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 잘 드는 곳엔 병실 그늘진 데는 의사 방
햇볕 잘 드는 곳엔 병실 그늘진 데는 의사 방
경영에도 명의가 있을까. 가천길재단 이길여 회장을 ‘성공한 CEO’로 표현하는 것은 다소 어색한 면이 있다. 그는 이렇다 할 기업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윤보다 공공성을 내세우는 의료법인과 학교법인, 그리고 지역 언론사가 그의 얼굴이다.
경영 전문가도 아니다. 반평생 의사 가운을 입었고, 지금도 환자를 보면 가슴 아파하는 의사다. 그럼에도 그가 만든 가천길재단의 사회적 위상과 영향력은 대단하다. 포브스코리아가 선정한 ‘2010 한국의 파워 우먼’을대표할 만하다.
몸에 새겨진 이타 DNA1958년 이길여 회장은 인천 용동에 자성의원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한 층이 8평에 불과한 2층 목조건물이었다. 그런데도 환자는 넘쳐났다. 의료시설이 매우 부족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독특한 진료 스타일이 환자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늘 청진기를 가슴 안쪽에 품고 다녔다. 차가운 금속이 환자의 가슴에 닿을 때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입원실에선 환자를 포옹하듯 안아 일으킨다. 환자의 체온과 심장 박동을 느끼면서 스킨십을 통해 교감을 이룬다. 겨울에는 난로 위에 항상 따뜻한 물을 준비하도록 했다. 산부인과 환자 내진 시엔 그 물로 손을 데웠다.
그에게는 세 가지 진료 원칙이 있다.
첫째도 봉사, 둘째도 봉사, 셋째도 봉사다. “햇볕이 잘드는 창가에 의사 방을, 그늘진 곳에 병실을 만든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병실은 환자가 가장 좋아하는 위치에, 화장실은 환자가 불편하지 않도록 널찍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시설·장비·서류도 환자들이 쉽게 알아보고 사용할수 있어야 하죠. 지난 50년간 지켜온 원칙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환자 사랑은 본능에 가까웠다. 환자에게 불편을 끼치면 어떤 사람도 불벼락을 면치 못했다. ‘실력 있는 여의사, 친절한 병원’으로 소문 나면서 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당시 이 회장의 가장 큰 소망은 예쁜 잠옷을 입고 숙면을 취하는 일이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분만 환자로 잠을 잘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의 장롱 속엔 아직 한번도 입어 보지 못한 잠옷이 있다고 한다.
자성의원 개원 20년 만인 1978년 느닷없이 의료법인을 설립했다. 의료법인은 병원에서 나온 이익을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공익을 위해 병원 이익을 몽땅 쓰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주위 사람들의 만류가 잇따랐지만 그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여성이 설립한 최초의 의료법인이 탄생한 것이다. 공익성과 사회성을 강조한 가천길재단의 뿌리인 길의료재단은 이렇게 싹을 틔웠다.
“아무리 유명한 개인병원이라도 오너가 죽으면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하지만 법인이 되면 설립자가 없더라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개원한 지 얼마 안 돼 목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병원 평판은 더없이 좋았다. 성공은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1964년 불현듯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더 큰 행보를 위해 현재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뉴욕의 대형 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으면서 미국의 풍요와 선진 의료에 매료됐다. 그런 한편으로 그의 뇌리에서는 고통 받는 고국의 환자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에 남으라는 만류를 뿌리치고 68년 귀국길에 올랐다.
4년 만에 돌아온 그는 자성의원 주변 땅을 더 사들여 지하 1층·지상 9층 규모로 건물을 지었다. 당시 흥미를 끌었던 두 가지 사건이 있다. 하나는 건물에 엘리베이터를 만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장초음파기를 사들인 것이다. 당시 인천 지역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곳은 올림푸스호텔 한 곳밖에 없었다. 이를 타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릴 정도로 세인의 관심을 끌었고, 인구에 회자됐다. 마케팅이 절로 된 것이다.
