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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기업 - 장인정신으로 일군 목재창호 ‘외길 72년’

성남기업 - 장인정신으로 일군 목재창호 ‘외길 72년’

김강배 성남기업 회장(왼쪽)과 김현준 부사장

목재가 쌓인 공장을 지나 2층 사무실로 올라가면 벽면 전체를 덮는 육중하고 고급스러운 나무문이 손님을 맞는다. 76년간 목재창호 하나만 고집해온 성남기업 본사의 현관문이다. 긴 역사, 대(代)를 이은 가업의 전통이 느껴진다.

성남기업의 모태는 1935년 서울 이태원에서 창업주 김태옥 전 회장이 차린 ‘성남목공소’다. 당시 신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식 목공기술을 일본에서 배워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재건사업이 한창이던 서울 곳곳에 목재창호를 공급했다. 특히 미군 수주 물량이 많았다. 용산 미군 주둔지의 시공 물량을 모두 성남목공소에서 발주했을 정도다. 김태옥 전 회장의 기술력은 그만큼 서울에서 최고로 꼽혔다.

성남목공소는 미 극동공병단의 목창호 부문 지정업체가 된 것을 계기로 베트남과 괌의 미 해군기지 건설에도 납품하게 됐다. 이를 눈 여겨 본 현대건설은 모든 목창호를 이곳에 맡겼다. 직원과 매출이 날로 늘면서 목공소에 불과했던 회사가 점점 기업 모습을 갖춰갔다. 김 전 회장은 목공업을 배우고 싶다는 사람은 누구든 데려와 도제식의 철저한 교육을 거쳐 목수로 양성했다. 그는 뼛속부터 기술자였다. 목재를 보는 눈이 탁월했고 제품을 만드는데 완벽을 기했다.



장인 아버지, 사업가 아들성남목공소가 고속성장의 발판을 마련했을 무렵, 몸이 약한 김 전 회장의 건강이 더 나빠졌다. 세상 경험을 쌓고 싶었던 아들 김강배 회장은 준비할 틈도 없이 경영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1966년 성남기업의 2대 경영은 그렇게 시작됐다. 성남목공소를 물려받은 김강배 회장은 기질이 호방하고 리더십이 넘치는 타고난 사업가다. 김 회장은 “어릴 때부터 어깨 너머로 아버지가 목공소를 운영하고 목재를 다루는 모습을 꾸준히 봐온 것이 평생 자산으로 남았다”고 추억했다. 특별한 경영수업을 받은 적도 없었지만 목공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던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았다.

2세가 사업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선대가 육성한 인재를 잃는 경우가 왕왕 생긴다. 김 회장은 반대였다. 평생 기술자를 우대한 부친을 본받아 이들의 목공 노하우를 높이 샀다. 성남기업에 축적된 기술을 내부 인력이 서로 전수할 수 있도록 독려한 것도 김 회장이다. 회사에는 부자가 2대에 걸쳐 함께 목공 기술자로 근무하는 가족도 있었다. 대를 이은 기술 전수 덕분에 1973년 불국사 무설전과 관음전의 목재창호 부분 복원공사를 비롯해 각종 고건축 사업에 참여하며 우수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전통은 그 자체만으로도 값어치를 가진다. 김 회장은 아버지가 세운 성남기업을 목재창호 선두기업으로 키워나갔다. 그 명성을 듣고 1991년 청와대에서 개축공사를 맡아달라고 청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도 한차례 공사를 한 적이 있었다. 1991년 청와대 본관 공사에서는 성남기업이 목재창호를 단독으로 맡아 제작했다. 작업이 끝난 후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감사패까지 받았다. 김 회장은 “지금도 뉴스에 청와대가 나오면 우리가 제작한 문이 변하지 않고 잘 있나 살핀다”고 말했다.



