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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 STORY >> 갯벌에 골프장을? 다들 미쳤다고 했다

FEATURE STORY >> 갯벌에 골프장을? 다들 미쳤다고 했다

아난티클럽 서울의 에이 하우스. 캄캄한 클럽하우스 입구를 지나오면 밝게 빛나는 통로가 나온다. 40대 중반에 골프장 사업을 시작해 골프계 ‘미다스 손’이라고 불리는 이중명 회장의 삶과 닮았다.

3월 15일 강남에서 자동차로 경춘고속도로를 타니 20분 만에 설악톨게이트가 나왔다. 7분을 더 달리자 2m가 족히 넘는 백자작나무가 눈에 띄었다. 자작나무 길을 따라가자 경기도 가평의 아난티클럽 서울에 도착했다. 과거 ‘리츠칼튼CC’에 새 옷을 입혔다. 새 옷이라기보다 완전히 새롭게 지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거다.

차를 주차하고 나니 지붕 위로는 테니스 코트장이 있다. 클럽하우스도 색다르다. ‘에이 하우스(A 하우스)’로 이름 붙여진 클럽하우스에 들어서면 사방이 캄캄하다. 중앙에 놓여 있는 벽난로 불빛에 익숙해지자 벽면 양쪽으로 긴 액자가 보였다. 아난티클럽의 상징인 백자작나무를 찍은 사진이다. 이윽고 코끝에 향긋한 레몬 향이 느껴졌다. 호주의 유명 향수업체에 의뢰해 만든 아난티클럽 고유 향기란다. 뭔가에 홀린 듯 방을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프런트 데스크 직원들이 반갑게 맞는다.

이때 남색 바바리코트에 와인빛 머플러를 두른 신사가 들어왔다. 머리를 가지런히 뒤로 모두 넘기고 검정 보잉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1980년대 홍콩 영화를 주름잡던 배우 주윤발을 연상케 했다. 골프계의 ‘미다스 손’으로 불리는 이중명(68) 에머슨퍼시픽 회장이다.

1992년 충북 진천에 문을 연 중앙CC를 시작으로 2000년 경기도 가평에 리츠칼튼CC(현 아난티클럽 서울), 2002년 충남 연기군 에머슨내셔널(옛 IMG내셔널CC), 2006년 경남 남해 힐튼남해 골프&스파 리조트, 2008년 북한 금강산 아난티 골프&온천 리조트 등을 차례로 세웠다. 골프 코스로만 무려 117홀에 달한다.

이 회장의 첫인사가 이색적이었다. 그는 인사를 건네는 기자에게 다짜고짜 “남자 화장실 가 봤느냐”고 묻는다. 기자는 여자다. 황당해하는 기자를 끌고 이 회장은 화장실을 보여줬다. 하얀 대리석이 깔린 화장실에 독특한 물건이 있었다. 소변기마다 투명한 작은 어항이 놓여 있다. 그 속에 금붕어 한 마리가 헤엄을 치고 있었다.

“이 금붕어도 아난티클럽 직원이에요. 낮에 근무하고 밤에는 커다란 수족관으로 돌아가죠. 대리석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보고 총지배인이 낸 아이디어예요. 하하하.”

에머슨퍼시픽 경영기획부 손영희 과장이 “아난티클럽의 컨셉트는 의외성과 서프라이즈”라고 들려줬다. 이곳은 기존 클럽하우스 개념을 완전히 벗어났다. 레스토랑은 물론 라이브러리 라운지가 곳곳에 있다. 숲 속에 있는 라운지는 전면이 통유리로 시원하게 뚫려 있어 유명산을 바라보며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기 좋다.

레스토랑 통유리 밖으로는 해외 리조트에서나 볼 법한 야외 수영장이 있다. 회원들에게 인기 있는 곳 중 하나다. 가족끼리 오면 부부는 골프를 하고 아이들은 수영장에서 놀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수영장에서 콘서트, 패션쇼 등 다양한 파티가 열린다.

이 회장은 “앞으로 골프장도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리조트로 바뀌는 게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전국에 골프장이 워낙 많이 생기고 있어요. 수익이 없어 문을 닫는 골프장도 많고요. 이제는 단순히 골프를 위한 공간보다 다양한 시설을 갖춰 고객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클럽을 찾는 분이 많을 거예요. 사실 골프장과 동의어처럼 쓰이는 ‘컨트리클럽’의 사전적 의미는 전원생활을 즐기려는 도시 사람을 위해 교외에 골프장, 테니스장, 수영장 등의 시설을 갖춘 단체를 의미합니다. 아난티클럽이 진정한 의미의 컨트리클럽이에요. 앞으로 이곳을 시작으로 중앙CC와 에머슨내셔널도 클럽으로 바꿔나갈 계획입니다.”



