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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의 양키들

리버풀의 양키들

▎지난 10월 블랙번 로버스와의 경기에서 공중볼을 다투는 리버풀의 페르난도 토레스.

▎지난 10월 블랙번 로버스와의 경기에서 공중볼을 다투는 리버풀의 페르난도 토레스.

최근의 어느 일요일 리버풀 앤필드 구장의 콥 구역(콥은 1900년 전후 영국과 트랜스발 공화국 간에 벌어진 보어전쟁 중 리버풀 출신 병사가 다수 사망한 전쟁터에서 따온 이름이다). 리버풀 축구클럽의 열혈 팬 1만2000여 명이 일어나 일제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상당수 스포츠 경기 전에 흔히 듣는 애국적이면서도 조잡한 가사의 판에 박힌 불협화음이 아니었다. 음정의 높낮이가 정확하고 우렁찬 남성들의 합창이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그 유서 깊은 경기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다수의 같은 악기 소리를 동시에 녹음하는 방식인 ‘소리의 벽(Wall of Sound)’ 발명자는 필 스펙터가 아닌 바로 이들 리버풀 팬이었다.

리버풀 팬들은 50년 가까이 홈경기가 열리기 전에 언제나 이 노래를 불렀다. 이 곡은 리버풀 출신의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가 작곡한 머지사이드주(주도 리버풀) 표준 응원가가 아니라 원래 1945년께 두 미국인이 작곡한 뮤지컬 곡이다. 11월 초의 그날 오후 홈팬들의 합창은 평소보다 더 열정적이었다. 리버풀이 최대의 라이벌인 인기 구단 첼시를 물리치려면 두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지만 팬들은 이미 승리를 떼어놓은 당상으로 여겼다. “나아가라, 나아가라, 가슴에 희망을 품고.” 그들은 우레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결코 당신 홀로 걷지 않으리, 홀로 걷지 않으리.”

한 가지 의문이 있다면 그 팬들이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에게 그랬던 만큼 헨리와 워너를 사랑하게 될지 또는 얼마 전 힉스와 길렛에게 그랬듯이 그들을 내칠지의 문제였다.

혹시 저간의 구단 소식을 모를까 봐 덧붙이자면 보스턴 레드삭스의 구단주인 존 W 헨리와 톰 워너가 10월 중순부터 리버풀 축구클럽의 구단주가 됐다. 이들은 다른 두 명의 미국인 톰 힉스와 조지 길렛,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코틀랜드 왕립은행의 채권단으로부터 2억9400만 달러에 이 구단을 인수했다. 힉스와 길렛을 지원하려는 낌새만 보이면 누구든 대대적인 가두시위, 광고판, 보이콧, 동영상으로 공격하며 힉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터넷 테러’를 벌이는 탓에 그들은 도리 없이 두 손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이제 헨리와 워너가 잉글랜드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구단 하나를 떠맡게 됐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신선한 자극제가 됐다. “두 달 반 전만 해도 나는 축구의 축자도 몰랐다”고 헨리가 말했다. 그는 영국 프리미어 리그 5개 팀의 이름을 대지도 못하고 ‘오프사이드’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영국 팬들은 이들이 전혀 낯설지 않다. 미국인이든 러시아인이든 아랍인이든 외국인 구단주는 이제 미드필더와 스트라이커만큼이나 축구의 한 부분이 됐다.

세계화의 시대에 돈 많은 갑부가 다른 나라의 구단을 인수하는 일만큼 자연스러운 현상이 또 있을까?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축구만큼 인수하기에 좋은 스포츠가 또 있을까? 그리고 축구팀을 인수하기에 영국보다 좋은 나라가 또 있을까? 이 나라는 가장 유명한 축구클럽이 즐비할 뿐 아니라 현지의 부호들은 직접 인수자금을 조달하기엔 너무 가난해 보인다.

분명 미국 스포츠에도 외국인이 진출했지만(농구에 유럽인, 야구에 북중미인과 일본인) 대부분이 선수들이었다. 구단주의 경우엔 미국이 변함없이 순수출국이다. 선의의 인수자라면 현지의 팬들도 문제 삼지 않는다(예를 들어 미국 미식축구팀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의 랜디 러너는 2006년 이후 소리 소문 없이 영국 축구팀 애스턴 빌라를 소유해 왔다). 그러나 외국인 구단주가 공정하든 공정하지 않든 구단에 투자는커녕 돈을 뽑아간다는 인상을 줄 때는 거의 예외 없이 분노가 폭발한다.

