시장조사기관 NPD그룹 선임 애널리스트 마샬 코헨이 말했다.

왝스너는 “빅토리아 시크릿의 비밀을 꺼내 모두에게 보여줬다.” [코헨은 왝스너가 골반 바지나 치마 위로 보이는 T자 팬티를 일컫는 ‘고래 꼬리(whale tail)’ 등의 패션을 유행시킨 장본인이라고 평가했다. “왝스너가 ‘보이는 란제리’를 하나의 유행으로 만들면서 여성들은 자신이 어떤 속옷을 입었는지 보여주고 싶어했다. 속옷은 더 이상 속옷이 아니었다.”]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 본사를 둔 빅토리아 시크릿은 지난 28년 동안 합리적 가격에 어디서든 구매가 가능하며 거부감이 들지 않는 섹시 란제리를 선보이며 극단으로 양분됐던 언더웨어 시장에서 합리적 중간 지점을 찾아냈다. 잠자던 시장을 깨운 빅토리아 시크릿은 2009년 101억5천만 달러에 달하는 매출을 달성했다.

왝스너 회장이 처음 란제리 사업을 시작했을 때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다. 유통 전문가들은 빅토리아 시크릿의 영향으로 백화점이 보다 공격적이며 패션 지향적이 됐다고 말한다. 빅토리아 시크릿의 성공으로 핸키 팬키와 조시 나토리 등의 소규모 브랜드에도 기회가 찾아왔고, 아메리칸 이글 아웃피터와 치코스, 아베크롬비 & 피치와 같은 대형 브랜드가 란제리 라인을 출시하는 계기가 됐다.

이제는 일상 속옷까지도 섹시한 디자인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자키와 헤인즈도 T자 팬티를 선보일 정도다. “언더웨어 제품이 이전보다 훨씬 다양해졌다”고 뉴욕의 마케팅과 소매 컨설팅업체 WSL 스트래티직 리테일의 웬디 리브만 CEO는 말했다. “다른 업체들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압박을 받아 경쟁력을 키워야 할 처지가 됐다.”

올해 73세의 왝스너 회장은 미국 언더웨어 산업을 발칵 뒤집어놓은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조용하고 과묵하며 옷도 매우 보수적으로 입는다(회사의 기반을 다지던 초창기에는 고문 변호사로 오인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30대 중반부터 “인생의 목적”을 찾으려 노력했기 때문인지, 동년배 사업가 중에서도 가장 활발히 자선활동을 한다고 알려졌다.

(1990년대 초반에는 오하이오주 고등교육기금 설립에 2억5000만 달러를 쾌척하기도 했다.) 지금은 젊은 여성용의 속옷을 판매하지만, 자신을 인도했던 “양심의 나침반”을 즐겨 이야기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의외의 모습은 소매업에는 절대 진출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자신의 이름을 딴 의류상점 ‘레슬리’를 운영하는 부모님이 주당 80시간을 넘게 일하면서도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그래서 상점 운영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자라면서 직업이 있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는데, 부모님이 하던 상점 주인보다 더 나은 직업을 갖고 싶었다.

소매업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증오했을 정도였다”고 왝스너 회장은 2003년에 말했다. 결국 왝스너는 로스쿨에 진학했다. 그러나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는 환경에 답답했던지, 쉬는 시간이면 상점이나 진열장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다른 학생들은 야한 그림을 그리거나 여자친구 이름을 끼적거렸는데, 나는 별나게도 상점을 그렸다”).

얼마 안 가 학교를 자퇴한 그는 부모님 상점에서 일을 돕기 시작했고, 드레스나 코트가 가게 수익에 도움이 된다는 아버지 생각과는 달리, 실제 수익에 도움을 주는 효자 상품은 치마나 스웨터, 셔츠, 블라우스처럼 상·하의를 따로 구매하는 전형적 캐주얼 웨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왝스너가 사업가적 통찰력을 발휘해 부모님의 의류상점 이름을 ‘레슬리’에서 ‘레슬리 리미티드’로 바꾸고 상·하의 따로 구매가 가능한 여성 캐주얼 웨어에 집중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아홉 살 때부터 사업가 기질을 발휘했던(초창기 사업은 주로 잔디 깎기, 눈 치우기, 문구나 티셔츠, 장난감 판매였다) 왝스너지만 리미티드 브랜드를 설립했던 1963년의 첫 몇 개월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계속 악몽을 꿨고 스트레스로 위궤양 진단을 받았다. 부모님처럼 아침 7시부터 자정까지 창문을 닦거나 장부를 기입하며 하루 종일 가게에서 일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아이디어가 사업의 판도를 바꿨다. 상·하의 따로 구매를 원했던 여성들은 레슬리 리미티드가 선보인 새롭고 현대적인 방식을 반겼다.

