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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합 조사 몰아치기 산업계 움찔

담합 조사 몰아치기 산업계 움찔

지난 1월 14일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이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던지는 족족 걸려든다. 공정거래위원회의 담합 조사 얘기다. 지난 연말부터 최근까지 우유, 전선, 두유, 디지털음원 서비스 업계가 공정위로부터 담합했다는 이유로 과징금을 받았다.

조사 착수에서 제재까지 적어도 6개월~1년 이상 걸리는 전례를 볼 때 물가기관을 자처한 공정위의 요즘 활약은 놀라울 정도다. 하지만 산업계에서는 “예전에 다 조사해놓은 것을 한꺼번에 풀면서 압박하는 모양새”라는 불만이 많다. 무슨 말일까?

1월 10일 공정위는 시장에 선전포고를 했다. “서민생활과 직결된 품목 중 최근 가격이 인상됐거나 인상이 예상되는 품목에 대해 담합 등 불공정행위 전면 조사에 착수한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속도’를 강조했다. 공정위는 “최근과 같은 물가불안 시기에는 가격의 동조적 인상이나 편승 인상 과정에서 사업자 간 가격 담합이 이뤄지기 쉽다”며 “이를 감시해 시정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두유, 밀가루, 컵커피, 음료, 김치, 치즈, 단무지 등 구체적 품목까지 밝혔다.

이후 두유 업계가 첫 철퇴를 맞았다. 2월 28일 공정위는 두유 가격을 담합해 인상한 정식품, 삼육식품, 매일유업 3개 업체에 131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한다고 밝혔다. 공정위의 보도자료 제목은 ‘두유 값 짜고 올렸다’였고 ‘서민 밀접품목 조사 후 가격담합 첫 제재’라는 부제가 달렸다. 왜 두유업계가 첫 대상이었을까? 공정위 관계자는 “최근 구제역으로 우유 공급의 급격한 감소가 예상되면서 두유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며 “3월 개학 이후 학교 급식에서 우유를 상당 부분 대체할 전망”이라고 설명했다.

두 가지 의미가 담겼다. 시점상 최근 상황을 반영한 조사 결과라는 것과 향후 담합할 가능성이 크다는 뉘앙스다. 공정위가 발 빠르게 조사에 착수해 성과를 낸 듯이 보이는 대목이다.



94개 품목 전방위 조사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3개 두유업체가 담합을 했다고 공정위가 밝힌 기간은 2008년 1~11월 사이 두 차례다. 2008년 1월 시장 점유율 1, 2위인 정식품과 삼육식품이 가격을 인상하기로 합의했고, 같은 해 9~11월 정식품이 삼육식품과 매일유업(시장 점유율 3위)에 가격 인상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공정위는 모 회사 마케팅팀의 ‘주간업무보고’ 등 증거도 공개했다. ‘경쟁사 영업부장과 만나 의견을 나눴다’는 등 담합 혐의를 받기에 충분한 내용이 담겼다.

관련 업계도 담합 사실은 인정한다. 모 두유업체 팀장은 “담합한 것은 사실”이라며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는 “직원들이 담합에 대해 무지했다”고 털어놨다. 그렇다면 두유 업계 담합 조사는 언제 착수된 것일까? 업계 관계자는 “2009년 1월부터 조사한 내용이었고 잠잠하다가 공정위가 갑자기 발표하더라”고 말했다. 다른 업계 관계자도 “2009년 초반에 조사를 받았다”고 밝혔다. 2년 전 조사에 착수한 것을 이제야 속도감(?) 있게 발표한 것이다.

디지털음원 업계도 사정은 비슷하다. 공정위는 최근 온라인음악 관련 2개 담합 사건에 가담한 15개 업체에 과징금 188억원을 부과했다. 5개 회사는 검찰에 고발했다. 공모를 통해 온라인에서 일부 상품 판매를 중지하고 다운로드 가격을 인상하기로 합의했다는 게 골자다. 공정위 조사대로라면 이들 음원서비스 업체가 담합을 모의한 것은 2008년 5~12월이다.

공정위가 온라인음악 업계의 담합 조사에 착수한 것은 언제일까? 2009년 3월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고발하면서다. 같은 해 8월 공정위는 이들 업계의 담합 혐의를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이었던 백용호 현 청와대 정책실장은 국회에 출석해 “(2009년) 상반기 내 조사를 마무리하고 과징금이나 형사 고발 등 엄중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2년 가까이 흘러 ‘담합 사실’을 발표했다.

산업계에서는 ‘담합 사건’이 줄줄이 이어질 것으로 본다. 공정위가 올 초 밝힌 직권 조사대상 품목은 94개다. 이미 상당수 업계가 공정위 조사를 받았거나 받고 있다. 밀가루 업계가 대표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CJ제일제당, 대한제분, 동아원 등 8개 회사와 제분협회가 담합 조사를 받았다”며 “조사는 1월 11일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졌고 회사 규모에 따라 하루에서 사흘 정도 조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공정위가 소매가격 분석 자료 등 컴퓨터 파일과 서류를 철저히 조사했다”고 밝혔다.

지난 2월 11일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이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대기업 CEO들과 만나 동반성장을 위한 정책 방향을 설명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익명을 원한 공정위 관계자는 “지난해 3~4분기에 가격이 동시에 많이 오른 품목을 집중 조사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설탕, 케첩, 마요네즈, 탄산음료, 인스턴트 커피, 카레, 두부, 치즈, 포장김치 등이다.



제분업계도 담합 조사 받아이와 관련해 김동수 공정위원장은 1월 중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최근 공정위 조사 과정에서 식료품 중 상당 품목이 담합 혐의가 있는 것으로 보고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가격을 올리는 과정에서 담합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조사 중이며 속도감 있게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담합이 시장 질서를 깨는 범법 행위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최근 공정위의 ‘카르텔 드라이브’는 도가 지나치다는 게 산업계의 불만이다. 무엇보다 물가와 관련된 품목을 열거해 놓고 TF(태스크포스)팀까지 조직해 무차별 조사에 착수하는 것부터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시장 현실과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상품 가격이 동시에 올랐다는 이유로 담합 혐의를 두고 먼지 털듯 조사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많다. 관련 업계 일각에서는 “공정위의 실적 경쟁 심리도 한몫한다”는 시각이 있다. 공정위는 카르텔조사국과 시장감시국은 물론 타 부서 인력까지 차출해 조사에 투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실제로 두유 담합은 시장감시국 서비스업감시과, 디지털음원은 카르텔조사국 카르텔조사과가 담당했다).

공정위가 ‘물가 잡기’에 나서는 것 자체에 대한 논란이 여전한 가운데 정부가 ‘기업 팔목을 비틀어 물가를 잡으려 한다’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한 문서도 최근 공개됐다. 지식경제부가 대형 할인점에 보냈다는 e-메일 전문이다. 우제창 민주당 의원이 2월 28일 국회 경제분야 대정부 질의 때 공개한 ‘물가안정대책회의 참석 요청 공문’에 따르면 “물가안정은 정부 부처의 최대 화두이니 가격인상 자제” “불응 시 정부는 불법·적법 관계없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경고가 담겼다. 이어 정부 요구에 불응할 경우 1단계 공정위 조사, 2단계 계통조사(원재료 구입부터 도소매 단계별 유통 흐름을 조사하는 것), 3단계 세무조사를 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공정위는 이번 전방위 조사에 대해 “조사 과정에서 각별히 유의해 기업 영업 방해를 최소화하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기업은 이미 영업을 방해 받고 잔뜩 움츠러 들었다.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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