첫째 사례가 막강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뿐만 아니라 미식축구팀 탬파베이 버캐니어스)의 구단주인 글레이저 가문이다. 그들의 위태로운 자금사정이 유나이티드 팬들을 낙담하고 분노케 했다. 둘째와 셋째 사례는 힉스(텍사스 레인저스 전 구단주)와 길렛(아이스하키팀 몬트리올 커내디언스의 전 구단주)이다. 구장을 새로 짓고 구단의 빚을 떠안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두 사람은 순식간에 리버풀에서 악당이 되고 말았다. 종국엔 힉스의 아들이 동네 선술집에 들어가기도 너무 무섭다고 여길 정도가 됐다. 극도로 흥분한 스카우저(리버풀 주민의 별명)들이 그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헨리와 워너는 그들보다 더 못하지는 않을 성싶다. 그러나 대표 구단주로 불리는 헨리는 여전히 남아 있을지 모르는 우려를 불식하려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는 클럽의 역사를 완벽하게 숙지했고 리버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간주되는 케니 댈글리시를 만나기 전에 그의 자서전을 통독했다. 클럽 인수 뒤 며칠 만에 새 구단주들은 팀 운영진, 선수들, ‘섕클리의 정신’을 포함한 팬 그룹을 만났다. 신성시되는 빌 섕클리 감독의 이름을 딴 이 팬 그룹은 4만 명의 열성팬으로 이뤄졌다. 섕클리는 레넌과 매카트니가 음악에 혁명을 일으켰듯이 리버풀 축구를 혁명적으로 바꿔놓았으며 리버풀에선 비틀스보다 더 존경을 받는 듯하다. “일을 그르치면 상당한 위협을 느낀다”고 헨리가 말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우리가 떠난 뒤에도 팬들은 남는다. 이 구단이 정말로 누구 소유인지 망각해서는 안 된다.”

새 구단주들이 팀의 부채를 덜어줬을 뿐이지만 그 뒤 리버풀 구단 안팎에서 사기가 오르고 시즌 초반의 57년래 가장 극심한 부진에서 벗어나며 경기성적도 좋아졌다. “그들은 클럽에 큰 도움을 줬다”고 로이 호지슨 리버풀 감독이 말했다. “그들은 돈보다 축구를 중시하고 마법의 지팡이를 휘두르면 금방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헨리는 힉스에 비해 또 다른 이점을 누린다. 힉스는 전임 구단주들 중 눈에 띄는 활동을 더 많이 한 탓에 욕도 많이 먹었다. 텍사스 출신으로 조지 W 부시와 가까운 힉스는 30년 동안 보수파를 국회의원은커녕 시의원으로도 뽑아주지 않은 까칠한 노동자계급 지역에서 개밥에 도토리 신세였다. 반면 헨리는 민주당에 기부금을 낸다. 플랫 아이언, 트웰프스 맨 등 앤필드 인근의 선술집에선 아직도 미국인이라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풍조가 남아 있다. 그러나 미국인 구단주를 받아들여야 한다면 보스턴 레드삭스의 구세주보다 나은 인물이 또 있을까?

유서 깊지만(그리고 아일랜드계가 많다) 갈수록 주변으로 밀려나는 도시. 명문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좌절을 겪은 팀. 낡고 좁은 경기장의 헌신적이고 축구 전문가에 가까운 해박한 지식을 갖춘 팬들. 어떻게 보면 레드삭스를 운영하는 헨리와 구단 회장을 맡게 될 워너에게 리버풀은 낯설지 않은 전설이다(61세의 헨리는 원자재 거래로 부를 쌓았고 60세의 워너는 코스비 쇼와 로잔의 제작에 참여한 TV 프로듀서다). 그러나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레즈(같은 리버풀 연고의 라이벌인 에버튼의 ‘블루스’와 구별해 부르는 용어)’와 레드삭스는 다른 길을 걷는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역사적인 배경이다. 앤필드의 트로피 룸에 보관된 우승컵들이 말해주듯 최근의 몰락 이전까지 리버풀은 잉글랜드뿐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성공적인 축구팀으로 손꼽혔다. 그들의 기록은 굳이 비교하자면 양키스에 더 가깝다. 또 다른 점은 팬들의 열성이다.

런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다소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리버풀은 스스로 “영국의 주류에서 밀려난” 변경으로 여긴다고 리버풀팀의 역사를 다룬 책을 저술한 레스터대 존 윌리엄스가 말했다. 또 누군가는 그 도시를 ‘그들만의 수도’라고 부르기도 했다. 잉글랜드가 월드컵에 출전할 때 리버풀의 주요 관심사는 대표팀의 우승보다 리버풀 소속 선수들이 부상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는 일이다.

