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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 Issue 저축은행 어떻게 살릴까] ‘서민은행’ 거듭나게 먹고살 ‘판’ 깔아줘야

[Hot Issue 저축은행 어떻게 살릴까] ‘서민은행’ 거듭나게 먹고살 ‘판’ 깔아줘야

저축은행 영업정지 조치가 발표된 9월 18일 영업정지와 상관없는 토마토2저축은행에 예금을 인출하려는 고객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은행을 사금고쯤으로 여긴 일부 상호저축은행 대주주·경영진의 행태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 담보가치의 3~4배 넘는 대출을 하고 이를 숨긴 일부 저축은행의 행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불법이자 범죄다. 그래서, 일부의 주장처럼 저축은행을 퇴출해야 할까? 다시 옛날 상호신용금고로 돌려야 할까?

이와 관련해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9월 20일 열린 금융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저축은행 구조조정을 할 때는 선택을 해야 하는데 한꺼번에 시장을 다 부수고 초대형 구조조정을 하느냐, 시간을 두고 연착륙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저축은행 문제는 10여 년간 누적된 것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정부와 금융당국은 일단 저축은행을 살리고 보자는 쪽으로 정책방향을 잡았다. 문제는 그 후다. 많은 전문가는 저축은행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지 않는 한 구조조정 후에도 똑같은 부실 사태가 반복될 것이라고 말한다.

저축은행 사태가 저축은행 대주주·경영진의 도덕적 해이와 불법행위, 금융당국의 감독 소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데 이견은 없다. 하지만 저축은행이 왜 이 지경이 됐는지 구조적·제도적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목소리 또한 적지 않다. 저축은행이 서민금융기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PF(프로젝트 파이낸싱) 같은 고위험 고수익 대출에 주력하다 결국 부실화된 데 근본적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구조조정이나 규제 강화 못지않게 저축은행이 자생할 판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주장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창조한국당 유원일 의원은 “저축은행은 수익모델이 불안정하고 환경이 열악해 구조조정 자체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국내 저축은행은 일반 시중은행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점포와 제한된 인력을 가지고 허가된 영업 구역 내에서만 수익을 내야 한다. 취급할 수 있는 업무 범위도 제한돼 있어 사실상 예금과 대출로만 수익을 내는 구조다. 예금은 소액 거래가 많아 상대적으로 취급 비용이 많이 든다. 대출은 주로 신용 5~9등급 저신용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위험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형 시중은행들이 주택담보대출 같은 소매금융 시장을 장악하면서 저축은행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미소금융’ 같은 정부의 서민금융정책도 저축은행의 영업기반을 위축시켰다. 저축은행 고객과 미소금융 지원 대상이 겹치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은 고객도 빼앗기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건호 KDI(한국개발연구원) 교수는 “정상적으로 서민금융기관에서 신용대출을 받을 수 있는 차주들이 미소금융 제도의 실질적 수혜자가 될 경우 서민금융기관이 우량고객을 빼앗기고 잔류고객의 신용리스크에 직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뿐이 아니다. 저축은행은 신탁과 수익증권 판매, 외국환 업무를 취급할 수 없다. 유가증권 투자한도는 자기자본의 100% 이내로 제한돼 있고 펀드도 팔 수 없다. 중소기업 신용보증제도에도 참여할 수 없다. 고객이 상당수 겹치는 대부업체와 비교해 신용평가시스템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기준으로 105개 저축은행 중 57개만 신용평가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대영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는 『한국경제의 미필적 고의』라는 책에서 “저축은행이 서민금융기관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현행 제도상 당연한 결과”라며 “이 때문에 저축은행이 PF 같은 고위험 고수익 대출에 주력하는 비정상적 금융기관이 됐고 금융당국은 이를 방조해 왔다”고 지적했다.

9월 15일 열린 저축은행 국정조사 장면.

금융당국도 이를 잘 안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최근 국감에서 “저축은행 사태는 오랜 기간 누적된 문제로 한 번의 영업정지로 끝내는 게 아니라 경쟁력 강화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했다. 앞서 금융위는 여신전문 출장소 설립 기준 완화, 우량 저축은행에 대해 할부금융 허용, 지방 저축은행의 수도권 대출규제 완화, 부동산 관련 포괄여신한도 규제에서 부동산임대업 제외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한 ‘저축은행 경쟁력 제고 방안’을 발표한 바 있다.



