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가는 아쉬움을 영화와 함께
한 해가 가는 아쉬움을 영화와 함께
[무대에서 스크린으로]
‘카니지’
뉴욕의 한 학교에서 남학생 둘이 난투극을 벌여 한 아이의 앞니가 부러진다. 둘다 넉넉하게 사는 집안의 자녀다. 가해자 부모는 다친 아이의 부모가 사는 고급 아파트에 찾아가 ‘교양 있는(civilized)’ 대화를 통해 원만한 해결책을 모색하려 한다. 처음엔 대화를 점잖게 시작했지만 갈수록 예의와 정중함이라는 가면은 걸레처럼 찢겨 나간다(all pretense of civility lies in tatters). 그들은 위스키를 들이키고, 욕설을 내뱉고, 토사물을 뿜어내면서 인간성의 비열한 본능(humanity’s baser instincts)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프랑스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토니상 수상작 ‘대학살의 신(God of Carnage)’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신랄하고 재미있는 영화로 각색했다.
에드워드 올비나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희곡 작품을 잘 아는 관객이라면 레자의 이 원작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déjà vu)을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통렬한 풍자의 재미가 쏠쏠하다.
평소와 달리 분노로 망가지는 조디 포스터와 천박한 존 레일리(피해자의 부모), 냉소적인 크리스토프 월츠와 몸을 바짝 사리는 케이트 윈슬렛(가해자의 더 잘사는 부모)은 과장된 연기(chewing the scenery)로 서로를 공격한다. 고립된 공간(enclosed spaces)과 내면의 사악한 본성(inner demons)을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는 폴란스키 감독에게 안성맞춤인 작품이다. 그의 최고 작품에 들진 않겠지만 부르주아간의 치열한 투쟁을 노련하게 풀어나간 솜씨가 볼만하다.
[국제 드라마]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이란의 작가 겸 감독인 아스가르 파르하디는 자신의 이 작품을 ‘탐정이 나오지 않는 탐정물(a detective story without a detective)’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겉핥기에 불과하다. 이란의 한 중산층 부부는 이민 문제의 의견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별거를 택한다. 남편 나데르는 아내와 딸을 외국에 보내고 혼자 남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본다. 나데르가 간병인을 고용하면서 더 큰 문제가 시작된다. 파르하디 감독은 단 두 시간 안에 인생의 수많은 면을 빼곡히 채웠다. 계급, 종교, 법, 성별, 결혼, 살인 혐의, 살아 남으려고 해대는 거짓말들(the lies one relies on to survive). 윤리적으로 복잡한 이 가정 스릴러는 올해 영화 중 가장 강렬하고 멋지게 연출된 작품 중 하나다.
[가족 영화]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
모험을 즐기는 언론인 벤저민 미(매트 데이먼)는 아내와 사별한 뒤 충동적으로 캘리포니아주 시골의 황폐한 동물원을 매입한다. 동물원엔 집도 딸렸다. 그는 이 새 집이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자신에게는 사랑했던 아내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리라 기대한다. 벤저민 미가 쓴 논픽션 책을 캐머런 크로 감독이 극화한 이 작품은 ‘사별한 홀아비’ 영화 장르의 규칙을 철저히 따른다(follows the rules of the Dead Mommy/Single Dad subgenre to a T). 따분한 장면도 있지만 데이먼과 콜린 포드,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 덕분에 영화가 살아난다. 특히 작품 전반에 담긴 위트와 인간애는 ‘제리 맥과이어’를 만든 멋쟁이 감독 크로의 정다운 추억(fond memories)을 되살리기에 충분하다.
[섹스 스릴러]
‘셰임’
맨해튼에 사는 섹스중독자(sex addict) 브랜든(마이클 패스벤더)의 인간적 몰락을 암울하고 생생하게 그려낸 성인용(NC-17) 영화다. 친밀한 감정을 두려워하는 브랜든은 형편이 어려운 여동생 시시(캐리 멀리건)도 무정하게 대한다. 스티브 매퀸 감독은 브랜든의 병적인 측면(pathology)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심리학도 에로티시즘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영상은 대담하지만 그 이면의 개념은 따분한 권선징악(punitive and banal)이다. 브랜든의 즐거움 없는 섹스 추구(joyless pursuit of sex)를 삭막한 현대 세계를 꼬집는 신랄한 은유(as a trenchant metaphor for our soulless, deracinated modern world)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대충 구상된 서글픈 섹스중독자에게 안겨주는 부담치고는 과한 느낌이다.
[첩보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토마스 알프레드손 감독이 존 르 카레의 원작 소설을 분위기 있게 재구성했다. 담배 연기와 식은 땀냄새가 스크린에 가득 밴 듯하다. 어떤 감독이라도 르 카레의 걸작 첩보 소설에 나오는 다채로운 요소들을 두 시간 남짓한 분량에 다 구겨 넣기는 무리다. BBC 미니 시리즈도 이 작품에 다섯 시간 이상을 할애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반역 용의자 세 명을 아주 간단히 처리하고 두리뭉실 넘어간다. 그러나 스웨덴의 뛰어난 감독인 알프레드손(‘렛 미 인’)은 개인적·정치적 배반 행위를 자신의 이야기로 소화해 풀어낸다. 콜린 퍼스, 마크 스트롱, 톰 하디 등 호화 배역은 영국 최고의 인기 배우를 총망라한 듯하다. 그러나 이 긴장감 넘치고 음울한 영화 자체는 완전히 비영국적이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축축한 냉기는 북유럽 냄새를 물씬 풍긴다.
[성장통 드라마]
‘파리아’
디 리스 감독은 이 아름다운 성장통 드라마에서 17세 흑인 레스비언 얼라이크(아데페로 오두예)의 내면 세계로 우리를 깊숙이 끌어들인다. 얼라이크는 거칠고 노련한 친구를 따라 게이바에 간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야구 모자를 벗어 던지고 귀걸이를 찬다. 집에는 엄격하고 잔소리 심한 어머니(a stern, shrill mother)와 다정하지만 바람둥이인 아버지(a loving but philandering father)가 있다. 진부한(generic) 가족 관계에 천착하는 면이 있지만 오두예의 연기에는 전혀 진부함이 없다. 주인공 얼라이크의 널 뛰는 감정을 헛발질 없이(without a false step) 정확히 짚어낸다. 희망에서 절망으로, 공포에서 자부심으로… 최고의 배우답게 오두예는 연기를 실제처럼 믿게 만든다(she tricks us into believing she’s not acting at all).
[블랙 코미디]
‘영 어덜트’
2007년 화제의 영화 ‘주노’를 만든 감독 제이슨 라이터먼과 대본 작가 디아블로 코디가 다시 뭉쳤다. 하지만 이 영화를 ‘주노’의 아류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훨씬 대담하고 신랄한(far more daring and prickly) 작품이다. 자아도취에 빠진 반영웅 여주인공(narcissistic anti-heroine) 메이비스 게리(샤를리즈 테론)는 고교 시절 애인이었지만 다른 여자와 결혼한 버디(패트릭 윌슨)를 다시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시골 고향으로 향한다. 하지만 예기치 않게 그녀는 학창 시절 깔봤던 범생이(패튼 오스월트)와 친해진다(she forms unexpected bond with the wry, damaged nerd she looked down on in high school). 테론은 지금까지 출연한 작품 중 최고의 연기력을 과시한다. 그 어느 때보다 호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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