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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전문가 인터뷰 - 돈이 아니라 인생을 설계하라

은퇴 전문가 인터뷰 - 돈이 아니라 인생을 설계하라

‘은퇴하면 어떤 생활을 하고 싶으냐.’ 우재룡(51)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이 은퇴를 앞둔 베이비부머를 만날 때마다 던지는 질문이다. 대답은 대부분 비슷하다. 여행·등산·골프·산책·취미를 즐기며 캐주얼 한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다. 격한 경쟁사회에서 정년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사람들이니 ‘쉬고 싶다’는 생각은 어쩌면 당연하다. 우 소장의 생각은 좀 다르다. “수명이 110세에 달하는 세상이에요. 이제 은퇴 이후는 쉴 때가 아닙니다.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할 때지요.”

우 소장은 수명이 늘어나면 일하는 시간도 늘어나야 한다고 본다. “베이비부머 출생 시기에 기대수명은 62세 전후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최소한 70~80세는 거뜬히 삽니다. 육순이나 칠순은 이제 잔치도 안 해요. 좀 있으면 110세까지 사는 사람도 흔해질 겁니다. 그런데 은퇴 후 그 긴 시간 동안 멍하니 놀고 있겠다고요. 나머지 인생이 아깝지도 않나요.” 그는 은퇴자들이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사회로 나와 일을 찾으라고 주문한다. 그게 ‘제대로 된 은퇴설계’이자 ‘멋진 인생’이라는 지론이다.



자산설계 강조하면 좌절감만 안겨줘일하는 노년을 강조하는 우 소장이 이끄는 삼성생명의 은퇴연구소는 여느 금융사의 은퇴 관련 연구소와 연구 목표가 다르다. 많은 연구소들은 편안한 노후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보험·펀드 같은 금융상품을 소개하고 은퇴자산을 설계한다. 그러나 삼성생명 은퇴연구소는 은퇴 자산에 대해 영업이나 설계를 거의 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은퇴설계는 자산 설계가 아닙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설계하는 게 우선”이라는 지론에서다.

그의 말만 듣고 있으면 우 소장이 돈이나 자산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 소장은 한국 펀드 업계의 1세대다. 금융전문가이자 ‘투자’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은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996년이다. 당시 설립 초기이던 국민연금 자산운용 부문 자문위원을 맡았다. 한국에 퇴직연금을 도입하면서 은퇴 설계 부문 선진국 사례 연구를 파고들었다. 노후 설계에 재미를 붙인 그는 자신이 세운 펀드평가회사까지 팔아버리고 은퇴연구에 집중했다.

은퇴연구 초기에는 그도 금융자산 관리방법에 집중했다. “당시에 ‘노후자금으로 10억원이 필요하고 이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주제로 연구결과를 발표했는데, 나중에 반응을 보니 사람들에게 좌절만 안겨준 꼴이었어요. 마치 10억원이 없는 당신의 인생은 실패한 것이라고 낙인 찍은 거니까요.” 그래서 우 소장은 방향을 바꿨다. “돈이 있어도 실패한 인생이 있고, 돈이 없어도 성공할 수 있어요. 노후는 돈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란 걸 깨달았지요.” 이런 시각으로 선진국의 여러 노후 대책을 살피던 우 소장은 무릎을 쳤다. “일부 개인이 돈을 긁어 모아서는 모두가 행복한 노년시대를 열 수 없어요. 사회와 정부가 바뀌고, 늙어가는 개인이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더군요.”

우 소장은 이런 컨셉트를 실현시키기 위해 당시 가장 많은 고객과 자산을 확보하고 있는 삼성생명의 CEO를 찾았다. 굳이 은퇴연구소가 영업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규모가 커야 제대로 된 연구나 정책제안을 추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또 가장 규모가 큰 회사에서 정부나 국민을 설득해야 은퇴 문화가 바뀔 수 있다는 판단도 섰다. 지난해 2월10일 설립된 삼성생명 은퇴연구소는 이제 만 1년을 넘겼다. 연구소는 우 소장의 컨셉트을 잘 유지하고 있다. 연간 수십 억원에 달하는 예산으로 국내외 30명이 넘는 학계 전문가로 연구진을 구성하고 있다. 우 소장은 연구원들에게 늘 “국책연구소처럼 대안제시를 회피하지 마라. 현장을 직접 돌아본 뒤 제대로 된 대안을 내라”고 강조한다.

