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THE U.S. security ] 퍼트레이어스의 ‘새로운 전쟁’

[THE U.S. security ] 퍼트레이어스의 ‘새로운 전쟁’


그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으로 대테러전 교범을 직접 썼다. 이제 CIA 국장으로서 미래의 위협에 맞서도록 조직을 정비해야 한다

2010년 6월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대장은 미 중부군 사령관이었다. 미군 최고위직 중 하나다.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바로 몇 분 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 스탠리 매크리스털 대장을 해임했다. 매크리스털은 백악관의 아프가니스탄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해 설화를 일으킨 뒤 사임을 표명한 터였다.

퍼트레이어스는 착잡한 마음으로 백악관의 좁은 계단을 올라가 대통령 집무실로 연결된 짧은 복도로 향했다. 마침 백악관 국가안보팀이 대통령 집무실을 나서는 중이었다.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리언 패네타 CIA(중앙정보국) 국장 등 모두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환자에게 암선고를 내리려는 의사처럼 그의 시선을 피했다.

집무실엔 오바마 대통령 혼자였다. 오바마는 퍼트레이어스에게 벽난로 곁의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앉자마자 오바마는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군통수권자로서 귀관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겠소.” 퍼트레이어스도 한마디로 대답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전장으로 되돌려 보내는 인사는 형식으로 보면 좌천이었다. 그런데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아흐레 뒤 충직한 장군 퍼트레이어스는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짐을 풀었다.

13개월이 흐른 지금, 퍼트레이어스(58)는 CIA의 수장으로 귀환한다. 백악관에서 대통령의 명을 받들던 그날 이후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아프가니스탄의 안정화가 어느 정도 이뤄져 간다는 희망적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4년 전 이라크에서도 비슷한 일을 해냈다. 흉포한 유혈 현장을 좀 더 관리 가능한 풍경으로 바꿔 놓았다. 정치적 내분과 만성적이지만 비교적 소규모의 폭력 수준으로 사태를 관리했다. 이라크든 아프가니스탄이든 전면적인 재난을 모면하는 일만 해도 오바마 행정부에 철군의 명분을 주는 ‘승리’로 비치기에 충분했다. “늘 말했듯이 아주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은 일”이라고 퍼트레이어스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말했다(뉴스위크는 최근 그와 여러 차례 인터뷰를 했다). “지금도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키 175㎝, 몸무게 68㎏, 장거리 달리기와 팔굽혀펴기로 단련된 바위처럼 단단한 체격. 퍼트레이어스는 카불의 에드워드 7세 시대(20세기 초 영국)에 지어진 별장에서 전쟁을 지휘했다. 주변은 사무실과 숙소로 개조한 2층 화물 컨테이너가 미로처럼 에워쌌고, 그 외곽은 대규모 화력이 배치된 높은 담벽과 가시 철조망이 둘러쳤다. 퍼트레이어스가 어디를 가든 노트북 컴퓨터 세 대를 짊어진 부관이 따라붙는다. 하나는 일반 e-메일용, 하나는 미국 국가 기밀용, 나머지 하나는 국제안보지원군(ISAF) 기밀용 컴퓨터다. 이제 미국 버지니아주 랭글리(CIA 본부)에 가면 대부분 그는 부관 없이 혼자 그런 일을 챙겨야 한다. 하지만 퍼트레이어스는 오래전부터 CIA 국장에 적합한 자질을 쌓아 왔다. “그는 미국의 위대한 전투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될 인물”이라고 2008년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이 말했다. “우리 세대의 걸출한 군인 겸 학자 겸 정치인이다.” 사실 거기에다 ‘정보 전문가’라는 표현을 덧붙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적어도 2008년 말부터 퍼트레이어스는 ‘은밀한 전쟁(covert warfare)’의 새로운 접근법을 개발하고 무인항공기 기술로 확보한 적군동향의 실시간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애썼다. 이미 미군의 특수전부대(SOF)와 CIA의 특수활동부(SAD)는 공조와 통합의 원칙 아래 파키스탄, 예멘,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중이다. 최근 오바마의 내각 개편(CIA 국장을 지낸 게이츠 국방장관 후임에 현 CIA 국장 리언 패네타를 임명했다)도 그런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는 점을 드러낸다(특히 알카에다와 분파 테러단이 그 표적이다).

