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 222명의 난민이 산다
우리 곁에 222명의 난민이 산다
에티오피아 출신 애브라함 B 데메케(한국 이름 조나탄, 39)씨는 난민 출신의 첫 귀화인이다. 그는 아디스아바바 국립대학을 졸업하고 화학 연구원으로 일하던 2001년 봄 150여 명이 죽거나 다친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다. 친구가 바로 옆에서 총 맞아 죽었고 대학은 1년간 폐쇄됐다. 그때 망명을 돕는 에티오피아 내의 외국 단체를 통해 어학연수를 빌미로 2001년 8월 한국에 왔다. 선문대 어학원에서 2003년 여름까지 한국어를 배운 뒤 호서대에 편입해 2007년 신학대학을, 올해 초엔 단국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처음 몇 달은 공장에서 일했지만 4년 동안 학원에서 영어강사로, 또 최근까지는 자동차 부품회사의 해외영업 부문에서 일했다. 한국에서 3년의 기다림 끝에 2005년 9월 난민 자격을 얻기까지 그도 가시밭길을 걸었다. 난민 자격이 없으면 취업이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에 처음 와서는 불법 취업을 계속 했던 셈이다.
애브라함씨는 난민 자격을 취득하자마자 에티오피아에 두고 온 여자 친구를 불러들여 결혼했다. 그 부인은 처음 유학 비자로 들어왔으나 지금은 서울 그리스도대학의 영어강사로 일하고 유치원에 다니는 6살짜리 딸도 두었다.
한국에서 가정을 꾸린 그는 2010년 3월 귀화 한국인이 됐다. 그때 얻은 한국 이름이 조나탄이고 그는 자신이 천안 조씨 시조라 했다. 조씨와 부인은 모두 영어를 잘한다. 에티오피아가 대학 이상 교과 과정과 교재를 미국에서 그대로 따왔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난민 자격을 얻기는 쉽지 않다. 미얀마 출신의 한 난민신청자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처럼 어렵고 까다롭다”고 말했다. 전체 신청자 가운데 네팔인 383명, 중국인 348명, 파키스탄인 300명, 나이지리아인 207명 등은 난민 자격을 얻지 못했다. 국가 간 정치적 이해관계가 걸려있어 난민신청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OECD 발표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평균 난민 수용률은 인구 1000명당 2명에 못 미친다. 난민들의 한국 정착을 돕는 NGO 난민지원센터의 최원근 사업팀장은 “한국의 난민 수용률은 OECD 국가들 가운데 최하위권”이라고 말했다.
최 팀장은 “지난해 ‘난민 지위 및 처우에 관한 법률’을 논의하는 공청회가 열린 뒤로 사회적인 관심이 커져 난민보호제도가 꾸준히 논의되지만 선진국에 비해 아직 열악한 편”이라고 말했다. 현재 아시아에서 난민협약에 가입한 나라는 6개국(한국, 일본, 중국, 필리핀, 동티모르, 캄보디아)으로 실질적으로 난민보호가 가능한 환경을 가진 나라는 한국과 일본 정도다. 정부는 난민 당사자와의 면접 내용을 토대로 신청자의 신변을 조사하고 자국의 자료를 받지만 불충분할 경우 일부 신청자에게 인도적 체류 허가자 자격을 준다. 법무부 국적난민과 천승우 사무관은 “자국에서 정치적 박해를 받았다는 입증자료가 불충분해 자격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난민신청자 중에 누가 진짜 난민인지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난민(신청자)들도 볼멘소리를 한다. 조씨는 “본국에서 받은 정치적 박해사실을 직접 증명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선진국에서는 통역관이 동석해 장시간 면접을 진행하지만 국내에서는 진술 내용보다 증거자료를 통해 사실을 입증하도록 요구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최 팀장은 “정치적 박해를 받아 신변상의 불안함 때문에 고국을 등진 사람들에게 사진과 e-메일, 녹취 등의 증거자료를 요구하는 건 지나치다”고 말했다. 1994년 미얀마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고국을 떠나 한국에 정착한 마웅저씨는 “단체로 심사를 받는데 한 명에게 할애된 시간이 20분 남짓밖에 안 됐다”고 말했다. 그는 “지극히 사적인 내용까지도 다른 사람들이 동석한 자리에서 진술하게 해 힘들었다”고 덧붙였다. 조씨도 “신청자 대부분이 전쟁이나 죽음 등의 정신적 외상에 시달린다”며 “보다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터뷰 과정에서 원활치 못한 통역도 걸림돌이다. 난민들은 “아르바이트 대학생 통역”으로는 자신들이 겪은 압박과 고통을 충분히 전달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특히 희소국가 출신의 신청자들에게는 아예 통역을 붙이지 못해 프랑스어, 영어 등으로 두 번의 통역을 거쳐 과거의 사실을 전달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최 팀장은 “인터뷰 진술이 가장 중요한데 제한된 시간과 불완전한 통역 때문에 난민신청자들이 애를 먹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해당 부서 내 인력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난민 심사기간이 6개월에서 3개월로 단축됐지만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의 난민업무 인력은 네 명뿐”이라며 “그들이 매월 300~400명이나 몰리는 난민 신청자들을 꼼꼼히 심사하기란 어렵다”고 말했다. 심사과정에서 서류나 증거자료 확인, 두세 차례의 인터뷰, 각국의 정치적 상황 분석 등이 필요하지만 그마저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마웅저씨는 “한국에서 버마 민주화운동을 하던 동료들이 직책, 나이 순으로 난민자격을 받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2005년 난민 신청을 해 2008년에 난민 지위를 얻기까지 꼬박 4년을 기다려야 했다.