태아 건강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초음파기 역시 환자들에게인기를 끌었다. 태아의 박동 소리를 듣는 산모와 보호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충성 고객이 됐다. 그 후로도 이 회장은 첨단의료 장비를 사들이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첨단 장비로 정성 들여 대하면 자연스레 환자들이 몰려든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 병원이 생기면 꼭 가본다. 안 되면 사람을 보내 시설과 시스템을 꼼꼼하게 알아본다. 벤치마킹일 수 있지만 실은 직원 교육의 일환이다. 인천국제공항이 문을 연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직원들을 단체로 인천공항에 보냈다. 의아해하는 직원들에게 그는 “공항시설이 최첨단이라고 하니 우리 병원에 도입할 게없나 한번 둘러보고 오세요. 화장실도 가 보고, 어쨌든 보면 배울 게 있을 거예요”라고 권했다.
조직의 진화는 교육에서 승부가 난다. 그는 성공을 유보한 채 미국 유학길에 오르고,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개원 도중 일본으로 건너갔다. 교육 효과를 누구보다 절실하게 체험했다. 유학에서 돌아올 때마다 선진 시스템으로 무장한 새로운 병원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어떤 변화든 리더 혼자서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무작정 발전 방안이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한다고 해서 절로 나올 수 있는 건 아니다. 선진 시스템도보고, 사회의 발전 방향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1987년 중앙길병원(현 가천의대 길병원)이 문을 열었을 때부터 그는 의사들에게 해외연수를 적극 권장하고 지원했다. 해외대학·병원들과 자매결연도 맺었다. 중앙길병원을 지을 때는 컴퓨터 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해 분야별로 직원들을 대만 등으로 파견했다. 이렇게 해서 국내 최초로 컴퓨터를 이용한 진료 시스템이 도입됐다.
“병원이든 학교든 진화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진화는 변화이고 발전입니다. 그래서 늘 어떻게 변화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교육은 그래서 필요합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그의 교육관은 학교 설립으로 구체화됐다. 그는 유능한 의료인의 공급까지 책임질 때 의사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1994년 운영난을 겪고 있던 신명학원(경기전문대, 신명여고)을 인수했고, 이후 경기전문대학을 키워 간호사 수습의 물꼬를 텄다. 우여곡절 끝에 1996년 12월 의과대학 설립가인가를 받아 1998년 20년간 꿈에 그리던 가천의대 개교로 이어졌다.
사람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그의 ‘사람 욕심’은 유명하다. 병원과 학교에는 직접 찾아가 영입한 인재가 한둘이 아니다. 세계적 연구성과를 내고 있는 뇌과학연구소의 조장희 소장이나 ‘이길여 암·당뇨연구원’의 김성진박사도 삼고초려의 결과다. 그는 사람을 볼 때 능력이 특출하면 다른 소소한 것은 따지지 않는다. 주변의 반대도 무릅쓴다. 조장희 박사를 영입할 때도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그가 요구한 까다로운 연구환경을 다 맞춰주겠다며 설득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세계적 경쟁력이 있는 연구 인력이다. 연구 능력이 탁월하다면 다른 건 문제없다”며 성사시킨 것이다.
세계 수준의 뇌과학연구소와 암·당뇨연구원 가동, 국내 최대 규모의 바이오 클러스터 ‘BRC(Bio Research Complex)’ 사업 착수, 11월 개원하는 암센터 등 길재단이 국내에서도 굵직한 연구 및 임상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은 인재를 찾고 양성해 온 노력 덕분이다.
대표적 예가 심장 분야 명의인 신익균 가천의과대 부총장이다. 이 회장은 그를 초빙해 1995년 당시로는 큰돈인 200억원을 투자해 심장센터를 만들었다. 인력도 충원하고, 해외연수도 지원해 심폐 동시 이식수술 등 여러 차례 국내 최초 수술을 성공시켰고, 이곳은 지금도 길병원에서 SCI급 논문을 가장 많이 내는 곳이 됐다.그는 경원대 총장이 된 뒤에도 단 한 건의 인사청탁을 받아들이지 않은 걸로 유명하다.
