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UP] 이제 여행도 하고 사진도 좀 찍어야지
[CLOSE UP] 이제 여행도 하고 사진도 좀 찍어야지

와이셔츠 차림에 접어 올린 소맷부리. 한눈에 보기에도 무거운 서류 뭉치를 ‘턱’ 내려놓고 돌아서는 김승유 회장의 발걸음이 가볍다. 인사할 새도 없이 다시 회장실로 들어간 김 회장을 30분 후 접견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양복 상의를 챙겨 입은 모습이었다.
“아이구 어서 오세요, 휴우”
김 회장이 자리에 앉아 숨을 돌렸다. 얼굴에 피곤함이 묻어났다. 눈꺼풀이 두 눈을 덮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무척 바빠 보였지만 대화 내내 밝게 웃으며 백전노장의 여유를 과시했다.
마지막 고비를 넘기셨습니다.“예, 정리가 좀 됐죠. 허허허. 아직 완전히 마무리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번 주 안으로 기본적인 일들은 끝날 것 같아요.”
2월 17일 새벽, 하나금융과 외환은행 노조는 손을 맞잡았다. 김 회장, 윤용로 외환은행장, 김기철 외환은행 노조위원장이 대화를 시작한 지 11일 만이었다.
협상이 타결돼서인지 표정이 좋아보입니다.“당연히 그렇지, 뭐. 윤용로 행장도 취임했으니까.”
윤 행장은 이날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에 처음 출근했다. “활짝 핀 장미처럼 외환은행을 피게 하겠다”는 뜻으로 외환의 행화(行花)인 장미를 김 노조위원장에게 전달했다.
협상이 생각대로 됐습니까.“예, 뭐 그래요.”
하나금융이 한 발 양보했다고 하는데요.“그렇죠. 많이 양보했죠. 허허허.”
하나금융은 외환은행을 자회사로 편입한 후에도 5년 동안 독립법인과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그 후에 상호협의 해 합병을 논의하기로 했다. 인원, 점포망 감축도 없다. 이에 외환 노조 측은 경영 정상화에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응수했다. 김 회장은 인수 뜻을 내비친 후로 ‘투 뱅크 체제’를 강조해왔다.
“하나금융의 강점은 순혈주의에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예전에는 기업문화를 공유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경쟁력이었지만 순혈주의를 고집하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워요. 어차피 우리는 여기저기서 다 만난 사람들이잖아요. 처음에는 달랐던 조직이 서로 바뀌면서 연합군이 됩니다.”
1998년 충청은행 인수합병 때도 김 회장은 한 발 물러섰다. 그가 무엇보다 충청은행 직원과 지역 주민의 마음을 얻는데 주력했던 것은 한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충남경찰청장이 대전에 내려온 당시 김 행장에게 경호를 해주겠다고 하자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한 방 맞아도 좋다”며 거절했다. 김 회장은 은행 이름을 충청하나은행으로 부르게해 직원들의 박탈감을 달랬다.
첫 인수 성공으로 확장의 발판을 마련한 김 회장은 연이어 보람은행(99년), 서울은행(2002년)을 인수합병하며 하나은행을 빅4 은행에 올려놨다. 올해 외환은행까지 품에 안아 인수합병 귀재의 신화를 이었다. 단자회사에서 출발한 하나금융이 366조원의 국내 2위 금융지주사로 탈바꿈하기까지 김 회장은 숨가쁘게 달려왔다.
“‘HSBC’에 ‘K’ 하나 더 붙겠네”
하나은행(H)이 서울(S)·보람(B)·충청(C)은행을 인수해 ‘HSBC’로 불리는 것 아시죠?“예, 이제 거기에 ‘K’가 하나 더 붙겠네요, 허허허.”

2006년에 처음 시도했던 외환은행 인수 작업을 결국 퇴임 전에 마무리하게 됐습니다. 소감이 어떠세요?“에이, 뭐 내가 한 건가요. 우리 직원들이 같이 한 거죠.”
김 회장은 아직 통합작업이 진행되고 있어 그런지 말을 아꼈다. 그는 2월17일 협상 타결 간담회에서 “금융에 몸담은 지 47년 됐다. 누릴 만큼 누렸다.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고 ‘백의종군’의 자세로 그룹 성장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외환은행 인수 건에서 가장 관심을 모은 게….“내 거취? 뻔한 걸 가지고 궁금해 해. 지난해부터 (퇴임을) 얘기했는데.”
완전히 결정하신 건가요?“그거야 뭐, 그런 거죠 뭐. 이제 시스템으로 할 거예요.”
