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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st Day of Her Life 공주, 27세 여왕 그리고 영국의 어머니

The Greatest Day of Her Life 공주, 27세 여왕 그리고 영국의 어머니

오는 6월 2일 즉위 60주년을 맞는 엘리자베스 2세 위엄 있는 모습으로 국민들을 편안하게 보살피는 역할에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1952년 2월 5일 영국의 왕위계승자 엘리자베스는 공주로서의 마지막 밤을 케냐의 거대한 무화과 나무 위에서 보냈다. 그녀는 사

가나의 사냥 허용지역(game park) 안에 있는 트리톱스 호텔(실제로 나무 위의 집처럼 지어졌다)에 묵고 있었다. 이 지역에는 5

년 전 그녀와 필립공의 결혼식 때 “케냐 국민”이 이들에게 선사한 사냥용 오두막(a hunting lodge)이 있었다. 공주 부부는 호주

로 가는 길에 아프리카에 들러 그때까지 영국의 식민지로 남아 있던 케냐를 방문했다.

이들은 만성 질환에 시달리던(chronically ill)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조지 6세 국왕을 대신해 영연방의 일부로 남아 있던 국가들을 돌면서 영국과 왕실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to show the flag for Britain and its monarchy).

당시 케냐는 영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키쿠유족의 유혈 반란(a bloody Kikuyu insurrection)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공주와 그녀의 남편을 만나본 사람들은 그들의 수려한 용모(good looks)와 편안하면서도 품위 있는 태도(easy grace)에 매료됐다. 그때 조지 6세가 관상동맥 혈전증(a coronary thrombosis)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젊은 엘리자베스 공주(곧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된다)가 그 소식에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관한 보도는 없었다.

하지만 공주 부부에게 그 소식을 직접 전한 필립공의 시종무관(equerry) 마이클 파커에 따르면 “필립공은 그 소식을 듣고 마치 세상의 절반이 자신의 두 어깨 위에 떨어진(half the world had dropped on his shoulders) 듯한 표정이었다.” 반면 엘리자베스는 곧바로 여왕으로서 할 일을 시작했다(switched immediately to duty). 당시 엘리자베스는 26세였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대학원에 다닐 만한 나이지만 그녀는 이미 왕위계승자로서 필요한 교육(the select academy of national-symbolsin-waiting)을 모두 마친 상태였다.

1936년 국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녀의 할아버지 조지 5세 국왕이 사망했을 때 ‘릴리베트(엘리자베스의 애칭)’는 열 살이었다. 당시 왕위계승자는 큰아버지 데이비드(에드워드 8세)였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언젠가 여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에드워드 8세 국왕은 두번 이혼한 경력이 있는 미국 여성 월리스 심슨과의 결혼을 선택해 대관식(coronation)도 하기 전 폐위(abdication)됐다.

그리고 1937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조지 6세[품위 있었지만 말을 더듬었다(decent and stammering)]의 대관식이 거행됐다. 그날부터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의 무게와 위험성을 감지했던 듯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불독처럼 굽힐줄 모르는 영국의 이미지(British bulldogindomitability)를 대표한 인물은 조지 6세가 아니라 윈스턴 처칠이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여동생 마가렛 공주는 안전한 곳으로의 피난을 거부하는 왕실의 상징(symbols of the royals’ refusal to play it safe from some distant imperial exile)이 됐다.

그들은 1940년 런던 대공습(the Blitz) 당시에도 왕궁을 지켰다. 두 공주의 어머니이자 조지 6세의 부인인 엘리자베스 왕비는 “그 애들은 나를 두고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 역시 국왕을 두고 떠나지 않을 것이며, 국왕은 절대 왕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런던 대공습 당시 버킹엄궁의 안뜰이 폭격을 당했다. 그리고 공주들의 임시거처였던 윈저성 역시 런던부터 브리스톨(영국 서부 항구)까지 이어지는 독일 공군 (Luftwaffe)의 공격 목표 안에 들어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영국은 긴축재정으로 움츠러들었다(shrunk into austerity). 조지 6세 국왕도 이전보다 더 수척해(gaunt)졌다. 19

47년 겨울은 영국인들이 기억하는 최악의 겨울이었다. 고기와 과자류가 철저한 배급제로 지급됐고, 기쁜 일이라곤 찾아보기 어렵던(meat, confectionery, and most forms of glee were still strictly rationed) 시절이었다.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공의 결

혼식은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절실하게 필요했던 국민 축제였다. 공주는 이미 공인으로서의 행동 요령(public tact)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신부 드레스 제작비에 보태려고 의류배급 카드(clothes-ration cards)를 모았다. 2000개의 진주가 박힌 드레스를 제작하려면 배급 카드를 한 트럭 분은 모아야 했겠지만 국민들은 공주의 이런 마음을 높이 샀다. 또 결혼식 다음날 그녀는 난초와 은매화 가지로 만든 신부 부케를 웨스트 민스터 사원의 무명용사 묘에 바쳤다. 전쟁의 상처로 슬픔에 찬 국민들에게 이런 제스처는 영국 왕실의 미래를 공고히 해주는 보증수표(money in the bank) 같은 역할을 했다.

