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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or] 화폐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여의사

[Collector] 화폐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여의사

정성채

1961년 3월 30일자 동아일보 4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성형외과를 전공한 정성채 여사가 일본 동방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경여자의과대학 출신인 동(同) 여사의 학위논문은 동물별 각종 쇼크 시의 혈액응고 지연 기전(機轉)에 관한 실험적 연구와 수 편의 부논문이다.’

그 시절엔 그랬다. 박사가 귀했기에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돌아오면 신문에 소개되던, 그런 시절이었다. 50년이 흐른 2011년 5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이런 전시가 열렸다. ‘정성채 박사 기증 화폐 특별전-비록 돈이라 할지라도 아름답지 아니한가’.

성형외과 전문의 정성채(89) 박사. 많은 컬렉터가 그렇듯 그와 문화재의 만남도 어찌 보면 우연이었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성형외과 학회 발표 때문에 해외 출장이 잦았다. 1963년 미국 워싱턴에서 학회에 참가했다 돌아오는 길에 영국 런던에 들렀다. 그곳의 한 미장원에서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초상이 디자인된 1실링짜리 주화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100년도 더 된 것이었다. 100년 전의 물건을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했다.

정 박사는 외국에 갈 때마다 그 나라의 화폐를 눈여겨보았다. 모양이 다르고 무늬가 달랐다. 거기엔 저마다의 사연과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것을 발견하는 재미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외국의 화폐를 하나 둘 모으기 시작했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각별한 사연이 재미있었습니다. 외국 화폐 가운데에는 바티칸시 주화와 이탈리아 화폐가 더 관심이 갔고 흥미로워 보였습니다.”



땅 사는 대신 화폐 수집외국 화폐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우리 화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화폐 수집에 나섰다. 당시 그는 잘나가는 성형외과 의사였다. 주변에선 서울 강남 말죽거리에 땅을 사라고 권했다. 하지만 그때 그는 이미 우리 화폐에 빠져 있었다. 주변의 권유와 유혹을 물리치고 화폐 수집에 매달렸다. 돈을 벌어 돈(옛날 화폐)을 사는 데 쓴 것이다.

그가 수집한 화폐는 2800여 점. 그의 컬렉션은 한국 화폐 역사의 전 시대를 망라한다. 우리나라에서 통용된 모든 화폐를 수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인 고려시대 건원중보(乾元重寶)부터 조선 전기의 조선통보(朝鮮通寶), 조선 후기 상평통보(常平通寶), 그리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은행의 화폐까지. 그의 컬렉션은 한국 화폐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는 996년에 제작한 건원중보. 화폐가 본격적으로 유통하기 시작한 때는 17세기 상평통보를 발행한 이후다. 그의 컬렉션을 보면 상평통보도 당일전(當一錢), 당오전(當五錢), 당십전(當十錢), 당백전(當百錢) 등 모든 종류가 다 있다. 2800여 점 가운데에는 조선 후기 것이 2300여 점으로 가장 많다. 기념주화도 빠짐없이 수집했다.

그가 특히 아끼는 것은 1885년 발행한 주석 시주화(試鑄貨), 1892년에 발행한 오량 은화, 1906년 발행한 십환 금화 등이다. 시주화는 주화를 공식 발행하기 전에 품질과 효용성 등을 테스트하기 위해 시험적으로 만들어보는 주화를 말한다. 시험 주화이다 보니 몇 개 되지 않고 그래서 더 귀할 수밖에 없다. 이 시주화는 1885년 11월 경성전환국에서 독일인 기술자를 초빙해 만든 시주화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든 것이다.

정 박사는 1970년 한국 홍보용으로 발행한 대한민국 오천년 영광사 기념 금은화도 좋아한다. 대한민국의 첫 기념주화였다. 외국인에게 한국을 알린다는 취지에서 독일·이탈리아·프랑스에서 제작 배포했다. 당시 4500여 세트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외국에서만 배포하는 바람에 한국인 소장자는 거의 없다.

“세종대왕, 숭례문, 거북선, 고려청자 등을 정교하고 아름다운 무늬로 표현했지요. 돈이 역사를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술을 말하고 문화를 말하고 여러 가지 의례가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조선후기 별전

정 박사는 조선시대 별전(別錢)에서도 매력을 느꼈다. 별전은 조선 후기 상평통보가 유통되던 시절,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특별히 제작한 일종의 기념주화다. 별전의 특징은 다양한 형식과 풍부한 상징성. 별전에 등장하는 다양한 동식물은 모두 장수와 행복, 자손의 번창을 상징한다. 세련된 디자인도 빼놓을 수 없다. 둥근 상평통보 주변에 박쥐 모양을 덧붙인 것, 물고기 두 마리를 대칭으로 표현한 것, 복숭아 모양을 한 것 등 뛰어난 조형미를 보여주는 것이 많다.

그는 수집하고 싶은 화폐가 있으면 금액이 얼마든 꼭 수집하고야 말았다. 하나하나를 보면 작은 화폐지만 그 가치는 매우 높다. 실제 지금 거래한다면 수천만원에서 억대에 이르는 화폐도 있다. 정 박사는 그래서 “그렇게 모은 것이 내 재산의 3분의 1”이라고 말하곤 했다. ‘대한민국 오천년 영광사 기념 금은주화’는 현재 3000만원을 호가한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정 박사는 기증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계기는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의 사연을 알게 되면서였다.

“메디치 가문이 수집한 미술품을 우피치 미술관에 기증했지요. 그 사실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기증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도 이탈리아에 가서 르네상스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선시대 주화
1992년 70세 때, 그동안 모은 2800여 점의 화폐를 모두 기증했다. 당시는 기증 문화가 그리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 그만큼 그의 기증은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기증하면 이것이 영원히 남을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지요. 제가 평생 수집한 화폐들을 관람객들이 언제든 편하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기쁩니다. 기증을 받아준 박물관에 참 감사합니다.”



더 수집할 우리 화폐유물 없어기증이 있고 19년이 흘러 국립민속박물관은 기증자 정 박사를 기리는 특별전을 대대적으로 마련했다. 그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젊은 시절 그의 사진을 보면, 참으로 멋쟁이인 데다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아온 구순의 할머니.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늘 활동적이다.

여행도 좋아하고 박물관도 즐겨 찾는다. 추석 연휴 전에도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내일부터 오랫동안 자식들과 해외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그는 지금은 수집을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특별전을 기획한 국립민속박물관 이건욱 학예연구원은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아니 돈이 없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이 연구원은 “유물을 수집할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돈(화폐)을 다 모아서 더 이상 수집할 돈(화폐유물)이 없다는 말이다. 전문가들도 한국에서 나온 화폐 가운데 세 점 빼고 다 모았다고 평가한다”고 전했다.

우리나라 화폐에 관한 한 이를 능가하는 컬렉션은 나올 수 없다. 그의 수집 활동은 멈추었지만 그의 컬렉션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늘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그 만남은 정 박사의 열정만큼이나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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