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부품소재업체를 찾아서① 부산·경남편 >> 토양 척박해도 세계 1등 기업 넘본다
지방 부품소재업체를 찾아서① 부산·경남편 >> 토양 척박해도 세계 1등 기업 넘본다
부산 사상구 낙동대로 1468번지. 인근에 낙동강 지류인 삼락천이 유유히 흐른다. 정비공사가 한창이다. 4대강 사업의 일환이다. 소음으로 귀청이 울린다. 낙동대로 주변 골목도 시끄럽긴 마찬가지다. 삼락천 공사 때문이 아니다. 부품과 소재를 깎는 소리 탓이다. 이곳은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부품소재산업단지 ‘사상공업지역’이다. 1000여㎡에 달하는 광활한 부지에 부품소재업체 2447개가 둥지를 틀고 있다(미등록 부품소재업체까지 포함하면 6500개에 달한다). 1986년 도시지역정비사업으로 조성된 사상공업지역은 한국 부품소재업계의 축소판이다. 부산판 구로공단으로도 불린다.
이곳엔 영세기업이 많다. 부품소재업체 2447개 중 종업원 수가 50명 이하인 소기업은 2378곳이다. 전체의 97%다.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는 것도 같다. 4월 9일 토요일 오후 1시가 넘었는데도 사상공업지역의 부품소재공장 가운데 3분의 1 이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한 부품업체에 다니는 근로자 이형락(42)씨는 “토요일에 쉬지 못하는 날이 더 많다”고 말했다. 주5일제 근무는 이곳에서 다른 세상 얘기다.
필리핀 노동자 발테(34)씨는 “오늘 오후 3시까지 일하고 내일 다시 나와야 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아쉽게도 이들은 한국경제의 밑단을 책임지는 역군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형락씨는 담배 연기를 뿜으면서 이렇게 털어놨다. “시쳇말로 뼈가 빠질 정도로 일한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은 아직도 공돌이 취급을 한다. 서러울 때가 많다.”
외적 성장 이뤘지만 내실은 아직부품소재산업. 한국경제의 명실상부한 주춧돌이다. 통계를 보면 그렇다.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국내 부품소재업체 수는 2만2185개(2011년 2월 현재)다. 근로자는 125만 명에 달한다. 지난해 471조원어치를 생산해 2290억 달러 규모를 수출했다. 무역수지는 지난해 779억원 흑자를 기록했다. 한국 무역수지 흑자 규모의 1.9배다. 부품소재업계의 활약이 없었다면 한국 무역수지는 적자를 기록했을 게 뻔하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 유민화 수석연구원은 “우리 주력 수출상품인 반도체·휴대전화·디스플레이·철강·조선·화학제품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수많은 부품소재업체가 만들었다”고 평했다.
겉으로 드러난 국내 부품소재산업의 성적은 합격점이다. 문제는 내실이 탄탄하냐는 거다.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핵심 부품은 미국·독일·일본 등 선진국에서 수입한다. 부품소재업체는 아직 영세하다. 국내 부품소재업체 중 중소기업의 비중은 3.4%에 불과하다. 독일(8.2%)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규모가 작으니 고용창출 능력은 기대치를 밑돈다. 한국부품소재산업진흥원 조사에 따르면 2000~07년 부품소재업체는 3.8% 늘었지만 고용은 2.5% 증가하는 데 그쳤다. 1인당 생산액은 2억8000만원으로 제조업 평균 3억1000만원보다 3000만원 적었다.
R&D(연구개발) 환경은 척박하기 짝이 없다. KIS(한국신용평가정보)가 부품소재기업 1477곳의 실태를 파악한 결과(2009)를 보면 업체당 박사급 인력은 1.8명, 석사는 3.8명이었다. 원광대 정선미(국제통상학부) 교수는 “국내 부품소재업계가 저부가가치형 산업구조로 전락하고 있다”며 “부품소재업계의 생태계를 하루빨리 재정비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中·日 분업시대 임박…韓 샌드위치 신세더 큰 걱정은 이제부터다. 부품소재 왕국 일본의 힘은 날로 세진다. 한국의 일본 부품소재 수입 비중은 2001년 167억 달러에서 2009년 303억 달러로 81% 늘었다. 같은 기간 수출 비중 증가율 65%보다 16%포인트 크다. 중국의 행보도 무섭다. 지난해 한국의 중국산(産) 부품소재 수입액은 582억 달러를 기록했다. 2003년 대비 160% 늘었고, 일본(529억 달러)보다 많았다.
여기까진 약과다. 중국기업은 요즘 해외 부품소재업체의 M&A에 열을 올린다. ZEW(유럽경제연구센터)에 따르면 중국은 2009년 2분기부터 1년간 외국기업 275곳을 M&A했다. 지난해 중국 지리(吉利)자동차가 스웨덴 볼보를 인수한 것은 대표적 예다. 중국 전기차 업체 BYD는 2010년 일본 오기하라 자동차 금형공장을 샀다.
한 연구기관 조사관은 “중국기업은 그동안 석유·철강 등 원자재업체의 M&A에 치중했지만 최근엔 기술력을 가진 기업으로 손을 뻗치고 있다”며 “선진기업 M&A를 통해 핵심 기술력을 이전 받으려는 포석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 부품소재산업의 경쟁력이 더욱 강력해질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말을 이었다. “조만간 중국과 한국의 기술 수준 차이가 사라질 것 같다. 그러면 중·일 분업관계로 부품교역 구조가 새롭게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 자칫 잘못하면 한국의 위상이 추락할 수 있다.”