김 회장은 71년 단자회사였던 한국투자금융에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91년 한국투자금융이 하나은행으로 전환하면서 ‘실력자’로 주목 받았다. 97년 윤병철 당시 하나은행장에 이어 조직을 이끈 지 16년째, 하나금융에서 그의 파워는 막강하다.
김 회장은 ‘1인자’의 권력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의식해서인지 시스템을 강조했다. 그는 2010년 ‘신한금융 사태’가 벌어지기 전부터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을 준비해왔다. 그때가 2010년 9월 경이다.
지난해 2월에는 ‘등기이사의 연령 만 70세로 제한’ ‘현행 3년인 CEO 임기를 첫 임기만 3년으로 하고 연임 시 1년씩 연장’ 등의 내용을 담은 지배구조 규준을 발표했다. 당시 자신의 나이에 맞춰 연령을 만 70세로 정했다는 얘기에 김 회장은 “난 그런 욕심 없다”며 퇴임의 뜻을 내비쳤다.
차기 회장 후보 점수표까지 매겨놨다
2월 24일 회추위(회장후보추천위원회)가 후임을 결정하는 첫 회의를 연다고 들었습니다.“24일에 못해. 회추위 멤버가 7명인데 다 일정이 있어서 다음주에도 못할 것 같아요.”
김종열 하나금융 사장 등 특정 인사들이 회장 후보로 거론되는데요.“회추위 멤버들이 논의했는데 난 잘 모르겠어요. 저야 멤버 중 한 사람일 뿐인걸요.”
회장님이 원하는 차기 하나금융 회장은 어떤 모습입니까.“제가 원하는 게 아니라…. 이미 지난해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을 만들 때 어떤 식으로 뽑을 건지, 자격요건이 뭔지 논의해서 결정했어요. 후계자를 뽑는 일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지난해 여름 용평에서 이사들과 1박2일로 토론을 다 했어.”
그럼 결론이 났나요.“결론났죠. 성실성, 리더십, 금융산업에 대한 이해, 건강 상태를 중점적으로 보고 후보마다 점수표까지 다 매겼어요. 내부적으로는 다 했어요. 밖으로 얘기할 수 없어 그렇지.”
후임이 누군지 결정했다는 말씀인가요.“아아니, 이제 해야지, 허허.”
김 회장은 거침없이 대답하면서도 중간중간 목이 잠겼다.
요즘 잠은 제대로 주무시나요?”“지난주 미국 출장에서 시차적응을 못해 몸에 문제가 좀 생겼어요.”
김 회장은 2월10일 5박6일 일정으로 미국 출장에 올랐다. LA에 있는 교포은행 새한뱅콥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11월25일에는 직접 영국 런던으로 가 론스타와 가격 담판을 지었다. 2006년 3월 외환 인수에 실패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김 회장은 인수전을 진두지휘 했다.

당시 좌절은 같은 해 8월 LG카드(현 신한카드) 인수 실패와 함께 뼈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1년여 전 다시 외환 인수에 나섰을 때 금융당국의 제동, 외환 노조의 강경한 반대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때도 김 회장은 “뭐든 삼세판인데 두 번 실패했으니 세 번째는 성공하지 않겠느냐”며 자신감을 보였다.
이제 하나금융 회장으로서 어떤 일이 남았습니까.“3월에 주주총회가 있어요. 여기(하나)도 열리고, 저기(외환)도 열리니까 바쁘죠. 경영진을 안정화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퇴임하신다지만 지금이 가장 바빠 보입니다.“이사회가 끝나고 3월 중순이 지나면 나아지지 않을까요.”
시간이 나면 뭘 할지 계획은 세우셨나요.“이제 세워야죠. 여행도 하고, 이제 사진도 좀 찍어야지. 내가 원하는 게 카메라 둘러매고 미술관 순례하는 거예요.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는 바람에 일반인들 촬영 실력이 굉장히 좋아졌어요. 잘 안 나온 건 지워버리고. 세상이 확 달라졌어.”
평소 김 회장은 미술품과 사진에 관심이 많다고 알려졌다. 이날 역시 사진 촬영은 거부했지만 동행한 사진기자의 카메라를 가리키며 “내 카메라와 똑같다”며 ‘아는 체’를 했다. 김 회장이 오직 금융업에 몰두한 47년 동안 달라진 것은 카메라 성능만이 아니었다. 그가 젊은 시절 학자가 되려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퇴임 후에 강단에 설 생각은 없나요.“에이, 못해. 이제 실력이 없어서 안 돼요. 옛날엔 내가 그걸(교수) 바랐어요. 70, 80년대에 모교(고려대)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고. 그때 매 학기 교재를 다시 만들었어요. 그런데 은행에서 임원이 되니까 공부할 시간이 없더라고. 요즘 학생들이 똑똑해서 우리 때처럼 강의노트가 누렇게 되도록 써먹질 않잖아. 충분히 준비를 못 하고 학생들 앞에 서면 자신 있게 말이 안 나와요.”
