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마트 어디로] 내가 못 가지면 너도 안된다
[하이마트 어디로] 내가 못 가지면 너도 안된다
하이마트의 경영권 분쟁이 ‘제3자 매각’으로 마무리 됐다. 분쟁 당사자들은 “이로써 분쟁이 봉합됐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앞으로 하이마트 인수전을 둘러싸고 양측의 갈등이 다시 불거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더불어 그동안 하이마트를 인수하려고 했던 대형 유통사의 경쟁도 치열해질 전망이다.
각자대표 체제로 봉합11월 30일 서울 대치동 하이마트 본사에서 열린 임시주주총회 결과 유진그룹과 하이마트는 ‘각자대표’와 ‘공개매각’ 안건에 합의했다. 회사가 팔릴 때까지 유진그룹과 선종구 회장이 하이마트의 각자대표를 맡는 것이다. 이로써 유진그룹은 하이마트 인수 4년 만에 회사를 다시 내놨다. 각자대표는 1대 주주인 유진그룹의 유경선 회장과 2대 주주인 하이마트의 선종구 회장이 영역별로 경영권을 나눠 갖는 것이다. 임시주총 이후 열린 이사회에서 나온 합의문에 따르면 “유경선 회장은 하이마트의 재정부문을 총괄하고, 선종구 회장은 하이마트의 재정부분을 제외한 영업과 기타부문을 총괄한다”고 되어 있다.
유진그룹에서 임시주총 전까지 만지작거리던 3가지 안은 ‘독자경영’, ‘공동대표’, ‘각자대표’였다. 하이마트 임직원들은 유진그룹이 선종구 회장에 대한 개임의사(독자경영안)를 밝히자 전원 사표를 제출하면서 “유진이 경영권 보장 약속을 뒤엎고 실적이 좋은 선종구 회장을 쫓아내 하이마트를 집어삼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유진그룹은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독자경영’안을 철회했다. 유진그룹 관계자는 “애초 선종구 회장 경영권을 빼앗을 생각은 아니었다”며 “공동대표 또는 각자대표 형식으로 유진그룹이 하이마트 경영에 참여하는 게 목적이었다”고 설명했다.
공동대표와 각자대표 둘 다 유진그룹의 경영권 참여가 보장되는 방안이지만 성격은 판이하다. 공동대표의 경우 회사 운영에 필요한 결재라인에 유진그룹이 포함되는 것이다. 각자대표는 영역별 결재라인이 다르다. 선 회장 쪽에서는 각자대표가, 유 회장 쪽에서는 공동대표가 좀더 유리하다. 이 때문에 ‘각자대표’ 결정 이후 선 회장이 경영권 분쟁에서는 승리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번 경영권 분쟁은 한국 M & A 역사에서 흔치 않은 사례다. 보통 지분율에 따라 대주주가 경영진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인수 당시 구두로 경영권을 보장했다는 주장(하이마트 입장)과 서면으로 직원에 대한 고용승계만 보장했다는 주장(유진 입장)이 맞붙어 논란이 커졌다.
유진이 하이마트 인수 이후 4년간 경영권을 선 회장에게 맡겨두고 있다가 최근에야 되찾으려고 한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하이마트 관계자는 “6월에 하이마트를 상장하고 난 뒤 주가가 오르는 걸 보고 유 회장의 욕심이 커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유 회장의 한 측근은 “유 회장이 유통사업 경험이 없어 그동안 일선에 나서지 않았지만 상장 후 하이마트가 안정세를 보이자 직접 경영을 해도 되겠다는 판단을 한 것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양측이 합의한 내용 가운데 의외의 대목은 ‘공개매각’이다. 공개매각은 대주주인 유진그룹(31.34%), 선종구 회장(17.37%), HI컨소시엄(8.88%)이 각자의 지분을 파는 것이다. 이들의 지분을 모두 더하면 57.59%다. 유진투자증권(1.06%)과 하이마트 우리사주(6.80%) 등의 지분까지 더하면 60%를 넘는다. 이들은 지분을 하나로 뭉쳐 새로운 주인에 일괄 매각할 예정이다. 이들 지분의 가격은 1조7000억원가량이다. 합의문에는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공개매각 한다”고 적고 있다. 유진그룹 관계자는 “내일이라도 당장 매각할 수 있지만 법률적 절차에 필요한 시간을 따지면 내년 3월까지는 매각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하이마트 관계자는 “유진그룹과 경영권 분쟁이 생기면서 ‘CEO리스크’가 커졌다”며 “공개매각으로 60%의 안정적인 지분을 가진 새 주인이 등장하면 CEO 리스크가 사라져 하이마트의 미래 가치가 더욱 커질 것으로 본다”고 공개매각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나 분쟁이 완전히 봉합된 것으로 보기는 이르다.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발생한 대주주간 갈등이 매각 작업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공개매각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을 경우 하이마트의 기업 가치가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유진에 비해 하이마트의 지분율은 낮다. 그러나 선 회장이 각종 우호지분 및 중립성향의 HI컨소시엄 지분까지 끌어들인다면 36.44%까지 올라갈 가능성도 여전히 있다. 이처럼 1, 2대주주의 지분율이 비슷하기 때문에 유진그룹과 선종구 회장이 다른 자본을 끌어와 하이마트를 되사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경영권 분쟁이 2라운드로 접어들 수 있는 것이다.
