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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HION LEGEND >> 그의 화신이 아직도 춤춘다

FASHION LEGEND >> 그의 화신이 아직도 춤춘다

트리노 베르카데는 지난해 세상을 떠난 영국 디자이너 알렉산더 매퀸이라면 모르는 게 없다. 적갈색 머리에 스키니진을 입은 걸어다니는 컴퓨터라고 할까? 말투가 부드러우면서도 솔직한 그녀는 매퀸[흔히 ‘리(Lee)’라는 이름으로 불렸다]이 고용한 첫 번째 직원이었다. 베르카데는 1990년대 초 매퀸이 런던 혹스턴 스퀘어 근처에 허름한 스튜디오를 차리고 그 위층에서 복지수당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초창기부터 그와 함께한 아주 가까운 친구였다. 그녀는 지난해 매퀸이 메이페어 지구의 100만 달러짜리 아파트에서 목을 매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요즘 베르카데는 매퀸의 창작물을 정리한다. 그의 기성복을 낭만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하며, 병적이면서도 숭고하게 만든 복잡한 요인을 분류하고 설명하는 작업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의상연구소에서 오는 5월 4일부터 매퀸의 회고전[‘알렉산더 매퀸: 야생의 미(Alexander McQueen: Savage Beauty)]이 열릴 예정이어서 지난 몇 개월 동안 특히 바빴다.

매퀸은 연극을 연상케 하는 대담하고 파격적인 패션쇼로 유명했다. 살아있는 늑대를 등장시키고, 모델 케이트 모스의 홀로그램 이미지를 무대 중앙에 투사해 마치 유령이 나타난 듯한 효과를 내는 등 다양한 수단이 동원됐다. 베르카데는 이렇게 설명했다. “리는 패션쇼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의상과 무대연출, 음악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컬렉션이 완성된다고 봤다. 사람들이 이해하고 못하고는 상관하지 않았다. 리의 작업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성적이었다. 그는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희석되기를 원치 않았다.”

극적인 무대연출과 마법 같은 첨단기술은 디자이너로서 매퀸의 능력을 돋보이게 했다. 그는 패턴 없이 근사한 드레스를 만들어낼 만큼 솜씨 좋은 재단사이기도 했다. 또 근로계층 출신이라는 배경과 거칠고 무례한 태도 등 개인적 특성은 그를 위험하면서도 매력적인 존재로 비치게 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의상연구소에서 매퀸의 회고전을 연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재능을 증명한다. 이 연구소는 전통적으로 살아있는 예술가의 작품을 전시하지 않는다.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된 디자이너의 회고전을 여는 경우도 드물다. 1997년 이탈리아 디자이너 잔니 베르사체가 살해된 지 5개월 만에 열린 회고전이 가장 최근의 사례다. 하지만 큐레이터 앤드루 볼튼은 매퀸의 아틀리에가 없어지기 전에, 그리고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거나 변질되기 전에 그의 회고전을 열고 싶었다.

매퀸은 1992년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대 미술·디자인학과 석사과정 졸업작품으로 처음 주목받았다. 어두우면서도 관능적인 분위기의 이 컬렉션은 영국 언론의 주목을 끌었고 영향력이 막강한 괴짜 패션지 편집장 이사벨라 블로를 사로잡았다. 그 후 블로는 매퀸의 친구이자 후원자가 됐다. 매퀸은 곧 ‘범스터(bumster)’ 바지(엉덩이 고랑이 보일 정도로 허리선을 낮춰 만든 바지)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패션지 관계자들은 이 실루엣이 점잖빼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 의도로 제작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르카데는 낮은 허리선으로 여성의 몸통을 연장시켜 키가 더 커 보이고, 더 힘있게 보이도록 하는 게 매퀸의 목표였다고 말했다.