김 회장은 어려서부터 공부하는 것을 즐겼다. 집안 형편상 65년 한일은행에 입행했지만 2년4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미국으로 가 남가주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잠깐 귀국했을 때 병상에 누운 아버지를 두고 갈 수 없어 결국 박사 과정을 포기했다.
그때 선택한 두 번째 직장이 한국투자금융이었다. 강의와 업무를 병행하다 꿈을 못 버리고 다시 유학을 준비했지만 회사는 37세의 김 회장에게 부사장을 제안하며 남아줄 것을 부탁했다. 파격적 승진이었다. 지금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지만 이제는 또 실력이 문제라는 것이다.
교수가 어렵다면 재능기부라도 하시지요.“아, 특강 같은 것은 많이 하려고 합니다. 흠, 또 시장에 갈까 하는데.”
재능기부로 못 이룬 꿈 대신할 것
시장이라면….“미소금융재단 말입니다. 제가 이사장직을 맡아놓고 세심하게 신경을 못써 미안한 게 많아요. 상인들이 정말 필요한 게 뭔지, 어떻게 해야 미소금융을 잘 운영할 수 있을지 시장 바닥으로 파고들어야 궁금증이 풀리지 않겠어요.”
궁금증이라고 하시면….“한국형 마이크로파이낸스(소액금융)는 뭘까. 하긴 해야 하는데, 우리 현실에 맞는 한국형이 따로 있어요. 무하마드 유누스 전 그라민 은행 총재를 만나고 그라민 아메리카도 가봤지만 한국에서는 그 모델로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식당 주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게 과연 잘하는 걸까. 오히려 빚더미에 앉히는 게 아닐까. 제 생각엔 새로운 업종 개발이 필요할 것 같은데 소상공인진흥회의 역할은 뭘까. 이런 것들이죠.”
그런 고민은 월가 시위 이후 금융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된 것과 관련이 있나요?“예전부터 죽 해오던 고민입니다. 소액금융은 제도권 금융에서 꼭 해야 합니다. 하지만 복지 쪽에 치우치면 지속가능성이 없고 상업적 목적만 강조해도 안 되니 어려워요. 자금을 계속 조달해야 하는 것도 과제입니다. 빈부격차가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소외계층이 희망이 없으면 시장경제가 발전할 수 있을까. 이제 이런 고민을 발로 뛰면서 좀 풀어보고 싶어요.”
빈부격차 문제 연구하고 싶어
퇴임 후에도 바쁘시겠어요.“예, 그렇게 바쁘게 지내야죠.”
김 회장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곧 “소액금융은 절대 정치적 문제와는 관련이 없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과 고려대 경영학과 61학번 동기다. 포털 검색창에 ‘김승유’를 치면 ‘김승유 이명박’이 연관검색어로 뜰만큼 김 회장은 자주 특혜 논란에 휩싸였다. 정작 김 회장 자신은 이런 논란에 초연하다.
2008년 김 회장이 금융위원장 후보로 거론됐을 때 ‘두 사람이 친하지 않느냐’는 직접적 질문에도 “친하긴 뭘, 공적인 자리에서나 본다”며 담담히 답했다. 자립형 사립고인 하나고등학교 설립 때도 이명박 대통령의 ‘자사고 200개 설립’ 공약 때문에 논란이 됐지만, 당시 김 회장은 “자사고 설립은 예전부터 생각했던 일이고 이 대통령과는 관계가 없다”며 선을 그었다.
하나고는 김 회장의 숙원사업이다. 과거 파스퇴르 민족사관학교를 인수하려다 ‘하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고 해 돌아선 일도 있다. 직접 학교법인을 세운 이유다. 외환은행 인수 문제로 바빠지기 전 주말마다 학교를 방문했을 정도로 하나고에 대한 김 회장의 애정은 남다르다. 미소금융재단 이사장과 하나고 이사장 직은 유지하겠다고 밝힌 그는 “오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다”며 “바빠서 아침에 환영사를 못해 저녁에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올해 일흔인 그는 금융 인생을 마무리 한 뒤에도 할 일이 많은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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