퍼트레이어스는 이제 41년의 군생활을 끝냈다. 그는 군에서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CIA 본부의 경화된 관료주의와 맞부닥칠 게 분명하다. 친구이자 정치 동지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민주당)은 그를 두고 “내가 만난 사람 중 품성, 지도력, 정보력을 완벽하게 겸비한 비범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그의 이력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CIA 내부 인사들은 그런 극찬에 고개를 젖는다. 그가 2003년 이라크 모술, 2007년 이라크 전역, 지난해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저항세력 소탕을 이끌었을 때는 단기적 임무 완수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장기적 승리의 조건을 구축하기는 그보다 훨씬 어렵다. 미국 국민이 수천억 달러를 투입해야 하는 수년, 심지어 수십 년에 걸친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를 말한다. 퍼트레이어스 자신도 1987년 박사학위 논문에 이렇게 썼다. “국제분쟁 개입에 관한 한 시간과 인내심이라는 미국의 미덕이 잘 발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특히 베트남전이 뼈아프게 일깨워줬다.”

아프가니스탄 주둔군 사령관의 임기 막바지에 그는 공식·비공식 환송회로 주의가 산만한 와중에도 지금까지 쌓아 올린 성과가 물거품이 되지 않도록 하려고 무척 애썼다. 그의 후임자 존 앨런 중장은 내년 늦여름이 되면 3만3000명이 줄어든 주둔군으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의 단계적 철군 목표 때문이다. 퍼트레이어스는 다양한 부대와 참모 중에서 일부를 차출하고 일부 부대는 전체를 귀환시키는 등 복잡한 구조개편을 모색했다. 아울러 아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아프간 정부군 7만 명이 순차적으로 미군을 대체해야 한다.

게다가 사령부 담장 너머의 현실은 여전히 불안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유혈 사태도 있다. 지난 6월 말엔 탈레반이 수도 카불의 중심가에 위치한 인터컨티넨털 호텔에서 자살폭탄 공격을 감행해 경찰 두 명을 포함해 12명이 숨졌다. 퍼트레이어스가 아프가니스탄을 떠나기 직전엔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의 이복동생 아메드 왈리 카르자이가 자신의 경호원에게 피살됐다. 오랫동안 탈레반과 아편 무역의 근거지였던 칸다하르주에서 주의회 의장을 지낸 아메드는 대부분 불미스러운 평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저항세력 소탕 작전에 필수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CIA 공작원으로 일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이제 누가 그를 대신할까?

퍼트레이어스는 오래전부터 군이 정보 수집과 분석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촉구했다. “우리가 전쟁을 치르는 현지의 사회, 우리가 지원하는 정부, 우리가 싸우는 적의 속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너무도 부족하다”고 그는 논문에 썼다. 2008년 그는 중부군 사령관으로 발령받은 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관한 질 좋은 정보가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곧 국가정보국장을 설득해 정보수집 시스템 전반을 개선하도록 하는 동시에 중부군 사령부 안에 특수팀을 만들어 독자적인 정보 분석을 제공케 했다.

그러나 앞으로 치를 전쟁은 그가 줄곧 주창했던 ‘민심 확보’ 전략과는 판이한 ‘은밀한 전쟁’이다. 그 전쟁에선 첨단 기법으로 적대적인 인물을 색출해 제거하는 쪽에 초점이 맞춰진다. “기존의 지상전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그가 설명했다.

내전 직전으로 치닫는 예멘이 미래 작전의 이상적 모델은 아니다. 하지만 그곳은 미군이 앞으로 수행해야 할 새로운 작전의 중요한 시험대였다. 퍼트레이어스는 중부군 사령관 시절 예멘의 비밀전투 계획을 이끌었다. 미 특수전부대(SOF)의 ‘백군’(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랙 부대와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레인저 부대)이 예멘의 특전대원들을 훈련했다. 한편 미 특수전 부대의 ‘흑군’(델타포스, 네이비실 6팀 등)은 현장에서 예멘인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CIA의 준군사조직인 특수활동부(SAD)도 현장에 투입됐다. 미 국방부의 합동특수전사령부(JSOC)는 무인항공기로 그들을 지원했다. 일부는 공격기로 미사일을 장착했고 일부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소형인 정찰기였다.

