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함보다는 기능이 먼저!
지난봄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된 풍자극 ‘빌바오 효과(The Bilbao Effect)’에는 에르하르트 슐라밍거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인 그는 자신이 설계한 최첨단 건물의 디자인이 한 여인을 자살로 내몰았다는 스캔들에 휩싸인다. 우쭐대는 말투에 화려한 푸른색 스카프로 치장한 그는 현대 스타 건축가의 상징이다. 한 장면에서는 눈에 거슬리는 그의 건물 모형이 무대에 등장한다. 뾰족한 금속과 날카롭게 각진 플라스틱이 뒤범벅된 그 건물을 보고 한 등장인물은 “마치 근육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토스터(식빵 굽는 기구)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생에서와 마찬가지로 코미디에서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이 연극에서 풍자하고자 한 ‘빌바오 효과’(1997년 스페인 빌바오에 프랭크 게리가 지은 구겐하임 미술관이 큰 성공을 거둔 뒤 건축계에 불어닥친 화려한 대형 건물 건축 붐을 말한다)는 이제 끝나 간다. 인상 깊고 상징적인 건축물을 이용해 어떤 도시나 기관, 또는 부동산 개발사업을 홍보하려는 이 현상은 1990년대 말에 시작돼 2008년 경기침체로 끝난 호황의 산물이다.
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 회복되기 시작한 지금 미국과 유럽의 건축계에는 호화롭고 눈길을 끄는 디자인 대신 좀 더 섬세하고 새로운 미학적 기준이 자리 잡아 간다. 요즘 건축학적 가치관은 거창하고 화려한 디자인에서 효율적이고 기능적인 디자인 쪽으로 변화하는 추세다. 혁신과 실험의 방향이 갈수록 지속가능성과 신기술 쪽으로 기울어 간다. 비영리 단체인 뉴욕 건축가연맹의 로잘리 제네브로는 “특히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은 호화로운 건물을 공룡처럼 여긴다”고 말했다. 또 건축가들이 도시계획과 대중을 위한 공간 창조에 눈을 돌리면서 공동작업이 늘어나는 추세다. 다음 10년 동안 새로운 건축물들이 어떤 형태를 띨지 아직은 확실치 않다. 하지만 경기침체 이후 신선한 발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뉴욕의 건축사무소 로저스 마블의 롭 로저스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의 경향은) 마치 강요된 다이어트와 같다. 비용을 줄이고 새롭게 성장할 방법을 모색하면서 우리가 하는 일을 전반적으로 되돌아보게 됐다. 건강하고 창조적인 문제 해결 방식이다.”
경기침체 이전에 시작된 프로젝트에서부터 그런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뉴욕 휘트니 미술관은 증축 설계를 맡긴 렌조 피아노에게 비용 절감 차원에서 간소한 디자인을 요청했다.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역시 헤어초크 & 드 뫼롱 건축사무소의 새 증축 계획에서 유리로 된 복잡한 디자인의 돌출 부위를 삭제하는 등 디자인의 간소화를 요청했다. 또 다른 새 프로젝트들도 규모와 경비를 줄이는 간소화 추세를 반영한다. 7월 재개관된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미술관은 이번 보수·확장 공사에서 관람객의 감각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으면서 풍요로운 경험을 제공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제임스 카펜터가 디자인을 맡은 이 프로젝트는 기존의 미술관 시설을 사려 깊게 재구성하고, 편의시설을 수용할 새 유리 건물 세 동을 추가했다. 정원을 지나 새롭게 단장한 미술관으로 이어지는 서늘하고 햇빛이 잘 드는 통로도 마련됐다.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들도 절제된 디자인을 선보인다. 피아노는 최근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 있는 킴벨 미술관의 증축 건물 디자인을 발표했다. 그는 루이스 칸이 디자인한 기존 미술관의 현대 고전주의를 존중해 절제된 우아함을 특징으로 하는 디자인을 채택했다. 시대정신을 읽는 능력이 뛰어난 네덜란드의 수퍼스타 건축가 렘 쿨하스(OMA 건축사무소)는 상자 모양 디자인의 장점을 역설한다. 그는 자신이 디자인한 댈러스의 와일리 극장을 예로 들었다. 실험 정신을 건물의 외형이 아니라 내부의 최첨단 극장 시설에서 발휘했다는 설명이다. “건물의 단순한 디자인을 아쉽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그는 말했다.
