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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아버지 & 변호사·가수 딸 Talk & Talk

CEO 아버지 & 변호사·가수 딸 Talk & Talk

이채욱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과 그의 차녀 이승민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겸 가수가 집 밖에서 만났다. 이 사장은 12년간 글로벌 기업인 GE에서 CEO를 지냈고, 인천국제공항공사에 몸담은 후 GE식 시스템 경영을 이식 중이다. 이 변호사는 국제 중재 업무를 맡고 있는 4년 차 변호사로 2007년 싱글 앨범 ‘All I want to give’를 내며 가수로 데뷔했다. 이은민이라는 예명을 쓰는 그는 지난해 2집을 내면서 로펌 변호사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잘나가는 CEO와 잘 키운 ‘엄친 딸’의 토크는 조선시대 궁중요리 기능보유자인 황혜성의 솜씨를 맛볼 수 있는 서울 가회동 궁연에서 7월 11일 저녁에 있었다.





아버지: 언니와 막내도 그랬지만 넌 참 우리 부부에게 많은 기쁨을 안겨줬다. 세 딸 모두에게서 순간순간 보상을 받았다고 할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네가 열정적으로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건 좋은데, 두 가지 일을 병행하려니 힘들지? 그

래서 처음엔 좀 반대도 했던 거다. 스스로를 혹사하니 건강도 걱정되고. 그런데 묘한 것이 과욕을 부리는 게 아닐까 싶다가도 둘

다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더라. 너야 둘 다 좋아서 하는 일이니 스트레스도 별로 안 받겠지만.



‘한가한 변호사라서 가수도 하는구나’ 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 정말 밤잠 설쳐 가면서 두 일 하는 거예요. 어소시에이트(로펌에고용된 변호사) 4년 차면 아직 배울 게 많죠. 부여된 일을 해결할 때마다 부담감 때문에 마치 피를 토하는 기분이에요. 그래도 두활동을 양립시킬 수 있는 건 변호사 일은 기일이 정해져 있는 반면 음악은 속이 알차게 영글 때까지 숙성시킬 수 있기 때문이죠.서로 사이클이 다르기 때문에 두 가지를 병행할 수 있는 거예요.실은 변호사 일도 굉장히 재미있어요. 장기 계획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으려고 해요. 성격이기도 하고, 세상 일이 계획대로 풀리는 것 같지도 않고요.



아버지 네가 어려서부터 체구가 작아 내가 콩알만 하다고 ‘콩민아’ 하고 불렀잖니? 수영 배울 때도 보면 유난히 뒤뚱거렸지. 실은 민첩해지라고 이름에 ‘민’자를 쓰기까지 했다. ‘변호사 일만으로도 바쁠 텐데’ 하는 생각에 지금도 안쓰러울 때가 많지. 그런데 노래하는 것이 변호사 일에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니? 스트레스가 해소되려나?



음악은 다른 사람과 감정을 공유하는 것인데 변호사도 의뢰인이 겪는 불편과 고통에 대한 감정이입, 남다른 감수성이 필요하죠. 회사 일을 하다 보면 때로는 10시간 이상 서류와 싸움을 해야하는데 이럴 때 음악은 고갈된 에너지를 채워 주죠. 그런가 하면 변호사로서의 직업의식이랄까, 노래를 할 때 너무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 지적 받을 때도 있어요. 고집이

센 성격 탓도 있고요. 제가 못 말리는 B형에 전갈자리잖아요?



아버지 넌 어려서부터 감성적이었지. 사법시험 준비하는 동안에도 눈·비 오는 날 늦은 귀갓길에 용돈을 몽땅 털어 길에서 할머니가 파는 고구마와 딸기를 사오곤 했잖니? 경비 아저씨도 나눠주고. 가족이야말로 그런 존재지. 희로애락, 기쁨도 걱정거

리도 함께 나누는 대상. 가족이라고 하면 행복과 휴식을 떠올릴 수 있어야지.



