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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s 40 Richest >> 1조 巨富 김준일 락앤락 회장

Korea’s 40 Richest >> 1조 巨富 김준일 락앤락 회장


남대문, 홈쇼핑, 중국 등 가는 곳마다 기록을 쏟아낸다. 락앤락을 전 세계 주방 냉장고에 채워 넣고 있는 김준일(59) 회장 이야기다.

홈쇼핑 역사에서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전설이 있다. 락앤락 밀폐용기 세트가 분당 1000만원 매출을 올린 기록이다. 2001년 처음 홈쇼핑에 등장한 락앤락은 방송을 타자마자 30분 만에 준비한 2000세트가 매진됐다. 다음 방송엔 두 배인 4000세트를 내놓았지만 순식간에 다 팔렸다. 이는 9회 연속 매진이라는 대기록으로 이어졌다. “처음 매진됐을 때만 해도 운이 아닐까 싶었어요. 하지만 두 번째 매진된 것을 보고 성공을 직감했죠.”

4월 6일 락앤락 신화를 일군 김준일 회장을 만난 곳은 서울 서초동의 5층짜리 락앤락 본사. 지하 회의실에서 만난 김 회장은 1조원의 거부라고 보기엔 소탈한 모습이었다. 그는 “1978년 사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사무실이 이 근처였다”며 “당시 창업 멤버라고 해 봤자 나 혼자였다”고 돌이켰다. 김 회장은 대구에서 3남4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사업으로 큰돈을 번 아버지 덕택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60년대였지만 집에 BMW 오토바이와 독일제 수제 피아노인 쉼멜이 있었다. 그는 “거실 벽엔 르네상스풍의 유화가 걸려 있었고, 취미로 승마를 배웠다”고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의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고달픈 10대를 보내야 했다. 고등학교 졸업도 여의치 않았다. 졸업장은 검정고시로 대신하고, 방송통신대를 다니며 돈을 벌었다. 그는 “쇠도 뜨거운 물과 찬물을 오가며 단단해지듯 이 시기가 나를 탄탄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1978년 ‘수입 자유화 조치’가 발표됐다. 김 회장은 본능적으로 돈이 되겠다는 생각에 수입업에 뛰어들었다. 국진유통이란 회사를 세운 후 주방용품, 욕실제품 등을 수입해 팔았다. 무대는 남대문시장. 그는 “당시 남대문에서 날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며 “200가지 제품을 수입했는데 그중 196가지가 성공했으니 상인들이 얼마나 좋아했겠느냐”고 반문했다. 성공 확률 98%. “지금도 남대문에선 깨지지 않는 기록일 거예요. 말 그대로 ‘Unbreakable Record’지.”

그의 성공 비결은 ‘현장’에 있다. 사무실은 서초동이었지만 대부분 시간을 남대문시장에서 보냈다. 주부가 뭘 필요로 하는지 눈여겨본 후 곧바로 도쿄, 밀라노 등지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찾아다녔다.

김 회장은 “어린 시절 고급 문화를 접하며 체득한 미적 감각이 도움이 됐다”며 “지금도 내 승인 없이 나가는 디자인은 하나도 없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수입된 제품들은 남대문은 물론 백화점과 할인점에 유통됐다. 한 달에 강남 아파트 한 채 값을 벌어들였을 만큼 승승장구했다.

성공한 제품으로 돈을 벌었다면 실패한 제품에선 마케팅을 배웠다. 그가 히트를 못 시킨 4개 중 하나가 이탈리아산 고급 수세미였다. 김 회장은 그 수세미의 품질에 반해 로마까지 가 독점 계약을 따냈다. 부푼 꿈을 안고 귀국했는데, 때마침 두산에서 3M 수세미를 내놨다. 두산에선 TV광고까지 하며 3M 수세미를 대대적으로 알렸다. 김 회장은 “품질은 우리가 좋았지만 인지도에서 밀렸다”며 “광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세계 최고 법랑 제품으로 꼽히는 아라비아핀란드도 수입했지만 실패했다. 아라비아핀란드 제품은 일반 법랑과 달리 스테인리스 테두리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테 안에 이물질이 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김 회장은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는데 소비자가 받아들이지 못했다”며 “너무 앞선 제품도 소비자가 알지 못하면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을 배웠다”고 밝혔다.