매퀸은 곧바로 기성 패션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명품업체 구치 그룹(현 PPR 그룹)은 매퀸의 회사에 투자해 향수 라인과 제2의 브랜드 개발 등 사업확장의 토대를 마련해줬다. 하지만 이런 성공의 이면에는 스트레스와 고뇌, 개인적 비극이 있었다. 매퀸의 든든한 후원자 블로가 2007년 자살한 데다 어머니 조이스마저 2010년 2월 세상을 떠났다. 매퀸은 어머니의 장례식 전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당시 나이 40세).

그로부터 약 1년이 흐른 뒤 런던 하늘에 겨울안개가 자욱하던 날 기자는 베르카데의 안내로 매퀸의 자료실을 찾았다. 클러큰웰 거리의 알렉산더 매퀸 본사에서 멀지 않은 한 건물에 있는 그 자료실은 이동식 선반이 가득한 평범한 창고 같은 방들이었다. 이번 전시회에 선보일 작품 대다수가 이곳에서 나왔다. 작품의 양은 방대하지만 매퀸의 초기 작품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초기 작품 대다수가 그의 작업에 노동력을 제공한 사람들에게 보수로 주어졌다(베르카데도 당시 작품을 적잖이 가졌다). 때때로 매퀸은 작품을 해체해 그 옷감을 다음 컬렉션에 사용하기도 했다. 불경기 때 성년이 된 그는 언제나 재료를 귀하게 여겼다. 동네 식당 쓰레기 봉투에서 찾아낸 홍합 껍데기나 여름휴가 때 해변에 버려진 밀짚 돗자리도 기꺼이 재료로 사용했다.

다른 많은 디자이너처럼 매퀸도 어린 시절부터 의상 스케치를 했다. 그래서 게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와 사이가 매우 가까웠다. 그를 잘 아는 사람 중 일부는 어머니의 죽음을 그의 자살 원인으로 꼽았다. 아버지는 택시기사였고 그의 가족은 공공주택에서 살았다. 매퀸은 늠름하지도, 카리스마가 넘치지도 않았다.



보그지 영국판의 수습기자 시절 매퀸을 처음 만난 뒤 그의 친구가 된 플럼 사이크스(매퀸은 나중에 그녀의 결혼식 때 드레스 자락이 1.5m나 되는 웨딩드레스를 만들어줬다)는 그의 첫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매퀸이 잡지 사진 촬영용으로 의상을 가져왔는데 그 의상보다 그의 외모와 차림새가 더 놀라웠다. 투박한 체크무늬 셔츠에 멋없는 싸구려 청바지를 입고 허리춤엔 긴 열쇠고리를 매달았다. 게다가 살도 꽤 쪄 보였다. 영락없이 무직자 불량배 같았다.”

“매퀸은 멋을 부리려 들지 않았다”고 사이크스는 말했다. 옷 만드는 기술보다 칵테일 파티에서 말솜씨가 더 뛰어나 보이는 겉멋 든 젊은 디자이너들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는 근로계층 출신이라는 자신의 뿌리를 꽤 자랑스럽게 여겼던 듯하다.” 매퀸의 성장배경이 그의 진로에 미친 영향은 사실이지만 부풀려진 측면도 있다.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수업료가 비싼 디자인학교에 다니는 대신 새빌가(街)의 양복점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 또 극장 무대의상 담당자 밑에서 일하면서 연극의 감각을 익혔다. 그리고 나중에 지방시에서 오트 쿠튀르 컬렉션 디자이너로 일할 때는 관능적이고 여성미 넘치는 디자인을 마스터했다. 세상을 떠날 즈음 매퀸은 “이스트엔드(런던 동부의 옛 빈민가)에서 자라나 드레스 귀족이자 스타인 동시에 유력인사가 됐다”는 찬사를 들었다.