아버지는 저에게 주석서 같은 존재였어요. 주석서는 복잡한 법률조항에 대해 관련 논문을 모아 놓은 것인데,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판단이 잘 안 돼 아버지한테 가면 늘 모순 없이 설명해 주시고 저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셨죠. 저와 괴리된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슴에 와 닿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제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사법시험 준비 대견스러웠다

아버지 아버지가 법학과를 나오지 않았니? 4학년 때 장학생이 안 돼 군에 입대하고 제대 후엔 가정교사로 학업을 이어가야 했기에 사법시험에 대한 꿈을 접었지. 그런데 독문학을 전공한 네가 뜻밖에 사법시험을 준비한다고 해 대견스러웠다. 법률가야말

로 내가 하려던 일이었으니까. 우리나라 사법시험 제도 자체는 문제가 있지만. 난 한동안 네가 사시 준비 시작한 것도 몰랐다.



막상 시험에 붙고 나니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하셨잖아요? 대학 시절엔 국제문제에 관심이 많아 외교관이나, 아버지처럼 글로벌 기업인의 길을 가고 싶었어요. 그런 일을 하더라도 법을 아는 것이 무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대학 4학년 때부터 시험 준비를 했죠. 국제 문제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지금의 국제 중재 업무로 이어졌고요. 기왕 시작한 일이니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일을 진행할 수 있는 파트너 변호사까지 되고 싶어요. 4년 차 ‘어쏘’(어소시에이트)가 이런 이야기 하면 주변에서 미워할지도 몰라요. 가뜩이나 엄친 딸 소리를 듣는데. 변호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변호사는 의뢰인의 노예일까, 파트너의 노예일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정답은 의뢰인과 파트너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죠.



이 변호사가 사시에 패스하던 해 여름 이 사장은 삼성 입사 동기들과 지리산을 종주했다. 지리산으로 떠나던 날 아침 그는 딸방에 들러 발을 안마해 주면서 “내가 너를 위해 지리산 종주를 하고 오마”라고 했다. 노고단을 출발해 50m쯤 걸었을까, 다리에 쥐가 났다.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 포기하고 싶었지만 아침에 딸에게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길로 하산했다가는 딸이 시험에 떨어질 것 같았다. 동행한 친구들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종주를 마쳤다. 3대에 걸쳐 선행을 베풀었어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의 일출도 구경했다.



아버지를 닮아 저도 열정적이고 욕심이 많아요. 평소 “비행기를 12시간 타야 한다면 그 시간에 눈 붙이지 말고 옆 사람을 베스트 프렌드로 만들라”고 하시지만 저 역시 엘리베이터에서 안면 있는 분을 만나면 두어 마디라도 수다를 떨어야 직성이 풀리죠. 음악에 대한 재능은 성악을 전공한 엄마한테 물려받았지만 아버지를 닮아서 성대가 건강하고요. 음식 안가리고 잘 먹는 것도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경쟁력이죠. 회사 동료들과 철야를 하다 새벽 한두 시면 라면을 먹거나 24시간 배달되는 맥도날드에 햄버거를 주문해요. 그런데 아버지, 라면 좀 그만 드세요.



아버지 네 엄마가 못 먹게 하니까 엄마 없을 때 사위를 끌어들여 라면 파티 여는 거란다. 본래 먹지 말라고 하면 더 먹고 싶어지는 법이지. 지난번 월드컵 때 두 경기를 너희들과 함께 봤지만 나는 이 시대엔 부모와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게 곧 효도라고 생각한다.