대학교수 인사도 상시채용 제도를 채택해 소위 ‘라인’을 없앴다. 1998년 경원대를 인수한 뒤 이 회장은 학교 혁신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2002년 총장에 취임하고는 혁신을 진두 지휘했다. 건물과 시설투자 등 하드웨어를 변화시키는 것은 돈과 의지만 있으면 가능했지만 인적 자원을 변화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특히 어려웠던 것이 교수사회의 변화였다. 2007년 그는 교수들에게 파격적 제안을 했다.세계 3대 과학저널인 사이언스·네이처·셀의 표지에 논문이 게재되면 최고 5억원의 포상금을, 내지에 실리면 1억200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제시했다. 게다가 해당 교수는 특별 승진까지 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포상금은 당시 경북대가 가장 많아 1억원 수준, 연세대나 고려대도 2000만원 정도에 불과했다. 이 포상금 제도는 이 회장이 경원대 교수 사회에 강력한 변화를 요구한 ‘충격요법’이었다.
이른바 ‘10% 긍정의 변화전략’이다.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10%가 나머지를 견인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개혁 마인드가 있고, 오로지 연구와 교육에 열정적인 인물이 50명에서 100명만 되면 이들의 새로운 기운이 낡은 문화를 바꿀 수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젊고 유능하며, 국제화된 교수를 채용 할 생각입니다. 인재풀이 벌써 600명을 넘었어요.”
국내 10대 사학을 넘어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대학으로 나아가기 위해 경원대는 ‘G2·N3’라는 목표를 갖고 있다.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2개 학과와 국내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3개 학과를 목표로 경쟁력을 갖춰 나간다는 것이다. 이 또한 10% 법칙에 해당한다.
복은 베풀면 따라온다그는 돈을 좇지 않는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많이 열리면 길은 저절로 만들어진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개원 초기 돈이 없는 환자에게 치료비를 받지 않았더니 미역이며 생선, 곡물을 가져와 병원에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이를환자들에게 다시 베풀었다. 그 옛날 이 회장이 받았던 아이가 커 다시 아이를 낳으러 길병원을 찾는다. 한번 맺은 인연으로 대를 이어 환자를 받는 것이다.
“내가 돈을 쓰는 우선순위는 인재 양성이고, 환자 치료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 식구(직원)입니다.” 그는 용산에 있는 동네 미용실을 20년째 단골 삼아 다닌다. 스타킹도 구멍이 나면 매니큐어로 때워 신는다. 이런 사람이 수백억, 수천억원이 들어가는 기초과학 발전을 위해선 돈을 아끼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문화발전 기부도 열심이다. “돈은 자신이 품위를 유지할 만큼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 이상은 액세서리죠.” 기업 환경이 바뀌어도 ‘착한 기업’이 장수하고 성장한다는 것을 그는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약대 정원 증원안을 발표했다. 이후 약대를 유치하기 위한 대학들의 기싸움이 치열했다. 미래 바이오산업을 이끌 인재 양성기관으로 대학 발전의 엄청난 동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7년간 952억원에 이르는 투자계획과 1만4870㎡의 약학관 설치, 파격적 연구보조금과 장학금, 생활지원금 계획을 마련했다. 여기에 이색적인 자료가 첨부됐다. 백령도와 강화도를 포함한 인천 주민 2225명의 약대 유치 청원서였다. 평생 계속해온 무료 진료와 봉사, 적자가 나는 것을 알면서도 양평·백령도·철원 등에 병원을 지어 무의촌 지역 주민에게 치료 기회를 제공한 것에 대한 주민들의 보답이었다.
그가 사회공헌 활동에 쓴 돈은 지금까지 30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혜택을 받은 사람이 줄잡아 10만 명은 넘을 것으로 재단 측은 추산한다.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메세나 활동도 뒤지지 않는다. 2005년엔 국내 500대 기업 중에서 삼성문화재단, LG연암문화재단에 이어 셋째로 많은 메세나 활동을 했다. 가천문화재단은 2003년 10월 단체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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