리버풀의 팬들에 비하면 보스턴의 팬들은 문학소년처럼 얌전해 보이며 펜웨이 파크 야구장은 윔블던 테니스장만큼이나 조용하다. 수많은 리버풀 광팬은 떼를 지어 맨체스터, 런던, 심지어 로마나 이스탄불까지 몰려다니지만 레드삭스 팬들이 클리블랜드나 디트로이트까지 팀을 따라다니는 일은 별로 없다. 또한 리버풀 팬은 상당수가 좋아하는 선수의 이름을 따서 외동아들의 이름을 짓는다(선술집 플랫 아이언에서 첼시 경기를 준비하던 크리스 글래드먼이 그랬다). 레드삭스 팬에게 ‘비극’은 경기장과 구단 사무실에서의 몇 가지 유명한 실책을 의미한다. 가령 베이비 루스를 다른 팀에 팔아넘기거나 흑인 선수는 계약하지 않았던 터무니없는 실수 말이다. 반면 리버풀은 1989년 힐스버러 경기장의 붕괴로 96명의 팬이 압사하는 진짜 비극을 겪었다. 경기장 앞에는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 옆에 희생자의 이름이 모두 적힌 명판이 세워졌다. 그 아래에는 늘 싱싱한 꽃이 놓인다. 경찰의 무능이라기보다 훌리건들 탓이라는 영국 타블로이드지 더 선의 비난(사실무근으로 드러났다)은 현지인들의 반감만 더 키웠다. 따라서 힉스가 더 선의 소유주 루퍼트 머독과 가깝다는 인상을 주는 점도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런 충격적 사건이 ‘홀로 걷지 않으리’라는 노래에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이 곡은 또 다른 현지 밴드 게리 앤드 페이스메이커스가 1963년 녹음한 뒤 앤필드에서 처음 불렸다. 팀의 문장(紋章)에도 그 가사가 새겨졌다. 지난 10월에는 헨리의 요청으로 게리 마스던이 직접 앤필드를 방문해 그 노래를 감동적으로 불렀다. 레드삭스 팬들이 무슨 연유에선지 모르게 경기 때마다 8회말 전에 부르기 시작한 ‘스위트 캐롤라인’은 그에 비하면 휴대전화의 벨소리처럼 들린다.

어떻게 보면 보스턴에 두 차례 월드 시리즈 우승을 안겨준 헨리와 워너 덕분에 레드삭스 팬들도 양키스 팬들처럼 조급하고 화를 잘 내고 요구가 많아졌다. 그리고 피해망상증도 약간 생겼다. 일부는 칼 크로포드 같은 자유계약 선수를 붙잡아두거나 애드리언 벨트레 같은 선수와 재계약하는 데 들어갈 돈이 이제 분명 해외로 빠져나간다고 확신한다. “조지 스타인브레너(전 뉴욕 양키스 구단주)라면 월드 시리즈 우승에 신경 쓰지 않고 유럽 축구팀을 인수하려 하겠는가?” 얼마 전 보스턴 글로브의 웹사이트에 실린, 구단주들을 비난하는 내용의 포스터다.

그러나 리버풀 팬들은 최근 여러 차례 분노를 표출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차분한 면이 있다. 수 세기 동안이나 실망과 굴욕을 더 많이 경험한 덕분에 그들은 스포츠와 삶의 변덕을 이해하는 듯하다. 그리고 더 자신만만하다. 섕클리와 코칭 스태프가 앤필드의 창문도 없는 회의실에서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팀을 짜맞췄던 1960년대부터 그들은 자신들의 팀이 상대 팀보다 더 투지 넘치고 기량이 뛰어나다고 여긴다. “우리는 레드삭스가 필요하지 않고 그들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섕클리의 정신’의 키스 컬빈이 말했다.

사실 헨리와 워너가 해야 할 일들이 있다. 펜웨이 파크의 경우처럼 앤필드를 확장할지 완전히 대체할지 결정해야 한다. 시의 재정이 부족한 데다 구장의 수용인원이 4만5000명밖에 안 돼 수입이 늘지 않는다. 이 문제는 분명 그들이 해결 가능하다. 앤필드에는 그린 몬스터(펜웨이 파크 왼쪽 담장의 녹색 칠한 구역)처럼 눈길을 끄는 구조물이 별로 없다. 1892년의 원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구장을 신축한다면 바로 인근에 지어야 한다. 섕클리, 밥 페이슬리, 빌리 리들 등 리버풀이 낳은 전설적인 영웅의 영혼이 멀리 찾아다니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새 구단주들은 내년 1월부터 우수한 선수를 스카우트하는 한편 이미 보유한 일부 스타(스티븐 제라드, 페르난도 토레스)도 붙잡아야 한다. 야구의 더 질서정연한 절차에 비하면 ‘개척시대 미국 서부(Wild West)’와 비슷하다고 헨리가 비유한 의식이다. 그는 아시아에서 리버풀 기념품을 판매해 그 돈으로 어느 정도 선수들의 계약금이 충당되기를 기대하는 한편 스타의 영입보다 자체 육성을 강조했다.

또한 창의성을 중시하는 그는 빌리 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단장의 제안으로 ‘축구 전략 책임자’를 고용했다. 대부분의 영국 팬과 구단주는 미국인이 축구를 모르는 정도보다 더 야구를 모르지만 적어도 빈은 알아본다. 몰랐다 해도 브래드 피트가 그의 성공 스토리를 연기한 영화 ‘머니볼(Moneyball)’이 곧 상영된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성과를 이끌어내는 머니볼 방식을 리버풀에 적용하지는 않겠다고 헨리는 강조한다.

번역·차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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