그가 볼 때 한국은 노후 준비를 해본 적이 없는 나라다. “저마다 노후 준비를 한다고 나서지만 정작 미래 삶의 모습을 제대로 조망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래서 정부나 수많은 연구소가 노후준비를 강조하고 알려도 인식이 확산되지도, 정책이 진행되지도 않아요.” 우 소장은 향후 20년 동안 미래의 삶을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들 1600만명이 쏟아져 나온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선다.

“은퇴에 대한 국가적 계획이 없으면 한국도 일본처럼 장기 침체에 빠질 수 있어요. 은퇴 계획이 없는 사람들은 부동산에 60~80% 의존해 살면서 역동성을 잃고 지루하고 소비적인 생활만 하게 되는데, 그 소비도 몇 년 후면 크게 줄어들게 되죠. 생산인력이 줄고 노령인구가 늘어나면 한국도 일본처럼 소비침체에 빠져 경제가 하락세를 걷게 됩니다.”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우 소장이 제시하는 은퇴 설계는 ‘은퇴하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시작된다. 정렬적으로 살아가는 시니어로서 제3의 인생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은퇴하는 세대는 대학 진학률이 30%에 달하고 기업이나 대학 등에서 투자한 연수비용이 10억원에 달하는데, 이들이 사회구성인자로서 계속 활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노인들이 일을 갖는 것에 대해 가장 우려하는 게 청·장년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것이다. 우 소장은 은퇴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일거리인 ‘시니어 잡’을 만들어서 세대간 일자리 경쟁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 소장은 기부와 봉사하는 일 외에도 은퇴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다고 본다. 상대적으로 젊은 노인이 더 늙은 노인을 위해 교육, 의료, 간병을 도와주는 ‘노인이 노인을 부양하는 일’을 찾아보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청년은 세계적으로 선도적인 디지털 일자리를 더 많이 넓혀나가고 은퇴자는 사회를 떠받칠 수 있는 아날로그 일자리를 지탱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 소장은 “내가 일하면 내 아들이 일자리를 잃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은퇴 이후의 직업을 그 이전과 구분하지 못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노인이 노인을 부양하는 일 고려할 만우 소장은 한국인 평균수명이 110세로 늘어나는 시대를 맞아 은퇴자가 새로운 일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국가가 각종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은퇴한 사람이 간단한 의료 등 간호 관련 일을 배우면 30여년 정도 요양병원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일을 배우려면 수학능력시험부터 봐야 합니다. 은퇴자들이 실질적으로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도록 각종 제도 변화가 선행돼야 합니다.”

은퇴연구소는 지난 1년 동안 선진국의 은퇴 모델을 보급하는데 전력했다. 선진국의 좋은 사례를 한국의 정책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연구원들은 미국, 영국, 일본, 독일 등의 요양원을 직접 둘러보고 선진국에서 어떤 사회적 시스템이 만들어졌는지 현장 조사를 마쳤다. 올해 연구소는 미국, 일본, 유럽 투어를 통해 ‘시니어 잡’을 조사한다. 소득형 일자리뿐만 아니라 자아성취를 위해 스스로 돈을 내가면서 일하는 선진국 은퇴생활의 사례를 모을 작정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자신의 사회 활동으로 연계시키는 사람들의 실상을 보여줄 예정이다.

우 소장의 장기적 연구주제는 ‘한국형(선진국형) 은퇴 모형 제시’다. ‘나이가 들면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소주제에 답을 내리는 일이다. 우 소장은 올해 51세, 그의 정년은 55세다. 그는 “지금 제가 하는 일은 제 노후를 어떻게 멋지게 살지 준비하는 저를 위한 일이고, 저와 함께 나이 들 동료들을 위한 일”이라고 말했다.



박상주 이코노미스트 기자 sang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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