파는 게 아니라 소비자가 사는 것김 회장이 락앤락을 개발한 것은 1998년. 당시 밀폐용기들은 몸체가 딱딱하고, 뚜껑은 부드러운 재질로 만들어 꽉 끼우는 실(seal)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김 회장은 “양쪽으로 잠그는 락(lock) 형태의 밀폐용기도 있었지만 우리처럼 네 군데서 잠그는 제품은 없었다”며 “한 손으로 열고 닫을 수 있는 것도 강점이었다”고 말했다. 품질에 비해 시장 반응은 냉담했다. 기대했던 매출의 20%도 올리지 못했다. 그는 남대문에서 그랬듯이 곧바로 사무실 근처 도곡동 월마트로 달려갔다. 그는 “문제가 터지면 항상 현장에 답이 있기 마련”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제품이 전시된 근처 기둥에 기댄 채 소비자 표정만 2시간 관찰했다. 제품을 처음 만진 소비자들은 신기하게 여겼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신제품에 대한 두려움이 표정에 묻어 있었다. 아라비아핀란드가 실패한 것과 같은 이유였다. 제품을 설명할 판매사원을 배치했다. 3500만원이었던 매출이 3억5000만원으로 10배가 뛰었다. 하지만 매출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은 고스란히 판매사원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렇게 팔아선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락앤락을 아무런 홍보 없이 이탈리아 수세미처럼 실패하게 놔둘 순 없었다. 제품의 우수성을 한번에 알리는 데는 방송이 제격이지만 이름 없는 중소기업이 국내 홈쇼핑 벽을 뚫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캐나다 바이어로부터 세계 최대 홈쇼핑 채널인 QVC에 소개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락앤락을 들고 미국 마이애미로 날아갔다. 홈쇼핑에 소개할 ‘인포머셜(Infomercial·정보성 광고)를 제작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국내엔 인포머셜이라는 용어도 생소했다. 하지만 광고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잘한다는 제작사를 찾아갔다. 인포머셜 한 편을 찍는 데 건넨 돈은 23만 달러. 하지만 매일 수십 명의 판매사원을 고용하는 것보다는 덜 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물속에서도 젖지 않는 지폐’ 광고다. 지폐를 넣은 락앤락을 물속에 한참 넣었다 꺼내 뚜껑을 열었지만 지폐엔 물 한 방울 묻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주문이 폭주했고, 준비한 5000세트가 순식간에 팔렸다. 이후 락앤락은 대서양을 건너 유럽 홈쇼핑에서도 인기를 누렸다. 해외에서 성공하자 국내 홈쇼핑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그는 “기계를 증설해 공급을 늘려도 수요를 따라갈 수 없었다”고 밝혔다. 2003년엔 국내에서만 1억 달러 매출을 올렸다. 김 회장은 “당시 국내 밀폐용기 시장 규모가 8000만 달러였는데 우리로선 다음해 장사까지 해버린 셈이 됐다”고 말했다. 번 돈은 해외 수입사들에 마케팅 비용으로 나눠줬다. 판을 더 키운 것이다.