독도에도 호텔 짓고 싶다그는 도전을 즐긴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할수록 할 수 있다는 의지는 더욱 굳어진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도전의 결과물이 힐튼 남해 골프&스파 리조트와 금강산 아난티 골프&온천 리조트다.

금강산 아난티 골프 & 온천 리조트.

힐튼 남해 리조트를 가 본 사람이라면 쪽빛 바다 앞에 세워진 리조트에 감탄하기 마련이다. 특히 바다를 가로질러 샷을 날리는 골프 코스가 인기다. 이 회장이 땅을 사기 전에는 누구도 사업할 생각조차 못했다.

남해의 섬은 죄다 산악이다. 바위가 아니면 가파른 산이다. 힐튼 남해 리조트가 들어선 곳은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이었다. 한여름에는 파리와 모기가 들끓어 주민의 원성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남해군에서 관광지를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건물이 들어서면 주변 환경이 깨끗해질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예상과 달리 대부분 기업은 사업성이 없다고 거절했다. 남해가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기 때문에 수요가 많지 않을 것으로 본 것이다.

이 회장은 생각이 달랐다. 관광지가 아니라서 오히려 사람들이 더 찾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바다에 골프장을 지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기회라고 봤다. 주변 사람들은 극구 만류했다. 갯벌에 골프장을 짓는다는 게 불가능한 일로 보였기 때문이다. “땅을 다지는 데 꼬박 2년이 걸렸어요. 부산에서 바지선으로 흙을 퍼오는 거예요. 남해까지 오는 데만 하루가 걸립니다. 바지선 10여 대가 쉬지 않고 땅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공사할 때 고생을 너무 했나 봐요. 리조트 중에서도 애착이 많이 갑니다.”

최남단에 골프장을 지은 이 회장은 2년 뒤인 2008년 북한에 골프장을 지었다. 바로 금강산 아난티 골프&온천 리조트다. 현대아산이 북한으로부터 30년간 무상으로 이용 권리를 얻은 부지 일부에 에머슨퍼시픽이 500억원을 투자해 골프장을 만들었다.

이 회장은 충남 부여 출신이다. 북한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다. 금강산을 수차례 방문하면서 이곳에 골프장을 지으면 좋겠다는 꿈만 갖고 있었다. 마침 현대아산이 이 지역에 민간기업의 투자를 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선뜻 결정을 내렸다. 몇몇 그룹에서도 골프장 설계를 하려다가 포기했다. 북한에 있기 때문에 사업성이 크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힘들게 골프장을 연 날 이 회장은 라운드를 했다. “저 멀리 금강산 비로봉을 바라보며 공을 쳤어요. 울컥했지요. 아름답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더군요.”

안타깝게도 골프장은 문을 연 지 두 달 만에 남북 육로 관광이 막히면서 고객이 갈 수 없게 됐다. 현재 직원 5명이 남아 리조트와 골프 코스를 관리한다. 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언젠가는 다시 금강산에서 라운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돈 벌 생각이었다면 북한에 골프장 지을 생각은 안 했을 겁니다. 골프를 통해 남북 교류에 일조하고 싶었죠. 의미 있는 일을 했다는 점에서 만족해요. 당대보다 후손이 우리 할아버지는 참 멋진 분이라고 기억해주지 않을까요?”

요즘 꿈 하나가 더 있다. 독도에 호텔을 지어 보고 싶다고 얘기하는 이 회장.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말만 하지 말고요. 국민이 즐길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거죠. 호텔 테라스에서 바다 위 갈매기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신다고 생각해 보세요.(웃음)”



‘백돌이’의 유별난 자연 사랑그가 유독 골프장에 관심을 갖는 것은 골프를 좋아하기 때문일까. 이 회장의 골프 실력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설마 골프장 대표인데 골프를 못할 리 없다며 그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CEO도 상당수다. 기자가 “싱글인 거 아니냐”고 묻자 이 회장이 폭소를 터트리며 “100타 넘을 때도 많다”고 귀띔했다.

그가 골프·리조트 사업에 나선 것은 1989년 중앙CC를 인수하면서부터다. 연세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그는 동부종합건설 등 건설사에서 일했다. 그러다 40대에 건축자재 사업에 나섰다.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가슴 아픈 추억”이라며 자세히 들려주지 않았다.

어렵게 골프장 사업을 시작한 이 회장은 중앙CC 정비에 열성을 다했다. 폐업 직전까지 갔던 중앙CC는 노조 파업이 심했다. 프런트 입구에서 노조원들이 꽹과리와 북을 치면서 영업을 방해했다. 이 회장은 직원들을 다독이며 솔선수범했다. 고무장갑을 끼고 화장실 청소를 하는 등 새벽부터 골프장을 누볐다. 잠도 골프장에서 잤다. 그의 노력이 직원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골프장 영업도 정상으로 돌아섰다. 그가 새로운 골프장 사업에 뛰어들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준 것이다.