당연하게도 퍼트레이어스는 새로 맡을 CIA 국장의 임무를 설명하면서 국가비밀활동부(NCS)에 초점을 맞췄다. 첩보요원을 모집하고 현장에서 비밀활동을 수행하는 CIA의 한 부서다. 퍼트레이어스는 오는 9월 6일 CIA 국장에 취임하면 모든 첩보요원을 한자리에 불러 회의를 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그들을 최대한 활용하고 그들이 나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하겠다.”

퍼트레이어스는 현장 첩보원들이 상당히 예민하다는 점을 잘 안다. 이미 많이 만나봤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는 극진한 보살핌이 핵심”이라고 그가 말했다. 최고의 첩보원 운영자는 벤처기업가처럼 생각해야 하고 독립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그들을 양성해야 한다. 그들이 경주마다. 경주마는 애정 어린 보살핌이 필요하다.”

그러나 CIA의 작전만 중요한 게 아니다. 정보분석 측면에도 지대한 관심을 쏟아야 한다. 지난 사반 세기를 돌아보면 전술적 성공도 많았지만 전략적 실패가 놀라울 정도로 많았다. 지난 10년 동안 CIA가 알카에다의 위협과 관련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다면 어쩌면 9·11 사태도 없었고, 애초에 아프간 전쟁을 치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대량살상무기(WMD)를 가졌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CIA가 확실히 못박았다면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게다가 최근 CIA는 ‘아랍의 봄’도 예측하지 못했다(아랍의 민중봉기로 중동 전역에서 CIA가 정보 수집과 테러 소탕에 의존했던 독재자들이 몰락했거나 약화됐다).

어쩌면 퍼트레이어스는 그런 뿌리 깊은 문제의 해결에 적격일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말했듯이 이 세상에 보장된 성공이란 없다. 퍼트레이어스의 경우 잘 가꿔진 ‘불패의 후광’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쉽게 성공한 적이 없다.

퍼트레이어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늘 퉁명스럽고 고집 센 늙은 네덜란드인 선장 그대로였다”고 표현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승리 이외에는 어떤 것도 수용해선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 기준에서 약간이라도 벗어나면 얼음처럼 차가운 눈초리와 고성이 쏟아졌다. “성과를 내야지, 성과를!” 그 말이 퍼트레이어스를 계속 몰아붙였다. 그는 베트남전에 참전하기엔 어린 세대로 1974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직후 육사교장의 딸과 결혼한 뒤 고속으로 승진했다. 그러던 중 24보병사단 사령관 존 갤빈 대장이 대위였던 퍼트레이어스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그를 부관으로 발탁했다. 갤빈은 퍼트레이어스에게 ‘인생 역전’이 될 만한 조언을 해줬다. 대학원에 진학하라며 “M60 기관총의 최대 유효사거리를 뛰어넘도록 지적인 조준경을 높여라”고 격려했다.