그는 지금도 배워야 강해진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지식은 도구에 불과하다”며 “정작 결정할 때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감각이 작용한다”고 말했다. 문제가 생길 때도 직원들에게 매뉴얼을 보지 말고 현장으로 달려가라고 한다. 관리자도 10년은 해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틈만 나면 ‘물건을 판다고 생각하지 말고, 제품을 설명한다고 여겨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물건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대문에서 홈쇼핑까지 탄탄대로를 걸어온 것만은 아니다. 그는 1985년 공장을 세우고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모든 게 잘 풀리다 보니 지루해 공장을 지었죠.” 수입업의 한계는 자신의 브랜드가 없다는 것이다. “테팔을 수입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결국 테팔이 한국에 직접 진출하면서 기껏 키워놓은 브랜드를 넘겨줬어요. 그것을 보며 내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락앤락 제품들의 디자인을 꼼꼼히 챙기는 김준일 회장.

그는 공장에 들어갈 설비를 모두 고급 일본제로 채웠다. 안정된 외화였던 스위스프랑을 씨티은행에서 대출 받아 결제했다. 하지만 1985년 전 세계 통화 중 유일하게 엔화와 스위스프랑만 급등했다. 1년에 70%가 올랐다. 갚아야 할 원금은 계속 불어났다. 그는 “1회전 시작하자마자 카운터펀치를 한 방 맞았다”고 비유했다.

공장 상황도 최악이었다. 1980년대 중반은 노사분규가 유행처럼 번져나가던 시기였다. 3년 사이 직원 급여가 두 배가 됐다. 결국 회사 지분을 팔고 수입업에 다시 뛰어들었다. 남대문 상인들은 그가 돌아온 기념으로 ‘컴백 오더’를 내줬다. 가까스로 재기한 후 공장을 재인수했다. 대신 기계와 관련된 작업은 아웃소싱했다. 그는 “제품 개발과 디자인, 마케팅에 집중해 성공했다”고 말했다.



아무리 돈 벌어도 지루하면 안 돼1997년 외환위기 때 또 한번 위기가 찾아왔다. “매출이 절반씩 떨어지는데, 이러다 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어요. 자금력은 좋았지만 생산 주기가 짧은 제품이 많아 불안한 상황이었죠. 시장 규모가 되면서 지속적으로 히트할 수 있는 브랜드가 필요했어요.”

1년 동안 전 세계 박람회를 누비며 ‘올인’할 만한 제품을 찾아다녔다. 24개의 리스트가 만들어졌다. 과거 경험에서 얻은 감각으로 계절성 상품이나, 나라마다 규격 기준이 다르거나, 잘 깨지거나, 무거운 제품들을 하나씩 지웠다. 딱 하나가 남았는데 다름 아닌 밀폐용기였다.

들뜬 마음으로 조사에 들어갔다. 전 세계 밀폐용기 공장만 10만 개가 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밀폐용기 회사가 1위 기업인 타파웨어의 실 타입을 따라 했다. 그는 ‘컨셉트가 다르면 10만대 1이 아니라 일대일로 붙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잠그는(locking) 스타일의 락앤락이다.

현재 락앤락은 미국 타파웨어·러버메이드에 이어 세계 플라스틱 밀폐용기 시장에서 7.2% 점유율을 자랑한다. 하지만 회사 매출 중 밀폐용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30%에 불과하다. 스테인리스 냄비, 수납함, 음식물쓰레기통 등 주방용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인 까닭이다. 지난해 매출도 아웃도어용품, 수납함인 리빙박스 등이 큰 폭으로 성장했다. 김 회장은 “1978년 당시 수입했던 제품들을 하나씩 생산하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다. 밀폐용기의 경우 직접 생산해 품질을 관리하고 나머지 제품들은 아웃소싱해 내놓는다. 아웃소싱도 원칙이 있다. 공장 하나는 직접 세워 생산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해보지 않고선 품질 관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매출보다 브랜드가 중요현장을 중시하는 그는 따로 운동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공장과 매장에서 걸어 다니는 거리가 보통 사람들이 러닝머신 타는 정도는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요즘은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출장으로 보낸다. 현재 110개국에 수출하고 있는 락앤락은 해외 매출 비중이 70%에 달한다. 특히 중국시장 매출이 전체의 40%를 차지한다. 중국 진출 첫해인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연평균 139%씩 성장했다.

