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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핵 합의 그 후] 김일성 사후 18년 만의 데자뷰
김정은 미국 업고 후계 굳히기

[북·미 핵 합의 그 후] 김일성 사후 18년 만의 데자뷰
김정은 미국 업고 후계 굳히기

김정은 체제의 북한이 미국과 핵 합의에 도달했다. 2월 23일부터 이틀간 베이징에서 진행된 3차 북·미 협상을 통한 의기투합이었다. 회담을 이끈 글린 데이비스 미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회담 결과 발표를 닷새간이나 미루며 철저한 보안 속에 평양과 워싱턴의 사후 조율을 거칠 정도로 공을 들인 작품이었다. 북한이 영변의 농축우라늄 시설의 가동을 중단하고 핵과 장거리 미사일의 시험을 중단하는 대신 미국은 24만t의 영양지원(Nutritional assistance)을 보내는 방식이다. 지난해 12월 김정일 사망으로 출범한 김정은 체제의 가시적인 첫 대미 행보로 기록될 수 있는 사안이다.

이번 합의는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이후의 북·미 간 핵 협상을 떠올리게 한다. 북한은 당시 김일성 사망이란 충격 속에서도 미국과의 핵 줄다리기 테이블에 앉았다. 결국 그 해 10월 북핵 개발과 관련한 북·미 간 합의 틀이라 할 제네바 기본 합의를 이뤘다. 이번 타결은 그야말로 ‘어게인(Again) 1994’나 ‘18년 만의 데자뷰’로 불릴 만하다. 물론 거래 아이템은 다소 차이가 있다. 제네바 기본 합의가 북한의 흑연원자로를 주축으로 한 핵 시설의 동결을 대가로 식량과 중유 지원과 함께 경수로 2기를 획득한 것이라면, 이번에는 말썽 많던 우라늄 농축 핵 개발 프로그램과 맞바꾸는 형식이다. 6자 회담이 재개되면 대북 경수로 지원문제를 논의하는 쪽으로 의견접근을 본 것도 마찬가지다.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북·미 핵 협상김정은이 김정일 사망의 후폭풍 속에서도 대미 협의에 집중력을 보인 건 자신의 권력 안착 문제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후계 권력의 안정적 기반 구축이 필요한 시점에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을 김정은과 그의 후견세력이 내렸기 때문일 것이란 얘기다. 북한은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국 특사의 방북 때 불거진 우라늄 농축 핵개발 의혹으로 미국과 극한의 대립상황을 맞았다. 이듬해 1월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조치를 취했다. 이후 2005년 ‘9·19 공동성명’으로 핵 프로그램 포기와 에너지 지원을 맞바꾸는 데 합의했지만 2006년 10월에 이어 2009년 5월 핵 실험을 감행하면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를 감수해야 했다. 이번 합의는 당분간 핵 프로그램 중단을 통해 미국과 대화의 끈을 이어가고 관계 개선을 위한 움직임을 강화하겠다는 뜻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 직후 닥친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를 제네바 핵 합의와 대미 접근으로 넘겼고, 체제 안정을 위한 시간 벌기에 효과를 봤다.

아버지의 이런 과거 행보를 잘 알고 있을 김정은은 대미 핵협상 패턴을 답습함으로써 취약한 후계 권력을 다지려 할 가능성이 크다. 당장 미국으로부터 24만t의 식량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됐고, 추가적인 물량 확보의 여지도 남겼다. 대북 제재 국면의 완화를 통한 체제 안정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합의 결과를 발표하면서 “미국은 조선을 더 이상 적대시 하지 않을 것을 재확언 했다”고 강조했다. 또 “미국은 대(對) 조선 제재가 인민생활 등 민수 분야를 겨냥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고 전함으로써 미국의 대북 압박 속에 어린 지도자를 맞은 주민들이 불안감을 갖지 않도록 하려고 애쓴 모습을 드러냈다.

