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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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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 혼

(미국 가수, 92세)

혼은 처음부터 출중했다. 하지만 늘 좋은 면에서 그렇지는 않았다. 그녀는 1940년대 MGM 영화사의 뮤지컬 여러 편에 출연했다. 하지만 그녀 혼자서 연기하는 장면이 많았기 때문에 일부 관객이 그 장면을 싫어할 경우 슬며시 삭제되곤 했다(뮤지컬 영화 ‘하늘의 오두막’에서 그녀가 비누거품을 채운 욕조 안에 앉아서 부른 멋진 노래도 이런 이유로 삭제됐다). 하지만 누구도 혼을 영원히 침묵시키진 못했다. 그녀는 나이트클럽의 여가수로 큰 성공을 거뒀다. 그 시절의 대표작 ‘여자와 음악(The Lady and Her Music)’은 브로드웨이 1인 뮤지컬 역사상 최장 공연 기록을 가진 작품으로 꼽힌다.



리처드 홀브룩(미국 외교관, 69세)

열정적이고 야망이 넘쳤던 비범한 인물. 요즘 미국 고위층에선 이런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 시대의 시어도어 루스벨트라고 할까? 홀브룩은 여러 면에서 세계적인 투사다. 그가 수많은 외교 임무 중 하나를 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왔을 때 부하직원들은 “독불장군이 돌아왔다(The Ego has landed)”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홀브룩은 베트남전 당시 베트남에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고 발칸 반도의 유혈사태 종식에 기여했으며 아프간 특사로 활동하던 중 사망했다. 이 정도 경험이면 독불장군 노릇을 하며 큰소리칠 자격이 있지 않을까?



밥 구치오네
(미국 잡지 발행인, 79세)

플레이보이지를 창간한 휴 헤프너가 남성 잡지계의 ‘매력적인 마티니’ 같은 존재라면, 펜트하우스지를 창간한 밥 구치오네는 ‘테킬라 병 속에 든 벌레’ 같은 존재다. 구치오네는 대담하고 괴팍스러웠으며 저속함의 극치를 달렸다[바네사 윌리엄스(최초의 흑인 미스 아메리카로 펜트하우스지에 누드 사진이 실렸다)에게 물어 보라]. 펜트하우스지는 포르노 전쟁에서 인터넷에 패할 때까지 총 4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구치오네는 그 즈음 미술품 수집가로 변신했다. 결국 돈으로 상류층의 품위를 사들인 셈이다.



조앤 서덜랜드


(호주 소프라노 가수, 83세)

‘세기의 목소리(Voice of the Century)’ ‘라 스투펜다(La Stupenda: 경이로운 인물)’로 일컬어졌던 세계적 소프라노. 서덜랜드가 오페라 무대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만 해도 도니제티의 벨칸토 아리아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 같은 훌륭한 소프라노가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면 별로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도니제티의 오페라가 큰 인기를 끄는 요즘에는 상상이 안 가는 일이지만 말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오페라 ‘루치아’의 ‘광란의 아리아’를 부른 뒤엔 박수 갈채가 12분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녀가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녹음한 오페라 ‘사랑의 묘약’(데카 음반사)을 들으면 집에서도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게 된다.



루이즈 부르주아(프랑스 출신 미국 조각가, 98세)

회고록이 유행하기 오래전 부르주아는 자신의 어린 시절 상처(바람둥이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를 소재로 섬뜩하고 추상적인 조각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고백적 예술(confessional art)의 어머니’로 불린다. 하지만 부르주아의 일생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해도 그녀의 거대한 ‘거미’ 조각들이 뿜어내는 힘이나 신체에서 분리된 ‘남근상’에 숨은 기지를 감지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레흐 카친스키(전 폴란드 대통령, 60세)

1980년대에 자유노조 운동을 이끈 그는 과거사를 인정하지 않는 러시아 지도자들을 불신하게 됐다. 대통령 재직 당시 그는 세계가 “러시아에 제국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면” 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폴란드 정계 지도자 95명과 함께 1940년 소련 비밀경찰에 학살당한 폴란드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카틴숲으로 가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토니 커티스(미국 배우, 85세)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커티스는 여자 재즈 가수와 케리 그랜트 스타일의 석유 갑부로 2중 변장을 한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변신은 현실에서 이뤄졌다. 뉴욕 브롱크스의 빈민가에서 버나드 슈워츠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고아원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자랐다. 하지만 ‘뜨거운 것이 좋아’ ‘성공의 달콤한 향기’ ‘흑과 백’ 등의 영화에서 팬들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배우로 거듭났다.