건축주들도 눈길을 끄는 상징적 디자인을 피하는 추세다. 일례로 신시내티 미술관은 얼마전 네덜란드의 건축사무소 네우텔링스 리다이크에서 진행하던 증축 계획을 중단했다(신시내티에는 이미 자하 하디드가 디자인한 아트센터가 도시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또 캘리포니아주의 버클리 미술관은 일본 건축가 이토 도요(伊東豊雄)가 설계한 파격적인 디자인의 증축 계획을 자금 부족으로 취소했다. 그 대신 오래된 인쇄소 건물을 개조해 새 전시 공간으로 사용할 계획이다. 올림픽 같은 세계적인 행사는 그동안 현란한 건축 디자인의 산실이 돼왔다. 하지만 비교적 수수한 경향을 보이는 2012 런던 올림픽 시설 중 국제적인 스타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은 하디드의 아쿠아틱스 센터 단 하나뿐이다. 이 건물은 파도처럼 물결치는 환상적인 지붕이 특징이다. 경기 시설 대다수가 임시 건물이며 실용성에 중점을 뒀다. 하지만 2012 런던 올림픽 경기장의 디자인 고문인 런던 정경대의 도시학 교수 리키 버데트는 이렇게 말했다. “19세기 역시 검약이 강조되던 시대였지만 공학의 발전이 눈부셨다. 멋진 교량과 환상적인 기차역들이 건설됐다.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멋지고 용도에 적합한 건물을 짓는 게 관건이다.”
2012 런던 올림픽의 건축 계획에서 높이 살 만한 점은 영국 정부가 단지 2주일 동안 세계 TV 시청자들에게 보여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도시의 미래를 생각해 93억 파운드를 투자한다는 사실이다. 올림픽이 끝나고 나면 런던 동부 빈민가에 사는 수천 명의 주민이 공원과 편의시설, 새 주거지 등으로 이 시설물들을 이용하게 된다. 현재 세계 최고의 건축가 대다수가 이와 유사한 도시개조 사업에 참여한다. 고가의 아파트 등 기발한 디자인의 고층건물들을 원하는 개발업자의 요구에서 벗어나 도시 전체를 생각하는 마스터 플랜 설계에 참여하는 건축가가 늘어난다.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는 불가리아 소피아에 제2의 시티 센터를 설계했다. 또 스위스 로카르노 기차역 주변의 신시가지와 이탈리아 살레르노의 새 문화지구도 설계했다. 물론 이런 도시계획에는 야심 찬 건축 계획들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경제가 어려울 땐 우선 설계부터 시작해 놓고 비용이 많이 드는 건축은 나중으로 미루면 된다. 하지만 여러 개의 마스터 플랜에 참여 중인 쿨하스는 “고객들이 도시계획에 중점을 두는 이유가 꼭 경제적인 데만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가치관의 차원에서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도시계획은 투자의 이상적인 형태다.” 이런 계획은 사회·경제·정치적 요소를 모두 고려한다. 지리적 특성과 교통, 대중을 위한 공간 등이 고려 대상에 포함된다.