김정은으로서는 경제문제를 잡지 않고서는 후계 권력의 안정을 보장 받을 수 없는 실정이다. 올해는 북한이 ‘강성대국 진입의 대문을 여는 해’로 공언한 해다. 특히 4월은 강성대국 선포의 시점으로 여겨져 왔다는 점에서 김정은의 부담은 클 수밖에 없다. 북한은 강성대국이란 구호를 ‘강성국가’란 표현으로 수위를 낮췄다. 또 김정일 사망이란 메가톤급 돌발변수도 불거져 주민들에게 양해를 구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그렇지만 그냥 빈손으로 지나갈 수는 없다는 압박감이 클 수밖에 없다. 김일성의 모습을 많이 닮은 20대 후반의 지도자에게 기대를 걸었는데 식량 문제를 포함한 경제난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면 후계 권력 안착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후계 구도 안착 걸림돌인 경제문제 해결김정은은 후계자 시절 경제문제와 관련한 업적 쌓기에 쓴맛을 본 경험이 있다. 2009년 11월 30일 전격적으로 단행한 화폐개혁은 김정은 후계체제 출범을 겨냥한 승부수였다. 하지만 2년 여를 넘긴 시점에서 대부분의 후속조치는 유명무실화 됐고 계획경제 복원을 실현할 경제여건이 조성되지 못했다. 화폐개혁의 실패는 사회적으로는 정책불신과 함께 잠재적 불만을 고조시켰다는 평가다. 1974년 2월 노동당 5기 8차 전원회의에서 후계자에 내정된 김정일은 그 해 10월 ‘70일 전투’라는 일종의 생산력 증대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이를 통해 산업생산 성과 등이 있었다고 관영매체를 통해 선전할 수 있었고, 이듬해 2월 자신의 생일에 즈음해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았다. 이런 실적은 김정일을 ‘미래의 영도자’로 자리매김하는데 뒷심을 보태줬다. 물론 한창 잘나가던 1970년대의 북한 경제와 피폐한 지금의 상황을 비교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지만 김정은이 경제문제에 무능력하다는 평가가 주민들 사이에서 나오면 곤란하다.

경제문제가 주민생존과 관련한 현실적인 문제라면 지도자로서 카리스마 부족은 김정은의 아킬레스건이다. 김정일이 생존했을 당시 건강문제 등으로 후계수업에 쫓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정은은 공개석상 등장 이후 김정일의 현지지도를 수행하며 ‘미래권력’으로서 카리스마를 부각시키려 했다. 하지만 후계자 추대 1년여 만에 김정일이 급사함으로써 김정은은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왕좌에 오르는 상황을 맞아야 했다. 아버지의 뒷전에서 노동당과 군부의 간부들과 함께 서서 후계수업을 받던 김정은이 하루아침에 ‘위대한 영도자’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로 탈바꿈 했지만 주민들이 마음 속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김정은 대남관은 상당히 호전적김정은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TV에는 매일 그의 동정을 담은 찬양물이 쏟아지고 있지만 육성은 아직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그의 출생과 관련한 내용이나 성장과정 등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물론 현지지도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김정은의 공개 활동을 면밀히 살펴보면 통치스타일을 짐작해 볼 단서는 드러난다. 북한 정보를 다루는 당국자들은 김정은의 모습이 김정일의 통치스타일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고 지적한다.

이런 달라진 분위기 때문에 김정은을 수행해야 하는 노동당과 군부의 노(老)간부들이 진땀을 빼는 모습이 영상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설날인 1월 24일 김정은은 이른바 혁명유자녀의 교육기관인 만경대혁명학원을 방문했다. 환호하는 교원과 원생을 부둥켜안거나 손을 잡아주는 등 스킨십을 보였다. 그리고는 식당에 들러 식탁 사이를 누비며 원생들이 전통음식인 온반을 먹는 장면을 일일이 돌아봤다. 김정은은 배식을 하는 여성들에게 원생들이 부족할 테니 음식을 더 주라는 등의 지시도 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간장병을 들어 손가락에 찍어본 뒤 입으로 맛을 보는 뜻밖의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미리 준비한 원생들의 공연을 관람할 것을 권하자 “명절인데 아이들이 쉬지 못하니 그냥 두라”고 해 관계자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학습용 대형 한반도 지형판을 이용해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보고를 올리자 못마땅해하며 “이건 안 되겠으니 인민군대에 말해 제대로 된 걸 만들어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원생들의 책상에 직접 앉더니 높이가 맞니 안 맞니 하는 식으로 질책하듯 큰 제스처를 내보이는 장면도 방영됐다.

언 손을 녹이며 28살 지도자의 말을 수첩에 적어 내려가는 70대 당·군 간부의 얼굴은 긴장된 표정이 역력했다. ‘세상에 무엇 하나 쉬운 게 없구나’라거나 ‘장군님(김정일) 살아계셨을 때와는 정말 다르구나’ 하는 모습들이었다. 짜인대로 휘둘러보고 기념촬영을 하던 김정일과는 스타일이 확 바뀐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들이다.