결국 퍼트레이어스는 프린스턴대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생각이 우리와 달리 돌아가는 정말 뛰어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그가 말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훈은 러처드 울먼 교수가 지도한 국제관계학 과정에서 얻었다. 자신이 참전하지 못한 전쟁에 계속 매료된 퍼트레이어스는 베트남전이 미군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는 리포트를 썼다. 울먼은 B+ 학점을 주며 기를 죽이는 평을 했다. “논문 전체가 꽤 정연하고 장점도 없진 않지만 너무 단순하다.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아버지의 훈계를 잊지 못하던 퍼트레이어스는 울먼 교수에게 다시 쓸 기회를 달라고 했다. 두 번째 리포트는 A+를 받았다. 그 리포트가 1987년 박사학위 논문의 초안이 됐다. 베트남전이 미국에 미친 영향을 검토한 선구적인 논문이었다. 미군이 앞으로 그런 전쟁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그의 첫 생각도 포함됐다. 이제 그는 자신의 학위를 두고 농담을 한다. “박사 학위를 갖고 있지만 내 군 경력에 해가 될까 입을 다물었다”고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이임사에서 말했다. 단순히 재치 있는 농담이 아니었다. 군은 언제나 화려한 학위를 가진 장군보다 “진흙투성이 군홧발 장군”을 높이 산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마침내 퍼트레이어스에게 기회가 왔다. 그가 제101 공수사단장으로 점령한 모술은 자신이 세운 이론을 시험할 시험대 역할을 했다. 현지 정부의 조직과 경제가 마비됐고 나라 전체에 무기와 탄약이 넘쳤다. 사담 후세인의 병사들은 민간인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퍼트레이어스는 모술 곳곳에 병력을 파견해 폭력사태를 저지했다. 최선을 다해 전기, 상하수도, 병원 같은 기초 서비스를 복구했다. 지방 정부를 대체할 선거를 실시하도록 조직을 구축하고 감독했다. 경제를 되살리고 학교를 다시 열었다. 그 결과 모술은 이라크의 다른 도시와 달리 비교적 평화롭고 번성했다. 그러나 오래가진 않았다. 101 공수사단 병력 2만3000명이 1년의 배치 임무를 끝낸 뒤 그들을 대체한 병력은 그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퍼트레이어스가 이룬 모든 성과의 바탕이 된 치안을 유지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결국 모술도 이라크의 나머지 지역처럼 파괴와 폭력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퍼트레이어스는 모술 주둔을 계기로 미군의 가장 혁신적인 장군 중 한 명이라는 명성을 굳혔다. 미국에 돌아가자 피터 슈메이커 육군 참모총장은 그를 캔자스주 포트 레븐워스의 연합부대 사령부(CAC)를 떠맡기며 “우리 육군을 개혁하시오”라고 주문했다. 퍼트레이어스는 그 일도 해냈다. CAC는 육군의 훈련과 전략 개발의 신경중추였다. 퍼트레이어스는 CAC가 “미 육군 전체의 변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고 육군 전투 준비태세의 거의 모든 면을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과정에서 야전교범 3-24 ‘저항세력 소탕’이 만들어졌다(그 분야에서 미 국방부의 바이블이 됐다). 이런 뒤엉키고 지저분한 전쟁에서 승리하는 법을 담은 그 교범을 직접 쓴 퍼트레이어스는 이라크 주둔 사령관으로 다시 바그다드로 파견돼 자신의 이론을 실행에 옮겼다.

현재 나이가 그렇게 많진 않지만 퍼트레이어스는 미군의 이라크 증파를 돌이키며 향수를 느낀다. 혹독하고도 치열한 세 가지 임무(전투, 훈련, 병력 증강)를 수행하면서 미국인만이 아니라 이라크인과도 폭넓은 인맥을 쌓았다. 그러나 지난 1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선 그러지 못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이 더 힘든 전장이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는 카불을 떠나게 돼서 기쁘다고 말하진 않는다. 하지만 후회는 없어 보인다. 군생활 41년을 마감하면서 그는 긴장을 풀 겸 저녁에 비디오를 봤다. 아프가니스탄이 아닌 101 공수사단과 이라크의 비디오였다.