더욱 심각해지는 환경문제도 거시적 차원의 건축으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요인이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시간이 많은 젊은 건축가에게 미래에 대비하는 설계 작업을 맡겼다. 미술관 측은 지구온난화 탓에 해수면 상승으로 뉴욕시 일부가 물에 잠기게 될 경우에 대비한 설계 계획을 다섯 팀에 의뢰했다. MoMA에서 ‘높아지는 해수면(Rising Currents)’이라는 제목으로 전시 중인 이 계획들은 아무리 작은 규모의 건축이라도 여러 분야의 협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협업은 현대 디자인 문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이런 특징은 특히 젊은 세대에게서 두드러진다. MoMA의 전시회에서 ARO와 드랜드스튜디오 같은 팀들은 맨해튼 남부가 물에 잠길 경우에 대비한 설계를 하려고 건축가와 조경전문가, 도시계획가, 공학자들을 동원했다. 버데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머리를 모으다 보면 어떤 한 건물만 생각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도시 전체의 구조와 각 구조물의 상관관계가 고려돼야 한다.”
스타 건축가들도 협업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이런 경향은 지난달 도쿄 SANAA 건축사무소의 세지마 가즈요(妹島和世)와 니시자와 류에가 프리츠커 건축상을 받았을 때 세지마의 수상소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사사키 앤 파트너스 같은 공학 전문업체의 도움이 없었다면 공기보다 가벼워 보이는 디자인의 창조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스위스 로잔에 새로 문을 연 롤렉스 러닝센터(마치 굽이치는 언덕처럼 바닥의 높이가 일정치 않은 단층 건물) 같은 독특한 건물들은 뛰어난 공학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환상에 불과했다. 프리츠커상은 여전히 스타 건축가들에게 돌아가지만 갈수록 위상이 높아지는 아가 칸 건축상은 유명 건축가와 상징적인 건축물들을 외면한다. 올해 결선에 오른 작품 중 다수가 이슬람 세계의 오지에 숨어있는 작품들이다. 중국의 한 학교 건물과 터키의 직조공장 건물도 포함됐다.
하지만 호화로운 건축 디자인의 경향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듯하다. 아시아 경제대국 다수가 여전히 호황을 누리고, 특히 중국은 눈길을 끄는 건축물을 선호한다(‘새둥지’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눈길을 끌었던 2008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은 올림픽이 끝난 뒤 싸구려 소매 상점들의 집합소로 전락해 정체성의 위기에 처했지만 말이다). 또 아부다비와 카타르에서는 게리와 하디드, 장 누벨 등 스타 건축가들의 호화로운 디자인이 돋보이는 문화 프로젝트들이 진행 중이다. 그리고 미국 서해안에서는 두 개의 현대 미술관이 유명 건축사무소들을 디자인 경쟁에 참여시켰다. 엘리 브로드(자선사업가 겸 미술품 수집가)의 컬렉션을 전시할 로스앤젤레스의 미술관 건축과 갭의 창업주인 도리스와 도널드 피셔의 컬렉션 전시를 목표로 한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의 증축 계획이다. SFMOMA의 작업에는 딜러 스코피디오 + 렌프로, 아자예 어소시에이츠, 스노헤타, 포스터 + 파트너스 등이 경쟁에 참여했고, LA 미술관 작업에는 딜러 스코피디오 + 렌프로 외에 6개 업체가 참여했다. 주변의 도시 환경을 배려하고 전시될 미술품에 경의를 표하는 디자인을 제안한 업체들이 선정될 가능성이 크다.
창의력이 뛰어난 스타 건축가들은 눈길을 끄는 건축물을 계속 창조할 듯하다. 호황기와 그 시대의 산물인 과감한 실험정신을 무시하긴 쉽지 않다. 런던의 건축사무소 포린 오피스의 알레한드로 자에라-폴로는 그 시절을 돌이키며 “민간과 공공 부문의 고객 모두 그토록 혁신적인 건축을 추구하는 시대를 우리가 사는 동안 다시 보게 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호황기의 혁신적 건축 경향이 낳은 결과물 중 일부(예를 둘만 들자면 LA에 있는 게리의 디즈니 홀과 쿨하스의 시애틀 도서관)는 매우 훌륭하다. 하지만 스타일만의 혁신은 가치가 없다. 의미 없이 외형만 거창한 건축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현대 생활의 복잡성을 책임감 있게 반영하는 사려 깊은 디자인이 나와야 하는 시대다.
번역·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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