디노 데 라우렌티스(이탈리아 출신 미국 영화 제작자, 91세)

파스타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라우렌티스는 약 150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작 ‘라 스트라다’와 ‘카비리아의 밤’도 그중 일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 영화 산업을 거의 혼자 힘으로 다시 일으킨 그는 1970년대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도 다양한 작품을 제작했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형사 서피코’,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베를린의 밤’, 밀로스 포먼 감독의 ‘랙타임’,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블루 벨벳’이 대표작이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 60세)

그와 그의 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현 아르헨티나 대통령)는 중남미에서 영향력이 가장 막강한 부부로 꼽혔다. 대중영합주의자였던 키르치네르는 대중 앞에 나서서 큰소리치기보다는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페론주의 운동을 억제하고 입법부의 권력을 하나로 통합했다. 키르치네르 부부는 오랫동안 대통령직을 유지할 계획이었지만 이제 부인 혼자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데니스 호퍼(미국 배우, 74세)

스크린 속의 악당, 카메라 뒤의 독불장군, 시각예술가, 아메리프라이즈 파이낸셜의 CF 모델. 호퍼는 50년 동안 미국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그의 개성 강한 악당 연기는 수작(‘블루 벨벳’)을 상징적인 작품으로, 그저 그런 작품(‘스피드’)을 수작으로 탈바꿈시켰다. 호퍼는 또 상처받은 인물(‘후지어스’의 알코올 중독자 코치 역)을 표현하는 데도 뛰어났다. 감독 데뷔작 ‘이지 라이더’는 전설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았지만 후속작 ‘라스트 무비’는 꽤 괜찮은 작품이었는데도 평단으로부터 외면당했다.



아서 펜(미국 영화감독, 88세)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발표 당시 할리우드에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천덕꾸러기였다. 진보 성향의 주간지 뉴리퍼블릭은 이 영화를 칭찬한 폴린 케일의 평을 실어주지 않았다. 제작사인 워너 브러더스는 이 작품이 흥행에 실패하리라 예상하고 남자 주인공 워런 비티에게 수익의 40%를 주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펜의 생각은 달랐다. 프랑스 누벨바그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이 갱 영화를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양식화된 폭력을 할리우드의 단골 소재로 만들었다.



우관중(吳冠中·중국 현대미술가, 90세)

사실주의를 저버리고 추상주의를 채택한 최초의 중국 미술가 중 한 명이었지만 그의 그림에선 늘 중국적인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유럽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문화혁명 시절 지식인 숙청으로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중국이 세계 경제 무대의 강자로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볼 정도로 장수했다. 1992년엔 현존하는 중국 미술가 중 최초로 대영박물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스페인 외교관, 89세)

스페인 프랑코 총독 시절 체육부 장관을 지낸 사마란치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제7대 위원장으로 취임한 후 파산 직전의 IOC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IOC 위원장으로 재직한 21년 동안 개발도상국을 포함해 더 많은 국가의 올림픽 참가를 이끌어냈으며 IOC의 문호를 여성에게 개방했다. 1990년대 말 IOC가 올림픽 개최권을 노리는 도시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비난이 일면서 명성에 손상을 입었다. 하지만 보이콧 없는 올림픽 개최와 파산 직전의 IOC를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는 여전히 인정받는다.



클로드 샤브롤(프랑스 영화감독, 80세)

샤브롤의 처녀작 ‘미남 세르주’는 프랑스 누벨바그 운동의 효시로 인정받는다. 누벨바그는 1950년대 말부터 유행한 경향으로 영화의 형식과 의미를 감독이 중심이 돼서 책임진다는 의식과 사실적인 스토리 전개를 특징으로 한다. 샤브롤은 프랑수아 트뤼포나 장뤼크 고다르만큼 명성을 얻진 못했지만 50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했다. 대다수가 샤브롤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인 섹스와 사회계층 문제를 다뤘다. 히치콕의 영향을 받은 ‘도살자’와 ‘부정한 여인’이 대표적이다.