하지만 김정은의 일천한 후계수업 경력과 부족한 카리스마는 김정은을 ‘위대한 영도자’로 찬양하는 영상물의 화면 곳곳에 의문의 공백을 남긴다. 김정은 생일인 1월 8일에 맞춰 방영한 첫 번째 김정은 기록영화 ‘백두의 혁명위업을 계승하시여’에서 북한은 김정은이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하루 3~4시간만 잠자며 공부했다던 재학시절 사진은 한 장도 제시하지 못했다.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를 다닌 청소년 시절 모습도 마찬가지다. 김정일이 후계자 시절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사실을 자랑스럽게 공표하며 졸업 논문과 재학시절의 사진을 여러 장 공개한 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당시 북한 관영 선전매체들은 김정일이 북한 안팎의 여러 인사로부터 해외유학을 권유 받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존함이 붙은 김일성종합대학이 좋다”며 거절한 것으로 전했다. 북한으로서는 군 대장에 최고사령관까지 거머쥔 최고지도자가 실은 해외 조기유학에 병역기피란 걸 주민들에게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북·미 합의 타결로 대미 접근의 스피드를 내는 김정은이 남한과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지도 향후 북한을 보는 관전 포인트다. 북한은 김정일 사망 추도기간이 끝난 다음날인 지난해 12월 30일 국방위원회 명의의 성명에서 “이명박 역적패당과는 영원히 상종하지 않을 것”이라며 “민족의 대국상(大國喪) 앞에 저지른 역적패당의 만고대죄는 끝까지 따라가며 계산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우리 정부의 조문 제한 허용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후 북한은 무차별적인 대남 비난과 도발위협을 내놓고 있다. 4월 총선과 12월 대선에 공공연하게 개입하겠다는 의중도 드러냈다.

정부 당국자들은 김정은의 대남 인식에 대해 우려 섞인 시각을 나타낸다. 그의 대남관이 상당히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다. 김정은은 김정일 장례식을 치른 후 올해 첫 공개 활동으로 한국전쟁 당시 서울 공략의 선봉에 섰던 제105 탱크사단을 방문했다. 군을 우선시 하고 있다는 의미와 함께 대남 관계에서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상징성 있는 행보란 분석이다.

김정은은 후계자로 추대되기 이전인 2010년 1월에도 김정일을 수행해 이 부대를 비공개적으로 방문했는데 당시 탱크에 직접 올라 훈련을 참관했다. 당시 훈련은 북한 탱크가 남한의 주요 도시와 지명이 적힌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남침 상황을 가정한 훈련이었다. 김정일은 또 노동당 3차 대표자회에서 후계자로 추대되기 며칠 전인 2010년 9월 11일 “전군(全軍)이 남진(南進)의 길을 가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남긴 것으로 북한 관영매체는 전하고 있다. 2009년 4월 5일 북한의 장거리 로켓인 ‘광명성 2호’ 발사 당시에는 직접 위성관계종합지휘소에 다녀온 뒤 “오늘 각오를 하고 그곳에 갔다 왔다. 적들이 요격으로 나오면 진짜 전쟁을 하자고 결심을 했었다”고 말한 것으로 지난 1월 8일 방영된 한 기록영화는 전하고 있다. 무엇보다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의 배후에 김정은이 자리하고 있다는 관측은 후계자 시절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KAL기 폭파와 아웅산 테러 등 대형 도발을 주도한 김정일의 행태와 비슷하다. 후계 권력의 안착에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극단적인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전망이 일각에서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4월 노동당 대표자회가 화려한 대관식?북한은 김일성 100회 생일인 4월 15일까지 추도 분위기를 이어갈 전망이다. 이 기간 중 대남·대외 정책의 급격한 추진이나 전개는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물론 북한이 내부결속을 위해 대남 강경국면을 이어가거나 국지적 대남 도발을 통해 긴장을 고조시킬 것이란 전망도 적지 않다. 또 올해 12월 대선을 통해 북측에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정권이 출범할 것이란 기대에서 2013년 체제의 등장을 기다리는 전략을 구사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한 대미 접근 과정에서 한·미 공조가 가동될 경우 북한은 ‘워싱턴에 오기 전 서울을 먼저 들리라’는 주문을 받을 수 있다. 또 남한으로부터의 추가적인 대북 지원 확보를 위해 관계 개선을 검토할 수도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은의 정상회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김정은이 국방위원장이나 노동당 총비서 등 김정일과 맞먹는 국가지도자로서의 직위를 갖는다면 굳이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나이가 어려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오지만 오히려 이런 김정은을 포용하는 듯한 태도를 남한의 대통령이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실용적인 태도만 견지한다면 MB와 김정은의 만남이 충분히 남북정상회담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천안함 폭침 도발과 연평도 문제에 대한 사과 등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과제를 쾌도난마 식으로 풀고 남북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는 카드는 정상회담 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북한은 4월 중순 노동당 대표자회 개최를 예고했다. 당대표자회는 김정은이 2010년 9월 후계자로 추대된 비중 있는 행사다. 북한 노동신문은 2월 29일자 사설에서 이번 당대표자회를 “주체혁명 위업의 새로운 역사적 단계에 우리 당의 영도적 권위와 전투적 위력을 천백배로 더욱 강화하기 위한 특기할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0년 회의는 김정일이 만든 김정은의 데뷔 무대였다. 하지만 이번 당대표자회는 김정은 스스로 기획한 화려한 대관식이 될 수 있다. 이런 이벤트를 전후한 김정은의 대남·대미 행보가 어떤 보폭으로 이뤄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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