런던 리츠 호텔에서 열린 전시회 시사회에 참석한 사만다 캐머런 영국 총리 부인과 영국패션협회의 한 대사는 매퀸이 “영국의 가장 위대한 패션 디자이너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또 이번 전시회가 문화교류의 장이며 매퀸의 작품은 외교적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 그의 작품은 결코 외교적이 아니다. 매퀸의 컬렉션은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을 옹호하는 슬로건 같은 역할을 한다. 그의 의상은 과거 역사를 되돌아봤다는 점에서 정치적이었다. ‘하이랜드 레이프(Highland Rape)’ 컬렉션에서는 영국의 스코틀랜드 정복 문제를 다뤘다. 그는 또 공격적인 컬렉션들로 성차별에 대항했다. 매퀸은 이런 컬렉션이 여성에게 권한을 실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자부했지만 패션쇼의 이미지 자체는 여성을 비인간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최고급 살롱에 드나들 만큼 성공한 뒤에도 영국인들이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깔보는 듯하면서도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사실 그의 의상은 인생의 부당함과 잔인함,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종말을 직시하는 차가운 사실주의적 경향을 띠었다. 팬들은 그런 고뇌가 빚어내는 아름다움에 끌렸다. 매퀸의 친구이자 상담 상대였던 미술가 제이크 채프먼은 이렇게 말했다. “리는 패션의 피상성과 죽음의 아름다움을 결합했다. 그의 작품이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자기파괴적 경향 때문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산산조각난 한 사람을 봤다.”

매퀸의 패션쇼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2004년 봄 컬렉션 쇼는 시드니 폴락 감독의 1969년 영화 ‘그들은 말을 쏘았다’를 바탕으로 했다. 이 영화는 대공황 시절 미국인들의 갈망과 강박관념을 표현한 가슴 아픈 작품이다. 마라톤 댄스 대회(참가자들은 쉬지 않고 춤을 춰야 하며 끝까지 버티는 이에게 상이 돌아간다)에 참가한 사람들이 상을 받으려고 필사적으로 춤을 추면서 육체적·정신적으로 지쳐 가는 과정을 그렸다. 이 작품은 한 가지 도발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불행에 처한 사람을 구해주는 것과 헛된 희망으로 상처받고 망가지도록 놔두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친절한가?” 하는 질문이다.

매퀸의 패션쇼에서는 모델과 전문 무용수들이 끝없이 원을 그리면서 나무로 된 플로어 위를 누비며 춤췄다. 그들의 도약과 회전은 때때로 우아하고 감동적이었지만 대체로 어색하고 섬뜩한 느낌을 줬다. 의상은 늘 그랬듯 신비스러울 정도로 멋졌다. 천 조각을 정교하게 이어 붙인 드레스는 누더기처럼 남루해 보였고, 광택을 잃은 반짝이 장식들로 축 늘어진 시폰 드레스는 슬픔을 자아냈다.

매퀸은 인생의 가혹함을 날카로운 시각으로 보여줬다. 어쩌면 그런 측면을 솔직하게 인정할 사람들은 근로계층(혹은 몹시 곤궁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뿐일지 모른다. 존 갈리아노부터 랠프 로렌까지 다른 디자이너들은 모두 근로자와 출세를 꿈꾸는 회사원들을 낭만적으로 미화했다. 하지만 매퀸은 그들의 굳은 살 박인 손과 피투성이가 된 발, 조각난 존엄성을 강조했다.

“리는 예술(그의 경우엔 패션)이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개념을 깔아뭉갰다”고 채프먼은 말했다. “그는 패션의 피상성을 뛰어넘는 야망과 아이디어를 지녔다.”

전시회는 5월 4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의상연구소의 연례 봄 축제 행사와 함께 개막된다. 이처럼 떠들썩한 국제적 사교 행사에서 근로계층 출신이라는 배경이 자부심과 영감, 분노와 좌절감의 원천이었던 디자이너를 추모한다니 아이러니컬하다.

“그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고 채프먼은 말했다. “그는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이 처한 상황에 의분을 느꼈다.” 매퀸의 작품엔 노골적인 정직함이 가득했다. 그것들은 미추(美醜)를 초월해서 끊임없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번역 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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