아프가니스탄 사람 모두가 지난 1년 동안 퍼트레이어스가 한 일을 전적으로 고마워하진 않는다고 아프간 최대 언론사 모비 그룹의 사드 모세니 이사가 말했다. “퍼트레이어스 대장이 잘한 일도 많지만 대부분 비난과 맞비난에 가려졌다. 아프간인들은 미군이 민간인을 죽인다고 비난하고 미국인들은 아프간인이 능력이 부족하고 부패했다고 비난한다.” 그런데도 퍼트레이어스의 이임을 많은 사람이 아쉬워한다고 그가 덧붙였다. “그의 명성을 고려할 때 그가 떠난다는 사실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중요성을 격하한다는 인상을 준다.” 특히 그의 이임이 오바마의 단계적 철군 발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제 고향으로 향하는 퍼트레이어스가 CIA 국장직 다음으로는 어떤 삶을 기대할까? 부당한 질문은 아니다. 그는 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울러 2007년 미 의회에서 이라크 증파를 촉구한 그의 운동방식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당시 그는 막후에서 증파를 도모하려고 상원의원 세 명과 긴밀히 협력했다. 공화당의 존 매케인, 린지 그레이엄, 무소속 조 리버먼이었다. “최고의 세일즈맨은 데이브 자신이었다”고 그레이엄이 말했다(그도 공군 예비역으로 이라크에서 복무했다). “상원 회의장 부근의 방에 그를 데려다 놓고 상원들을 붙들고 ‘5분만 시간을 내달라’고 말했다. 그러면 데이브가 한 명씩 상대해 설득했다. 데이브는 저항세력 소탕 전략처럼 복잡한 문제를 단 2분 안에 요약해서 설명했다. 그를 한 번 만나고 나면 성공할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퍼트레이어스의 그런 정치적 수완 때문에 정권을 잡은 오바마 팀은 처음엔 그를 의심했다. 람 이매뉴얼 백악관 비서실장 같은 오바마 측근은 그를 ‘잠재적 위험인물’로 봤다. 그들은 그가 2012년 선거에서 공화당의 백악관 탈환을 이끌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퍼트레이어스는 이매뉴얼을 독대해 그런 우려는 근거 없다고 확신시키고 그들의 두려움을 누그러뜨렸다.

얼마 전 퍼트레이어스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짐을 꾸리면서 퇴역 장군은 직접 출마해서는 안 되고 특정후보를 지지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몇 년 전 한 친구가 그에게 대통령이 된 미국 장군 12명의 이름을 적어 e-메일로 전달하며 하나의 패턴이 보이지 않느냐고 유혹했다. 퍼트레이어스는 그에게 13번째 장군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남북전쟁에서 남군의 리 장군을 항복시킨 윌리엄 테쿰세 셔먼이었다. 셔먼은 “지명되더라도 출마하지 않겠고 선출되더라도 맡지 않겠다”는 유명한 말로 대선 출마 제의를 거부했다. 퍼트레이어스는 CIA 국장 이후의 삶을 가늠하면서 이제 새로운 답변을 마련했다. “물론 프레지던트가 되고 싶다. 프린스턴대 총장(president) 말이다.” 어쩌면 그 소원이 이뤄질지도 모른다.



[With CHRISTOPHER DICKEY and JOHN SOLOMON 번역 이원기]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케이뱅크, 아파트담보대출 등 금리 인하…대환대출 최저 연 3.43%

2HLB 간암 신약 美 승인 불발…"中 항서제약 문제"

3 합참 “북, 동해상으로 미상 탄도미사일 발사”

4'필라이트 후레쉬 점액질' 논란...하이트진로 '세척·소독' 미흡 '행정처분'

5국민은행, 캄보디아 중앙은행과 QR코드 기반 지급결제시스템 구축

6셀트리온, 브라질서 램시마SC 공공의료시스템 등록 권고

7 화면 꺼지고 먹통...‘해결책’ 없어 고통받는 폴스타 차주들

8미국 유학생 취업 비자 어려워졌다∙∙∙미국투자이민으로 영주권 취득 방법 대두, 국민이주㈜ 18일 대구∙25일 서울 설명회

9신한자산운용, 디폴트옵션 펀드 수탁고 1000억원 돌파

실시간 뉴스

1케이뱅크, 아파트담보대출 등 금리 인하…대환대출 최저 연 3.43%

2HLB 간암 신약 美 승인 불발…"中 항서제약 문제"

3 합참 “북, 동해상으로 미상 탄도미사일 발사”

4'필라이트 후레쉬 점액질' 논란...하이트진로 '세척·소독' 미흡 '행정처분'

5국민은행, 캄보디아 중앙은행과 QR코드 기반 지급결제시스템 구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