다음해 레슬리 리미티드는 5개 지점으로 확장됐고, 1969년에는 상장을 통해 주식회사로 거듭났다. 그리고 10년 뒤, 300개 지점을 확보한 리미티드 브랜드는 ‘레인 브라이언트’ 등의 다양한 브랜드를 인수해서 키우기 시작했다. 1982년 왝스너는 샌프란시스코로 출장을 갔다가 스탠퍼드 MBA 졸업생 로이 레이몬드가 만든 빅토리아 시크릿 브랜드를 발견했다.

“작은 상점이었고 빅토리아 풍의 분위기였다. 영국 빅토리아 왕조 느낌이라기보다는 붉은 벨벳 소파가 놓인 그 시대 사창가의 느낌이었다”고 왝스너는 말했다. “란제리는 자극적이기보다는 아주 섹시했다. 미국에서는 그런 속옷을 본 적이 없었다.” 수 개월 후, 빅토리아 시크릿이 파산 위기에 몰리자 레이몬드는 왝스너에게 전화를 걸어 인수 의향을 물었다.

왝스너는 바로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빅토리아 시크릿의 4개 매장과 카탈로그를 100만 달러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왝스너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결정이 옳았음을 알았지만, 란제리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고 당장은 경영계획조차 세우기 힘든 처지였다. 레인 브라이언트를 인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신규 브랜드 ‘익스프레스’를 키우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당시 수익을 내지 못했다”고 왝스너는 말했다. “그러나 성공에 필요한 요소는 다 갖췄다. 이 요소들을 새롭게 배합해 보자고 생각했다.” 왝스너는 미혼 남성의 입장에서 생각을 이어나갔다(결혼은 그로부터 10년 뒤에 했다). “내가 아는 여성 대부분이 항상 언더웨어를 입고 대부분은 단순한 속옷보다 란제리를 선호하는데, 제대로 된 란제리 매장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가격대를 선택하고 더 많은 고객에게 다가갈 제품을 선보인다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 왝스너는 빅토리아 시크릿을 콜럼버스의 본사로 옮겼고, 소매 유통에서 얻은 노하우를 브랜드에 접목해서 획일적 디자인 대신 패션과 관련된 갖가지 색상과 소재를 활용한 디자인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다양한 체형에 잘 맞는 디자인을 일관적으로 선보이자 단골 고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브랜드는 전국 지점으로 확대됐고, 카탈로그 고객이 있는 지역에는 규방 분위기의 매장이 개장됐다. “초보적인 마케팅 전략을 활용했는데 효과가 있었다”고 왝스너는 말했다. 왝스너는 브래지어와 탈의실을 매장 앞쪽에서 뒤쪽으로 옮기며 마케팅 전략을 더욱 다듬었다.

(“고객의 벗은 몸을 행인이 보게 되는 어색한 순간들이 있었다”고 왝스너는 말했다. “우리 옷을 입어보려면 나체가 돼야 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했다.”) 매장에서는 항상 클래식 음악을 틀었고, 고객들의 요청으로 매장음악 모음 CD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전설적 슈퍼모델들이 보석 박힌 화려한 브래지어를 입고 깃털 날개를 단 채 무대 위를 당당하게 걷는 빅토리아 시크릿의 유명 패션쇼는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됐다.

1999년 슈퍼볼 경기 중간에 나갔던 뇌쇄적 광고는 방영 직후 수백만 명의 방문자를 빅토리아 시크릿 홈페이지로 불러들였고, 전 세계 100개국 10억 명의 시청자가 쇼를 보기 위해 인터넷에 접속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왝스너는 그동안 외면당했던 시장의 빈 공간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혁신을 시도한 위대한 인물”이라고 코네티컷 뉴케이넌에 위치한 소매유통 컨설팅업체 커스터머 그로우스 파트너의 크레이그 존슨 사장은 말했다. “그는 섹시함을 주류 시장으로 끌어들였다. 천재적이다.”

그러나 45여 년간 리미티드 브랜드와 배스앤바디웍스, 핑크, 라 센자, 헨리 벤델 등의 브랜드 기업 회장 겸 CEO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왝스너는 자신의 업적이 결코 ‘천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창조하지 않았다. 브래지어를 만들지도 않았고 매장을 디자인하거나 브랜드 이름을 만들어 내지도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그저 다른 시각을 지녔을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여성이 가장 일상적으로 입는 패션 아이템을 보는 시각을 바꿔 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천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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