무언가 비책을 세워야 할 때다. 부품소재기업은 한국경제의 뿌리다. 부품이 모여 모듈이 되고, 모듈이 모여 제품이 나오는 법이다. 부품소재산업이 제대로 서지 않으면 한국경제는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가장 빠른 방법은 글로벌 기술력을 가진 부품소재기업을 키우는 거다. 독일을 자동차 왕국으로 만든 주역은 벤츠·폭스바겐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만이 아니다.
세계적 기술로 무장한 중소 자동차부품업체 3000곳의 역할이 컸다. 벤츠에 들어가는 수만 개의 부품 중 60%는 전국에 있는 독일 중소업체가 공급한다. 이런 중소 부품업체가 없었다면 독일은 자동차 대국의 자리를 내놨을지 모른다. ‘메이드 인 저머니’ 신화도 없었을 게다(이코노미스트 1034호 한국의 마이스터 기업 참조).
국내에도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부품소재업체가 적지 않다. 빼어난 기술력으로 글로벌 부품업체와 자웅을 겨루는 지역업체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홀대 받기 일쑤다. 지역 부품소재업체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이유다.
이코노미스트는 부산테크노파크와 부산중소부품소재기업협의회와 공동으로 부산·경남에 숨어 있는 유망 부품소재업체 5곳을 뽑았다. 더 시스템(자동차 엔진 부품업체)·윤진환경(폐수처리장비 제조업체)·창신정밀(컨베이어벨트 롤러 제조업체)·동양메탈(금형 제조업체)·삼광정밀(자동차 부품 제조업체)이다.
더 시스템은 보쉬(독일)·델파이(미국)·덴소(일본)가 장악한 자동차 엔진 제어장치 시장에 도전장을 던졌다. 첫째 목표는 자동차 부품업계의 절대강자 보쉬다. 더 시스템은 지난해 보쉬가 350억원에 만드는 엔진 제어장치를 단 5억원에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1차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현재 국내외 완성차 업체와 납품 협의를 하고 있다. 대학생 창업가인 더 시스템 김성훈 대표는 “보쉬·델파이·덴소보다 싸고 경쟁력 있는 부품을 빠르게 제조하는 기술력이 우리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가마우지 경제 언제까지…윤진환경은 폐수처리 시스템의 바이블로 불리는 펜턴공법을 단번에 무너뜨릴 만한 기술력이 있다. 폐수처리장비는 난(難)분해성 물질을 분리하는 원료 수산화라디칼을 만든다. 펜턴공법으론 수산화라티칼을 최적 조건에서 0.1㎎ 추출할 수 있다. 윤진환경이 개발한 장비 코젤은 이를 1㎎까지 수집한다. 10배 효과다. 윤진환경 윤정효 대표는 “그동안 폐수처리 시스템을 지배했던 펜턴공법을 코젤공법으로 바꿔놓겠다”며 당찬 포부를 밝혔다.
컨베이어벨트 롤러 제조업체 창신정밀의 활약상도 놀랍다. 창신정밀은 천연수지 롤러 부품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삼성전자, 현대·기아차, GM 등 글로벌 기업의 생산라인에 납품하고 있다. 금형 제조업체 동양메탈과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 삼광정밀은 혁신과 특허로 부품소재업계에 새 바람을 일으킨다. 동양메탈 하수진 대표는 ‘금형설계→단조→후가공’으로 이어지는 원스톱 부품제조 시스템을 구축해 ‘매출 100억원 시대’를 활짝 열었다. 하 대표는 국내 부품소재업계에선 보기 드문 여성 CEO다. 한국여성벤처협회 이사로 재직 중이다. 업력 20년에 빛나는 ‘노장기업’ 삼광정밀은 불순물이 발생하지 않는 금형 통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금형을 깎을 때 불순물이 나오지 않는 특허기술이다. 삼광정밀 박상수 대표는 이 기술로 기술혁신산업포상(2004)을 받았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다. 숨은 기업은 촉수를 세우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국경제를 지탱하는 강소기업을 발굴·육성하는 건 정부의 책무다. ‘보이지 않는 영웅’을 정부가 직접 조명해야 한다는 얘기다. 더 시스템 김성훈 대표는 “우리 활약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창신정밀 신창렬 사장은 “정부의 부품소재업체 지원책 효과가 중소기업에까지 내려왔으면 한다”며 작은 바람을 내비쳤다.
가마우지 경제. 일본이 우리를 비꼴 때 쓰는 용어다. 새의 목을 끈으로 묶으면 애써 잡은 물고기를 삼키지 못하고 주인에게 뱉어내듯 ‘한국이 완성품을 제아무리 많이 팔아도 결국 일본에 돈을 헌납하는 격’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일본 부품을 사용한 한국 제품의 수출이 늘면 늘수록 일본 부품업계의 수익도 커진다는 얘기다. 일본만이 아니다. 이제 중국이 가마우지 경제를 운운하며 한국을 풍자할 수 있다. 뿌리가 부실하면 가지가 썩는다. 알찬 과실을 기대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강소 부품소재기업을 육성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래야 ‘메이드 인 코리아’가 바로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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