국회는 ‘채찍 법안’만 발의저축은행이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금융당국의 정책 전환뿐만 아니라 국회의 법률적 뒷받침이 필수다. 하지만 국회는 ‘채찍’에만 치중하는 모습이다. 본지가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분석한 결과 올 9월 23일 현재 18대 국회에서 ‘상호저축은행법’ 관련 의원 발의는 22건. 이 중 2008~2009년에 발의된 9건은 정부가 제출한 ‘상호저축은행법 일부개정법률안’과 묶여 대안폐기(법안의 일부가 국회를 통과해 가결된 것) 형식으로 지난해 2월 국회를 통과했다. 국회의원들이 발의해 국회를 통과한 9건 중에는 저축은행 건전성을 강화하거나 임원 자격 요건과 공시 기준을 엄격히 하는 내용도 포함됐지만 규제를 풀어주는 내용도 적잖게 포함돼 있다. 명칭을 ‘상호저축은행’으로만 쓸 수 있는 법안을 ‘저축은행’으로도 쓸 수 있게 하거나 신용공여한도를 확대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올 들어 저축은행 사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면서 2010년 2건에 불과했던 법안 발의는 올해 10건으로 늘었다. 저축은행을 혼쭐내겠다는 게 대부분이다. 법안 중에는 저축은행이 ‘은행’이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도 있다. 정옥임 한나라당 의원은 6월 말 의원 30명의 서명을 받아 ‘상호저축은행’ 명칭을 예전 ‘상호신용금고’로 변경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저축은행을 일반 은행과 구분하자는 취지다. 현재 명칭은 2001년 3월 상호신용금고법이 상호저축은행법으로 바뀐 이후 줄곧 쓰이고 있는데, 이를 10년 전으로 되돌리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금융위 측은 신중한 입장이다. 익명을 원한 금융위 관계자는 “은행도 아닌 것이 은행 행세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법안”이라며 “고민은 해봐야겠지만 자칫 저축은행을 시장에서 퇴출한다는 신호를 줄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대주주 경영진의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도 많다.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은 대주주에 대한 신용공여 또는 가지급 금액이 50억원 이상인 경우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5억~50억원일 때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을 담은 법안을 발의했다. 신 의원은 “저축은행들이 대주주나 고위 임원들에 대한 불법대출로 경영이 부실해져 금융당국으로부터 영업정지를 당했음에도 이들에 대한 처벌수준은 미약한 실정”이라며 “대주주 등에 대한 신용공여 금지, 개별 차주 등에 대한 한도 초과 신용공여 금지 위반에 대한 처벌수준을 상향 조정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오제세 민주당 의원은 대주주가 저축은행의 이익에 반해 자신의 이익을 목적으로 대출 등 경영과 관련해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 기존 벌금을 강화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기존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상 1억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 중 ‘1억원 이하’를 ‘5억원 이하’로 상향 조정한 것이다. 최규식 민주당 의원은 저축은행 임직원이 비공개 정보를 대주주를 포함한 외부에 누설할 경우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부산저축은행, 삼화저축은행 등 일부 저축은행이 영업정지 조치를 당하기 전에 주요 주주, 친인척, 일부 고객에게 이를 미리 알려 예금을 먼저 빼간 행위 등을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법에는 이를 처벌할 근거가 없었다.



땜질식 구조조정은 부실 반복만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은 금융감독원 재직 당시 수뢰 등 부패행위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공직자가 상호저축은행 임원이 될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또한 최규성 민주당 의원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직급이나 직무 분야에 종사했던 공무원과 금융감독원 퇴직 후 3년이 지나지 않은 사람은 저축은행 사외이사에 선임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을 대표발의했다.

부실·허위 공시를 한 저축은행에 대해 제재를 강화하는 법안도 발의됐다. 권택기 한나라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향후 저축은행은 여신 거래처별로 전 월 말 기준으로 자기자본의 10% 부실대출이 신규로 발생한 경우 2~3개월 내에 공시해야 한다. 금융사고가 발생해 전 월 말 기준으로 자기자본의 5% 이상 손실이 발생하거나 발생이 예상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를 어기거나 허위 공시하면 1년 이하 징역,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광고를 규제하는 법안까지 있다. 이성남 민주당 의원은 이 법안의 제안 이유에 대해 “예금자보호 한도를 표시하지 않거나 후순위채권 등을 판매하며 예금자보호가 되지 않는 부분을 고의로 누락하는 등 금용소비자가 알아야 할 정보를 충분히 전달받지 못해 피해가 증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영업정지된 에이스저축은행 고객이 설명회를 들으며 메모하고 있다.

저축은행이 예금자 보호를 받을 수 없는 후순위채권을 함부로 발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도 발의됐다. 이진복 한나라당 의원은 4월 저축은행이 기한부 후순위채권을 발행하거나 그 밖의 위험성이 내포된 투자를 할 경우에는 금융위원회의 사전승인을 받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된 법안을 발의했다.

국회가 저축은행 대주주 경영진의 불법 행위와 금융당국의 감독 소홀을 질타하는 건 당연하다. 또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마련하는 것이 문제될 것도 없다. 하지만 입법 활동이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처벌 일색으로 일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저축은행은 기로에 섰다. 금융당국이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땜질식 구조조정이나 부실 저축은행 M&A(인수합병) 같은 단기처방으로 저축은행 부실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2001년 이후 반복된 저축은행 사태가 이를 말해준다. 저축은행 대주주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것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많은 전문가는 저축은행이 다양한 수익모델을 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지역기반의 서민금융기관으로 환골탈태할 수 있는 법률과 정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무조건 채찍을 가할 것이 아니라 퇴로를 열어주면서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저축은행 위기 극복의 방향’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지역 서민과 중소기업의 금융을 지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재정립해야 한다”며 “업무영역을 다소 넓일 수 있는 지방은행화를 통해 외환위기 이후 취약해진 지방 중소도시의 가계와 중소기업을 위한 금융 축을 담당하게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전문연구위원은 “저축은행 규모별로 사업영역도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며 “대형 저축은행의 경우는 지역은행 역할을 담당하고 중소형 저축은행은 지역의 기업과 자영업 등을 지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대영 교수는 선진국에 비해 규제가 심한 금융기관 신규 설립의 단계적 자유화를 전제로 “서민금융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호저축은행 제도를 은행 설립이 자유화되는 시점에 맞춰 폐지하고, 기존 상호저축은행은 건전성 확보 등 준비기간을 거쳐 은행으로 전환하는 것이 적절한 대안”이라고 지적했다.



김태윤 이코노미스트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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