정부를 통해 난민 자격을 얻기가 까다롭다 보니 소송을 통해 자격을 인정받는 사례도 늘어난다. 올해 초 법원은 파키스탄 출신의 동성애자를 난민으로 인정했으며, 지난해 10월엔 자국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쓴 콩고 기자에게 난민자격을 부여했다. 파룬궁으로 박해를 받았다며 난민 신청을 한 중국인 5명은 2005년 한국 정부가 거절했지만 2008년 법원 판결로 난민 자격을 인정받기도 했다. 2010년 2월 대법원에서 난민 자격을 얻은 중국인 왕리(41)씨는 “본국 정부가 파룬궁 난민과 관련해서 배후에서 압력을 넣었다고 들었기 때문에 판결을 기다리는데 조마조마했다”고 말했다. 그 밖에 미얀마인 17명, 중국인 5명, 콩고인 4명, 에티오피아인 2명, 방글라데시인, 이집트, 파키스탄, 라이베리아인 각 1명이 승소해 난민으로 인정됐다. 이들 외에 현재 법원에 소송 중인 외국인 난민 신청자가 631명에 이른다.
최근 10년 동안 한국에 난민 신청자가 급증하자 법무부는 지난해 처음으로 난민 실태를 조사했다(설문 대상 395명). 그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28%가 난민 신청사유로 “한국이 난민에 우호적이라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들의 한국생활은 불안정하다. 인도적 차원에서 취업활동 허가를 받은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난민 신청자는 합법적 체류비자가 없어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뿐만 아니라 불법취업에 따른 노동착취에도 시달린다. 국내 난민 신청자의 평균 학력은 대학 1학년 이상으로 나타났지만 직업은 단순 노무직 종사의 비율이 높았다. 이들의 80%가량은 평균임금 79만원으로 생계를 꾸려 간다. 마웅저씨에 따르면 “대다수의 난민신청자가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국내에 남아 있다”며 “2000년도에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다 한국에 온 친구 역시 불법체류자로 강제 추방됐다”고 말했다. 그는 “미얀마에는 2500여명이 정치범 수감소에 갇혀있다”고 덧붙였다. 올해 고려대 국제학부에 입학한 우간다 출신의 난민 마와(32)씨는 등록금과 입학금을 낼 형편이 안 돼 대학을 포기할 위기에 처했으나 난민인권센터의 모금을 통해 900여만원을 지원받았다. 마와씨는 “한국에서 열심히 배워 우간다를 독재와 가난으로부터 살려내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2012년 영종도에 120억원을 들여 난민지원센터를 지을 예정이다. 하지만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이 시설이 자칫하면 난민을 한국 사회와 분리시키는 수용시설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계한다. 행정편의에 따라 영종도에 지원센터를 설치할 경우 난민들이 한국사회에 자연스럽게 통합되기가 어려워진다는 설명이다. 법무부 난민국적과 차규근 과장은 “현재 외국인 정책과 난민 정책의 업무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지만 국회에 계류 중인 난민법, 이민청 설립 문제 등이 해결되면 여건이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조나탄씨도 한국에서 ‘march4freedom’이라는 단체를 조직해 에티오피아의 자유를 외친다. 2005년 에티오피아 총선 당시 정부의 개표 부정에 항의하던 야당 지도자 34명이 투옥되자 그들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서울에서 열린 G20회의 기간 중에는 가두시위를 벌이면서 에티오피아의 상황을 알렸다.
요즘 조나탄은 운전 중에 ‘곰 세마리’라는 동요를 자주 듣는다. “제 딸이 지금 여섯살인데 저보다 한국말을 더 잘해요. 얼마 전에 갑자기 유치원에서 배웠다며 ‘곰 세마리’를 함께 부르자는 거예요. 딸 아이한테 한국어를 배우는 셈이죠.”
한국은 20세기 들어 난민이 발생한 주요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와 중국, 미국 등지로 탈출해 망명정부를 세웠고, 6.25전쟁 때는 수많은 실향민과 난민이 발생했다. 1960~198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을 하던 많은 사람이 독재정권의 박해를 피해 나라밖으로 나갔다. 한국이 국제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유일하게 국제원조를 하는 나라로 탈바꿈했듯 이제는 아시아 지역에서 난민보호에 앞장서야 할 위치에 섰다. 김현미 연세대 교수는 “난민은 원하지 않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조건 때문에 자신의 나라를 떠나야 했던 ‘구조적으로 강제된 이주’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비호국은 안전과 정착 등 생존의 마지막 보루”라고 설명했다.
‘파리 난민’으로 알려진 홍세화씨(난민지원센터 대표, 그는 1979년 유신말기 최대 공안사건인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22년간 한국땅을 밟지 못했다)는 “정치적 이유로 프랑스에서 난민이 돼 20여 년을 살았지만 프랑스는 나와 내 가족에게 프랑스인들과 똑같은 사회적 혜택을 주었다. 그들이 나를 품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다”라고 말했다.
[공동취재: 김소라·유동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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