힐튼 남해 골프 & 스파 리조트.

이 대표는 “골프를 하기보다 골프장에 머무르는 게 좋다”고 말한다. “제가 나무를 워낙 좋아해요. 어렸을 때부터 나무 농장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죠. 지금 비슷한 일을 하고 있지만요.(웃음) 집 마당에도 제가 심은 나무들이 숲을 이룰 정도예요. 일요일만 되면 농원에 가 나무 사오는 게 일이었죠.”

그가 골프 부지를 고를 때 가장 고심하는 게 주변 환경이다. 가령 힐튼남해는 코발트빛 바다가, 금강산 아난티는 1만2000봉 절경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회사 이름인 에머슨도 미국 철학자이자 시인인 랠프 월도 에머슨에서 따왔다. 에머슨 사상의 근간이 인간과 자연의 조화인데 이 회장의 경영철학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남해 발칵 뒤집은 교육사업인터뷰 도중 이 회장은 재킷에서 두툼한 우편 봉투를 꺼냈다. 봉투에는 6~7통의 편지가 곱게 접혀 있다. 색색깔의 예쁜 편지지에 또박또박 쓴 글씨체가 정성스럽다. “수십 통 받았는데요. 그중 일부예요. 제가 장학금을 준 학생들이에요. 요즘 편지 읽는 맛에 삽니다. 하하하. 아마 대기업 오너들도 이런 편지는 못 받아 봤을 겁니다.”

편지에는 이 회장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글이 가득했다. 올해 입학한 최아영 학생은 “학교를 위해 베푸는 이사장님은 멋진 분”이라고 썼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항상 학비가 걱정이었다는 한 학생은 해성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고민 없이 공부만 할 수 있게 된 게 꿈만 같다고 적었다.

이 회장은 2006년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경남 남해에 리조트를 세우던 중 인근 해성중·고등학교 소식을 듣게 된 것. 교육환경이 열악하고 섬 끝자락에 있다 보니 문을 닫을 처지에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장학금 1억원을 기탁했다.

여전히 학교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이 회장은 해성중·고등학교 법인인 해성학원을 인수했다. 그는 조부와 선친이 교육감과 교장을 지낸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다. 고등학교 때 가정형편이 기울면서 힘들게 공부했다. 은퇴하신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 실패했기 때문이다. 7남매 중 여섯째였던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막노동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학교 학생들만큼은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들려줬다. 바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시켜주고, 대학 보내주는 학교’다. 그의 적극적 지원으로 해성고는 경남도교육청 지정 기술형 자율학교로 거듭났다. 사재 42억원을 털어 기숙사도 세웠다. 서울대를 비롯해 모교인 연세대에 입학한 학생에게는 전액 장학금을 준다.

교육사업을 시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사장 취임식 전날에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과연 제가 학교를 잘 이끌 수 있을지 걱정이 드는 거예요. 취임식 날 고무 대야에 물을 받아 왔어요. 교장의 양말을 벗긴 후 정성스럽게 닦아줬죠. 교장은 물론 지켜보는 교사들도 당황해 땀을 흘리더군요.(웃음) 발을 다 닦아준 뒤 교장에게 우리 학생들도 제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교육 혁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큰손자가 다니는 서울 영훈초등학교를 방문한 게 계기가 됐다. 학생들이 영어로 수업을 받고 자연스럽게 영어로 말하는 모습에 놀란 것. 남해는 읍내에 나가도 외국인을 만나는 게 쉽지 않다. 남해군과 지역교육청에서 지원하는 원어민 교사는 제한적 범위 내에서 영어 수업을 해왔다. 형식적 수준이었다. 이 회장은 곧바로 8명의 원어민 교사를 뽑았다. 영어는 기본이고 수학·과학 등도 주 1회 이상 영어로 수업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영어교육 바람은 학교법인과 전혀 상관없는 지역 내 공립 초등학교와 유치원에까지 확대했다.

초등학교에 영어교육을 도입하니 반응이 뜨거웠다. 읍내는 물론 진주 등 주변 도시 학생들이 전학을 오기 시작했다. 해성중·고등학교도 마찬가지. 고등학교는 올해 신입생 모집에 전국에서 140명이 지원했다. 폐교 위기에 몰렸던 학교에는 현재 329명의 학생이 다닌다. 이 회장은 경남 교육발전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지난해 경남교육상을 수상했다.

요즘 이 회장은 남해 가는 길이 고단하지 않다. 인터뷰 다음 날에도 갈 예정이란다. 학교에 갈 때마다 학생들이 뛰어와 반겨준다. 특히 초등학교에서 인기가 높다. 학생들이 이 회장을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아이들이 자기도 열심히 공부해 할아버지처럼 되고 싶다고 말해요.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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