3대주주가 캐스팅 보트 행사현재 유진그룹 쪽은 하이마트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는 입장이다. 유경선 회장은 임시주총 이후 측근들과 만난 자리에서 “하이마트를 경영할 정이 떨어졌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통회사를 경영하고 싶었지만 직원의 반발을 사가면서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유진그룹의 사외이사로 적대적 M & A가 전문인 법무법인 광장의 김상곤 변호사는 “유 회장은 더 이상 유통회사에 미련이 없어 보였다”며 “인수전이 시작돼도 유진그룹은 직접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사회 참가자에 따르면 공개매각안은 HI컨소시엄에서 냈다. HI컨소시엄은 재무투자사 H & Q와 IMM의 공동지분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경영권 분쟁이 지속될수록 하이마트 가치가 떨어져 손해를 입게될 처지에 놓이자 직접 중재에 나섰다. 8.88%의 지분으로 3대주주이지만 이번 경영권 분쟁의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한 것이다.
선 회장은 HI컨소시엄의 지분을 얻어야 해서 공개매각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유 회장도 이사회에서 “애초 인수에 깊이 개입했던 HI컨소시엄이 앞으로 처리도 잘 알아서 할 것”이라고 말해 HI컨소시엄의 손을 들어줬다.
M & A시장에서는 하이마트를 내년 상반기 최대 매물로 보고 있다. 유통업체는 자본력이 뒷받침돼도 하루아침에 경영하기 어렵다. 하이마트는 여러 대형 브랜드 전자제품을 모두 취급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하이마트와 같은 가전유통 회사는 대형 공급업체와 연결된 조밀한 네트워크가 필요하기 때문에 일반 유통회사에게는 매력적인 매물이다. 롯데, 이마트, 현대백화점, GS리테일 등이 하이마트를 노릴 만하다. M & A 시장 전문가에 따르면 롯데와 GS리테일은 이미 하이마트 인수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특히 GS는 4년 전 하이마트 인수전에 뛰어들기도 했다. GS는 당시 유진그룹보다 500억원 정도를 더 써냈지만 인수에 실패했다. 선종구 회장이 하이마트 경영권 보장을 요구했고, GS가 이를 부담스러워했다고 알려졌다. NH투자증권의 홍성수 애널리스트는 “선종구 회장과 직원간 신뢰가 깊은 게 인수자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대표가 바뀌었을 때 직원들의 입지문제가 관건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경영자가 이 문제만 잘 보장하면 선 회장 없이도 하이마트를 잘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런 이점이 하이마트를 둘러싼 유통사간 인수전을 더욱 뜨겁게 만들고 있다.
하이마트 탄생 비화
“김우중 돈으로 하이마트 만들어”
이윤찬 이코노미스트 기자 chan4877@joongang.co.kr
이번 하이마트 경영권 분쟁에서는 또 다른 이슈가 떠올랐다. 옛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들이 하이마트를 “김우중 전 회장이 세운 대우의 위장계열사”라고 다시 주장한 것이다. 이들은 2002년 “김 전 회장의 하이마트 주식 7만여주를 선 회장과 측근들이 임의처분하거나 헐값에 매입했다”며 소송을 제기했었다. 하이마트 측은 “이미 법적 판단이 끝난 일”이라고 반박했다.