호세 사라마고(포르투갈 작가, 87세)

노벨상 수상자인 사라마고는 무신론자이자 공산주의자였다. 작품에 자신의 견해를 반영하긴 했지만 그의 소설에 설교적인 경향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초현실적 상상(예를 들면 한 나라의 국민 전체가 한꺼번에 실명을 하는 상황 등)과 위압적이고 혁신적인 스타일(길이가 한 쪽에 달하는 문장들과 제목 없는 소설들)이 눈길을 끈다.



테드 소렌슨(미국 정치 보좌관·연설문 작성자, 82세)

소렌슨은 27세 때 ‘용기 있는 사람들’(존 F 케네디 전 미 대통령의 퓰리처상 수상작)의 집필을 위한 조사 작업에 착수했다. 오랜 세월(그리고 많은 소문)이 지난 뒤 소렌슨은 마침내 자신이 그 책의 일부를 직접 썼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나중에 케네디 대통령의 수석 연설문 작성자가 됐지만 케네디가 남긴 가장 유명한 연설 문구가 자신의 작품인지에 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지 물으라”는 말이다. 그에게 이 명언이 본인의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묻지 말라”고 답하지 않을까?



알렉산더 헤이그(미국 정치인·군인, 85세)

4성 장군 출신으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절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냈다. 하지만 그보다는 로널드 레이건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내던 때가 더 기억에 남을 듯하다. 레이건 대통령 저격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기자들 앞에서 “나는 (부통령이 올 때까지) 현재 백악관을 통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말로 그는 대통령 유고 시 권력승계 서열 4위인 국무장관이 과도한 권력욕을 드러낸 게 아니냐는 구설에 올랐다. 게다가 헤이그는 그때는 물론 다른 어느 때도 상황을 제대로 통제한 적이 없다.



솔로몬 버크(미국 가수, 70세)

버크는 ‘록과 소울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증명이라도 하듯 왕좌에 앉아 공연했다. 재미는 있었지만 좀 지나친 행동이었다. 그는 1960년대 초 애틀랜틱 음반사의 45회전 싱글 음반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LP 음반들은 ‘Cry to Me’ 등 싱글 곡들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졌지만, 엘비스 코스텔로·밥 딜런 등의 거장들에게서 받은 곡이 실린 앨범 ‘Don’t Give Up on Me’는 아주 훌륭하다.



엘리자베스 에드워즈

(존 에드워즈 전 미 상원의원의 부인, 61세)

덕망 있는 이미지로 ‘성(聖) 엘리자베스’라고 불리기도 한 그녀에게는 비극적인 드라마에서나 일어날 법한 불운이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남편이 정치를 시작하기 전부터 정치에 몸담았던 동안, 그리고 그 후까지 줄곧 그랬다. 십대의 아들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을 때나 암 선고를 받고 투병할 때나, 자신의 결혼생활이 타블로이드판 신문의 가십 거리로 등장했을 때 그녀는 진솔하고 의연하게 대처했다. 정치판의 뻔한 이야기에 식상한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 감명받았다. 어쩌면 ‘성엘리자베스’의 실제 모습은 사뭇 달랐을지 모르지만(정치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그녀는 유명인사의 삶(어두운 측면)에서 위엄과 품위가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아나톨리 도브리닌(옛 소련 외교관, 90세)

‘도비’라는 애칭으로 불린 그는 1962~86년 주미 소련 대사를 지냈다. 흐루쇼프부터 고르바초프까지 5명의 소련 지도자와 존 F 케네디부터 로널드 레이건까지 6명의 미국 대통령이 재임했던 기간이다. 도브리닌은 매력적이면서도 터프한 성격으로 미국 문화와 관습을 잘 알았으며 좋아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등 냉전 시대의 긴장된 순간을 잘 헤쳐나갔던 것도 그 덕인 듯하다.