유학경험 바탕으로 해외 수출 모색목재창호 분야에서 한 우물만 파는 김 회장의 경영 스타일도 선대로부터 배운 장인정신에서 기인한다. 건설경기가 좋을 때 다른 기업이 줄지어 연관 산업에 진출하는 가운데서도 그는 신중했다. 이런 행보는 1997년 외환위기 때 진가를 발휘했다. 불경기를 극복하지 못한 다른 건설기업이 줄줄이 도산하는 와중에도 기본을 지킨 성남기업은 꿋꿋하게 버텼다. 다시 건설업에 활기가 돌자 성남기업에 물량이 쏟아졌다.

김 회장은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며 기업을 유지하다 보면 언젠가 좋은 때가 오게 마련이라는 걸 그때 다시 깨달았다”고 말한다. 가격 덤핑의 제살 깎아먹기 식 경쟁이 만연하는 가운데 우직하게 품질 관리를 고집한 게 시장에서 인정 받았다.

성남기업은 지금 3대 경영자가 가업을 승계하고 있다. 2003년 성남기업에 합류한 김 회장의 아들 김현준 부사장이 주인공이다. 외모나 기질이 김 회장과 많이 닮은 김 부사장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모두 미국에서 나왔다.

실내건축 전공을 살려 미국의 한 고급 리조트에서 일하던 어느 날, 김 부사장을 보러 김 회장이 날아왔다. “그 때 아버지께서는 열심히 일하는 제 모습에 질투가 나셨는지 ‘남의 회사에 돈 벌어주니 좋으냐’고 물으시며 회사에 들어오라고 하셨죠.”

함께 일한지도 8년째. 부자간에 가장 큰 변화는 바로 ‘호칭’이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김 회장에 입에서는 ‘현준’이라는 아들 이름 대신 ‘김 부사장’이라는 직함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래서인지 김 부사장은 매일 상사에게 배우는 기분으로 출근한다. 근면 만큼은 자신 있던 그도 하루 종일 회사 생각만 하는 아버지 곁에서 무거운 책임감을 실감한다. “300여명의 임직원과 그 가족을 보살펴야 한다”는 김 부사장의 말에서 가업을 이은 경영자가 가족의 의미를 기업까지 확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한번 결단하기 전까지는 완벽을 기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깊이 새기고 있는 김 부사장. 그는 회사에 합류한 이후 신중하게 새 동력을 모색하고 있다. 2005년 휴든(Huden)이라는 자체 브랜드를 내놓아 제1회 한국브랜드대상을 탔다. KM인터내셔널이라는 별도 법인을 만들어 친환경 건설자재인 마그네슘 보드 생산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성과로 미국 시장 진출을 꼽는다. 지난해 국내 최초로 도어 완제품을 미국 업체에 수출했다. 중국산보다 품질이 좋고 일본산보다 값이 저렴한 한국 제품의 경쟁력을 확신해 띄운 승부수가 결실을 거뒀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에 470개 매장을 보유한 패스트패션 업체 포에버21 매장에 설치된 모든 문은 성남기업 제품이다.

김 회장 부자는 가업승계를 통해 창업주 때부터 전해 내려온 장인정신을 지켜오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가업을 잇는 것은 녹록하지 않다. 김 부사장은 “가업을 물려받을 젊은 2·3세 예비 경영자들끼리 모여보면 아버지와 갈등을 겪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기존 방침을 유지하려는 아버지와 해외 유학 등 새로운 경험을 통해 새 시스템을 도입하려는 아들이 각자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서다.

큰 다툼 없이 8년이나 함께 일하는 부자의 비결이 궁금했다. 김 부사장은 “선대의 성공을 인정하고 모든 걸 배운 다음 새로운 방식을 주장해도 늦지 않다”며 “훗날을 대비해 아버지의 자서전을 집필하도록 도와 경영 지침처럼 읽고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아들의 경영 점수를 “70점”이라고 야박하게 평가하다가도 “아들이 있어 가끔 자리를 비워도 든든하다”고 은연중에 아들 자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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