대우그룹의 마지막 구조조정본부장(대행) 김우일씨는 “내가 김 전 회장의 지시로 하이마트 설립을 주도했다”며 “2002년 소송 당시 검찰에서 수 차례 증언했지만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김씨의 육성증언과 검찰진술 내용을 토대로 ‘하이마트, 김우중 위장계열사’ 논란을 되짚어 봤다.
1985년 김 전 회장은 힐튼호텔 23층에 있는 집무실로 당시 기획파트 부장이었던 김씨를 불렀다. 김 전 회장은 이 자리에서 “대우그룹의 내수가 너무 취약하다”며 “대형 할인유통매장 설립을 구상하라”고 지시했다. 대우를 비롯한 모든 브랜드의 제품을 팔 수 있는 유통매장이었다. 아이디어는 획기적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김씨는 “각종 규제 때문에 대우그룹은 할인매장을 설립할 수 없었다”고 했다.
김씨는 묘책을 내놨다. 대우그룹 관계사였던 이수화학·동명중공업 등 7개사에 출자를 요청했다. 대우의 국내영업본부 직원은 주주로 참여하도록 했다. 하지만 15억원을 출자하기로 약속했던 동명중공업이 “공정거래법에 위반될 소지가 있다”며 “7억원만 출자하겠다”고 발을 반쯤 빼면서 작업이 꼬였다. 김씨는 “할인매장 설립이 예상보다 쉽지 않자 김 전 회장이 ‘내 통장에서 7억원을 빼서 출자하라’고 지시를 내렸다”고 털어놨다. 문제는 또 있었다. 김 전 회장이 출자를 하면 할인매장은 대우그룹 계열사가 된다. 김씨는 “이런 이유로 김 전 회장이 출자한 지분은 차명으로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할인매장이 하이마트의 전신인 ‘한국신용유통’이다. 설립일은 1987년이다. 김 전 회장은 한국신용유통에 큰 관심을 쏟았다. 회사의 주요 인사를 대우그룹 핵심인물로 채웠다. 정주호 전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 김세겸 대우 전무 등이 대표를 지냈다. 대우전자 임원이었던 선종구 회장이 한국신용유통에 들어간 건 1999년이다.
선 회장이 한국신용유통에 들어간 직후 대우그룹 사태가 터졌다. 한국신용유통의 출자회사들은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출자회사 7개사 모두 대우그룹과 연대보증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대우그룹이 공중분해 되던 때 선 회장이 김 전 회장의 차명주식과 출자회사 지분을 임의로 매입했다”고 밝혔다.
2001년 대우그룹 구조본 관계자들은 이 문제로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선 회장과 측근들이 사들인 김 전 회장의 차명주식을 되찾기 위해 소송을 걸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선 차명으로 관리되던 15% 주식이 김 전 회장의 소유라는 점을 입증해야 했다. 김씨는 “해외로 도피했던 김 전 회장에게 연락해 하이마트 지분을 되찾겠다고 했다”며 “김 전 회장은 ‘정주호 전 본부장에게 15% 주식을 증여했다’는 인증서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소송 당사자였던 정 전 본부장은 “하이마트 지분 중 15%에 해당하는 7만8000주는 김 전 회장의 차명주식이었다”며 “선 회장이 이를 임의처분하거나 헐값에 인수해 개인과 측근의 지분을 늘렸다”고 주장했다. 누가 패하든 양쪽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김 전 회장의 소유가 인정되면 선 회장은 경영권을 위협받았다. 반대로 김 전 회장은 추징을 피할 수 없었다. 김 전 회장이 자신의 주식을 정 전 본부장에게 증여했다고 인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 회장은 소송에서 “하이마트의 경영합리화를 위해 정체불명의 지분 15%를 처분했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이 차명주식이 김 전 회장의 소유인지를 판단하기 어렵다”며 소송을 기각했다. 김씨는 “2심이 끝난 직후 정 전 본부장과 선 회장이 극비리에 합의를 했다”며 “하이마트의 정체불명 지분 15%의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박상주 이코노미스트 기자 sang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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