조지 스타인브레너(미국 구단주, 80세)

그가 뉴욕 양키스의 구단주로 있는 동안 이 팀은 월드 시리즈에서 일곱 번 우승했다. 다섯 번은 빌리 마틴스가 감독으로 있을 때였고, 나머지 두 번은 스타인브레너가 부정한 정치활동으로 형사처벌을 받아 구단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을 때였다. 독선적인 구단 경영으로 ‘보스’라는 별명을 얻었던 그는 미국 스포츠계에서 가장 불화를 잘 일으키는 인물인 동시에 최고의 수완가였다. 양키스는 그가 구단주로 재직한 37년 동안 다른 어떤 구단보다 재정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래서인지 모뉴먼트 파크에 있는 그의 기념패는 전설적인 야구 스타 조 디마지오나 베이브 루스의 기념패보다 훨씬 더 크다.



알렉산더 매퀸(영국 디자이너, 40세)

뿔과 모피, 갑옷의 가슴받이를 연상시키는 상의, 그리고 바닷가재의 발톱처럼 생긴 10인치짜리 하이힐. 매퀸의 디자인은 살아있는 여성보다 이상한 세계의 자연사 박물관에 더 잘 어울릴 듯 보였다. 매퀸은 자신이 ‘예쁜 것만을 추구하는(nacey-nice)’ 패션의 적이라고 말했다. 의상을 예술과 정치, 그리고 야만스러운 패션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는 수단으로도 이용했다.



J D 샐린저(미국 작가, 91세)

샐린저가 창조한 고집스러우면서도 박식한 십대의 영웅 홀든 콜필드(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는 20세기의 허클베리 핀으로 불린다. 그리고 샐린저는 스스로 허클베리 핀이 됐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발표한 뒤 뉴햄프셔주의 작은 마을로 이주한 뒤 50년 동안 그곳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그동안 작품을 썼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 작품들을 잘 보존해 뒀을까? 이미 출판된 샐린저의 작품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21세기 미국 문학의 향방을 가를 듯하다.



패트리셔 닐
(미국 배우, 84세)

브로드웨이 연극 첫 작품으로 토니상을, 영화 ‘허드’로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개인생활은 더 화려하고 복잡했다. 게리 쿠퍼와의 떠들썩한 연애(당시 닐은 23세였으며, 쿠퍼는 48세의 유부남이었다), 영국 작가 로얼드 달과의 힘들고 긴 결혼생활, 1965년 세 차례의 뇌졸중 발작으로 언어와 보행 장애를 입은 일까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하지만 3년 뒤 그녀는 재기작 ‘문제는 장미들이었다’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놀라운 회복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녀는 “고집이 세서 그런 것 같다. 그뿐이다”고 말했다.



로버트 버드(미국 정치인, 92세)

웨스트버지니아주 출신의 민주당원인 그는 컨트리 음악 바이올린 연주에도 능했다. 미국 상·하원을 통틀어 최장기 재직 의원이었다. 하원에서 세 번, 상원에서 아홉 번 선출됐다. 선거에서 패한 적이 없는 그는 의회 법규에 누구보다 밝아 논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곤 했다. 1940년대엔 백인우월주의를 추종하는 우파 폭력단체 KKK에 가담했지만 1960년대 말엔 인종차별에 반대했다. 사망하기 2년 전엔 흑인 대통령 후보 버락 오바마를 지지했다.



마뉴트 볼


(수단 출신 미국 농구 선수, 47세)

신장이 2m32㎝로 NBA(미 프로농구) 역사상 최장신 선수로 꼽힌다. 볼은 또 NBA 선수 중 득점보다 블록샷 점수가 더 높은 유일한 선수다. 하지만 고국 수단을 후원하는 운동에 바친 그의 열정은 농구 선수로서의 기록을 능가한다. 볼이 설립한 ‘링 트루 재단’은 수단 난민들에게 수백만 달러를 지원했다. 그는 운동 기금 마련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했다. 스케이트를 못 타면서도 프로 아이스하키 경기에 출전했고, 경마 기수로 나서기도 했다. 말 그대로 ‘거인’이다.