김 회장에 따르면 상하이 같은 대도시에서 락앤락 인지도는 99%에 달한다. 타파웨어 같은 글로벌 브랜드보다 이미지가 좋다. 중국에 진출하려는 다국적 기업들의 롤 모델이 될 정도다. 김 회장은 “중국에선 집에 초대한 손님들에게 냉장고를 열어 우리 제품을 자랑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고속성장과 브랜드 파워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도 현장에서 나왔다. 락앤락은 CJ오쇼핑과 중국 SMG방송이 합작해 만든 CJ동방홈쇼핑의 개국 방송에 소개되며 중국에 진출했다. 그는 당시 콜센터에서 걸려온 문의 내용을 분석했다. 내용의 60% 이상이 한국에서 만든 제품이냐는 것이었다. ‘메이드 인 차이나’는 싸구려, ‘메이드 인 코리아’는 고급 제품이란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중국산을 팔다가는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죠.”

락앤락은 중국에 공장이 있지만 관세와 운임을 내면서까지 한국에서 생산한 제품을 가져다 팔았다. 중국에서 만든 것은 일본과 유럽에 수출했다. 4년이 지난 2008년에야 중국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현지에 팔았다. 베이징올림픽 이후 자국 생산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진 점을 감안한 것이다.

진출 초기엔 임차료가 비싼 상하이 번화가 한복판에 으리으리한 직영점을 냈다. 그는 “중국 현지에서 소비자를 지켜본 결과 그 어떤 나라보다 고급 브랜드를 선호한다는 것을 알았다”며 “고급 이미지는 제품 자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것이 전시된 공간에서 나온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걸림돌도 있었다. 중국에 진출하자마자 복제품이 200곳에서 쏟아졌다.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고 신제품 개발 속도를 높이며 대응했다. 락앤락에선 현재 90명의 연구개발 인력이 하루 두 개의 신제품을 낸다. 그는 “복제품들이 시속 50㎞로 따라오면 우리는 60㎞로 달리면 된다”고 말했다.

최근 그가 주목하고 있는 곳은 동남아시아. 베트남의 경우 진출 4년을 맞은 내년에 1억5000만 달러의 매출을 예상하고 있다. 김 회장은 “중국 진출 초기 3년 동안 30배가 늘었다”며 “동남아와 같은 이머징마켓에선 매년 세 배씩 늘 것”이라고 자신했다.

김 회장이 벤치마킹하는 다국적 기업은 P&G와 이케아다. 그는 “P&G처럼 해외에 직접 진출해 영업을 하고, 이케아처럼 직영점을 내 시장을 공략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라며 “이를 통해 글로벌 종합 주방용품 기업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근엔 홍콩 증시 상장을 검토했다가 연기했다. 그는 “중국에서 순이익률이 두 배 이상 증가하고, 동남아시장이 중국만큼 커졌을 때 상장하겠다”고 말했다.

락앤락은 지난해 전년 대비 39% 증가한 388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올해 매출 목표는 5500억원이다. 중국에 방송되는 홈쇼핑 채널이 늘고 있고, 동남아에서도 실적이 개선되고 있는 점을 반영했다.

시장이 커지고 있는 만큼 올해 300명의 신규 채용을 계획하고 있다. 인재를 잡기 위해 대졸 초임을 25% 인상할 예정이다. 김 회장은 “우리 회사에서 인재는 안정된 시장이 아니라 떠오르는 곳으로 보낸다”며 “지금 인재들이 몰려 있는 곳은 동남아”라고 밝혔다.

김 회장은 향후 10년 동안 매년 20%씩 영업이익을 높이고, 40%씩 매출을 늘리겠다는 목표다. 2020년엔 매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겠다는 포부다. 가능하겠냐는 질문에 “내 전공이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이라고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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