저희는 아버지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늘 열심히 사시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어요. 제 휴대전화에 아버지가 ‘압지’라고 입력돼

있는데 압지! 아버지란 자식들에게 어떤 존재인가요?아버지 넓게 친 울타리가 되고 싶었다. 방목을 하듯이, 그 울타리를 넘지 않는 한 마음껏 뛰놀고 뭐든지 해 볼 수 있는 그런 울타리 말이다. 한국의 여느 엄마처럼 네 엄마는 내가 친 울타리 안에서 헌신적으로 너희들을 돌봤지. 도닥도닥, 음식을 만드느라 엄마가 내는 도마 소리를 들으면서 자란 아이들은 반듯하게 크게 돼 있다. 맛과 영양을 사 먹는 음식에 비할 수 없거니와 때로는 따뜻한 밥 먹인다고 엄마가 너희 도시락을 나르곤 했지. 그러면서도 엄마는 너희들에게 ‘해라’ ‘하지 마라’ 두 가지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반면 아버지는 한잔 걸치고 들어가 밤늦도록 공부하는 너희들에게 그만 자라고 했지. 난 안쓰러워 한 말인데 너희들

은 “고수는 아버지”라고 했지. 돌이켜보면 너희 엄마의 새벽기도는 그 자체가 교육이었다.



방목했다고 하시지만 아버지는 울타리를 도시면서 치밀하게 저희를 쪼셨어요. ‘고3 엄마도 고3’이라고, 엄마는 고등학교 시절

부터 사시에 합격하기까지 같이 울고, 웃으면서 시간을 보냈죠.

이 변호사가 사법시험 2차에 합격한 2004년 12월 초 GE코리아 사장으로 있던 이 사장은 주말 골프 약속이 있었다. “축하도 제대로 못 해 줘 미안하다”며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그에게 이변호사가 “오늘 저녁 시간을 내 달라”고 졸랐다. 2차 시험을 마친 딸은 오디션을 거쳐 롯데호텔의 한 바에서 매일 밤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날은 사시 패스로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게 된 딸의 마지막 공연 날이었다. 합격자 발표 전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은 것이다.

그날 저녁 한잔하자는 라운드 멤버들에게 이 사장은 사정을 설명하고 집으로 향했다. 이 사장 내외가 딸의 공연을 지켜보는데 그날 함께 라운드한 어윤대 고려대 총장(현 KB금융지주 회장)이 이화여대 성악과 교수인 부인과 함께 나타났다. 그날 어총장의 제보로 이 사건은 동아일보에 기사화됐다.




딸들이 편한 길 가길 바라세요?

아버지는 열정적으로 사시고 젊은 사람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하시면서 딸들은 왜 편한 길 가기를 바라세요? 그런 마음을 아니까 그때 미주알고주알 미리 말씀을 안 드린 거예요. 아버지 음악을 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박수를 치지. 그런데 남의 영업장에서 노래하고 돈을 받으면 그땐 일이 되는데, 그래서인지 아무래도 보수적이 되더라. 그 무렵 네가 집에서 샤워할 때면 노래를 부르기에 엄마와 나는 스트레스 푸느라고 그러나 보다 했었다. 그게 매일 밤 하는 공연 연습인 줄은 미처 몰랐지. 딸 저 그렇게 치밀한 사람 아니거든요.



아버지 네가 고3, 동생 승은이가 고1 때 아버지가 싱가포르에 주재하게 돼 승은이만 데리고 갔잖니? 당시 연간 200일씩 출장을

다니느라 수업 참관일에 학교에서 오라고 해도 못 갔다. 그때 단둘이 살면서 승은이에게 쇼핑 리스트든 저녁 메뉴든 모두 “네가

알아서 하라”고 했지. 심지어 봉투에 2000달러를 넣어두고 돈이 필요하면 지출 내역을 겉봉에 적어 놓고 꺼내 쓰라고 했다. 그렇게 몇 달 지내고 나니 막내라 의존적이었던 동생이 “아버지, 그건 드시지 말고 이걸 드세요” 하더라. 자녀 교육은 자율성을 키워주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세 딸에게 ‘삼 다리’를 걸치셨어요. 꿀벌처럼 이 딸, 저 딸 찾아다니면서 모두에게 “널 가장 사

랑한다”고 하셨더군요. 의도하신 건 아니겠지만 괜찮은 양육 철학이었어요. 아버지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고 자식에 대한 사랑이야 똑같지. 어느 한 자식에게 “넌 정말 대단해” 하고 말하는 순간그 마음은 진심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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