린 레드그레이브(영국 출신 미국 배우, 67세)

언니 바네사와 오빠 코린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23세에 코미디 영화 ‘조지 걸’로 골든 글로브상을 받으며 명성을 얻었다. 그녀의 배우 생활은 들쭉날쭉했다. 영화 ‘샤인’, 2001년 연극 ‘노이즈 오프’ 등 히트작을 내놨지만 그 나머지 기간은 활동이 뜸했다. 폭식증과 불행한 결혼생활 등으로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역시 다른 가족 구성원에 비하면 평탄해 보였다.



박용하

(한국 배우, 32세)

한국 배우 겸 가수 박용하의 자살은 동남아 전역의 팬들을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그는 갑자기 유명해진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 애쓰면서 병든 아버지를 돌보느라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알려졌다. TV 드라마 ‘겨울연가’로 인기를 얻은 뒤 일본에서 10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사망 직전에도 순회 콘서트와 새 영화 촬영을 준비 중이었다.



미프 히스(‘안네의 일기’를 세상에 알린 네덜란드인, 100세)

히스는 자신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을 도운 수많은 네덜란드인 중 한 명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녀는 안네 프랑크와 그 가족이 게슈타포에 끌려간 뒤 안네의 일기를 보관해 뒀다가 그녀의 아버지 오토가 포로수용소에서 홀로 살아 돌아온 뒤 돌려줬다. 나치의 핍박을 받은 유대인 수백만 명의 경험을 전하는 소중한 목소리를 구한 셈이다.



앙드레김(75세)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의상뿐 아니라 특유의 말투와 헤어스타일, 옷차림 등으로 ‘앙드레 김 스타일’을 각인시킨 패션 디자이너. 한국의 전통 문양과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은 문양을 넣어 로맨티시즘에 바탕을 둔 의상을 만들었다. 1962년 ‘살롱 앙드레’라는 의상실을 열어 한국 남성으로서는 처음으로 패션 디자이너 생활을 시작했다. 1966년 파리 패션쇼를 시작으로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패션쇼를 개최하면서 한국의 미를 알렸다. 그의 패션쇼엔 항상 당대 최고의 스타가 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래서 연예인들 사이에선 앙드레김 패션쇼의 모델로 서야 진정한 스타로 인정받는다는 얘기가 생겼다.



리영희(81세)

‘시대의 양심’으로 불린 지식인. 1957년 합동통신에 입사하며 시작된 기자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964년 유엔의 남북한 동시 초청을 기사화했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고, 조선일보 외신부장을 맡았던 1969년에는 베트남 전쟁과 국군 파병에 대한 비판적인 보도로 강제 퇴사를 당했다. 합동통신 외신부장 시절이던 1971년에도 군부 독재와 학원 탄압에 반대하는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가해 강제 해직됐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비롯한 저작활동으로 수차례 구속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선 냉전 사고에서 벗어나 온전히 세계를 바라보게 할 필독서로 여겨졌다.



법정(78세)

승려이자 수필작가로 활동했다. 1996년 서울 도심의 대원각을 시주받아 이듬해 길상사로 고치고 회주로 있었다. 2003년 회주직에서 물러난 뒤로 강원도 산골에서 직접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면서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수십 권의 수필집을 출간했는데 정갈한 글 솜씨로 출간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대표적인 수필집으로는 ‘무소유’ ‘오두막 편지’ 등이 있다.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모든 책을 절판하라고 했다. 그 소식이 전해진 이후 ‘무소유’를 소유하려는 이들이 늘어 서점마다 스님의 책이 동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황장엽(87세)

북한의 통치 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의 대가였지만 한국으로 망명한 뒤 북한 체제를 비난했던 분단시대 비운의 지식인. 1965년 김일성종합대학의 총장을 지내면서 김일성 유일사상체계를 정립하는 데 기여했고, 청년 김정일에게 주체사상을 가르치기도 했다. 1997년 중국 베이징을 경유해 남한으로 망명한 뒤 각종 강연활동 이외에도 북한 정권 타도를 외쳤다. 자신이 기초를 다진 주체사상이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 숭배를 위한 봉건사상으로 변질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현충원에 안장되는 것을 두고도 논란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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