1953년 6월 2일 거행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은 움츠러든 영국(전쟁의 희생으로 큰 대가를 치렀고 주요 식민지였던 인도가 독립했으며 세계 무대에서의 위상이 불확실했다)이 젊은 여왕과 오랜 전통을 지닌 화려한 왕실 행사(all the pageantry of the ages)를 통해 다시 한번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계기가 돼야 했다. 하지만 이 일에는 정확한 균형 감각이 필요했다. 영국인들이 먼 옛날로부터 이어진 연속성을 확인하기에 충분한 과거(enough of the past to give the British the reassurance of immemorial continuity)와 과거에 매몰됐다고 느끼지 않을 만큼의 현재와 미래(enough of the present and future for them not to feel entombed in their ancestry)가 균형을 이뤄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이 어려운 균형 유지(tricky equilibrium)에 본능적인 감각을 발휘했다. 그런 감각은 대관식 장면을 TV로 중계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을 때 특히 빛났다. 그녀의 대관식은 왕실의 존재를 화려하게(in all its splendor) 가시화할 절호의 기회였다. 또 BBC 방송으로서는 영국의 공적 생활에서 자사의 위상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였다. BBC 라디오의 시사해설가와 종군기자들은 어려울 때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resolute in adversity), 좋을 때는 기쁨에 들뜬 목소리로(jubilant in victory) 큰 반향을 이끌어내면서 영국을 대표하는 목소리(the collective voice of Britain)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언론의 생리를 잘 알았던(media savvy as he was) 처칠 총리는 대관식의 TV 중계 계획에 난색을 표했다(balked). 종교적 의식으로서뿐 아니라 국가적 의식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대관식을 직접 주관할 켄터베리 대주교도 마찬가지였다. 조프리 피셔 당시 대주교는 TV 조명이 이미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을 뿐 아니라 대관식 때 여러 겹의 예복을 입어야 하는 젊은 여왕을 매우 불편하게 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TV 중계를 반대한 진짜 이유는 TV가 대관식의 신성한 의미를 흐리게 하지 않을까 우려해서였다. 그는 영국의 기독교인들이 가까운 교회에 모여서 이 엄숙할 의식의 의미를 함께 나누기를 바랐다.

또 처칠은 머리에 관을 쓰고(coroneted) 담비털 장식이 달린 의상을 차려 입은 귀족들의 모습이 TV에 비치게 되면 국민들에게 이 나라가 여전히 상류층의 지배를 받는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까 우려했다. 한편 그는 TV 중계를 하지 않을 경우 국민들이 왕실과 지도층에 거리감(grand remoteness)을 갖게 될 것 또한 우려했다. 처칠 내각은 엘리자베스의 양해도 얻지 않은 채 대관식 장면을 TV로 중계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엘리자베스는 정부에 “대관식의 주체는 내각이 아니라 나다”라고 말했다고 알려졌다. 그녀는 77세 고령의 총리가 머무적거리는 동안 주도적으로 일을 진행했다(taking hold of the process).

그리고그녀의 단호함에 놀란(Struck by her clearresolution) 처칠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gave in). 당시 영국 국민 3600만 명 중 56%가 대관식 장면을 TV로 지켜봤다. 여왕은 1761년 조지 3세의 대관식 때 제작된 황금마차를 타고 버킹엄궁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까지 갔다. 아이젠하워라는 이름을 가진 말을 포함해 6필의 말이 마차를 끌었다. 그리고 세 시간에 걸친 식이 끝난 뒤 여왕의 긴 행렬은 수많은 군중(이들은 여왕의 행렬을 구경하려고 밤새 비를 맞으며 자리를 지켰다)을 지나 다시 버킹엄궁으로 향했다.

영국인 32%는 현장에 나가 있던 라디오 시사 해설가들이 전하는 대관식 중계를 들었다. 또 유럽인 수백만 명이 생방송으로 대관식을 지켜봤고, 미국의 많은 시청자는 캐나다로 긴급 수송된(flown at jet speed) 필름을 통해 시청했다.



대주교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could not have been more wrong). 대관식 TV 중계는 나라를 “분열시키기(disintegrating)” 는커녕 단합시키는 계기가 됐다. 당시 우리 동네에는 TV가 몇 대밖에 없었는데 우리집에 한대가 있었다. 9인치 스크린이 커다란 호두나무 케이스에 달린 확대경(a magnifier strapped to the massive walnut cabinet)을 통해 좀 더 크게 보였다. 우리는 샌드위치와 케이크를 준비해 놓고 이웃 사람들을 불러 함께 TV를 시청했다(대관식 당시 영국 전역에서 이런 모습을 흔히 볼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유행하던 ‘대관식 기념 닭 요리(Coronation Chicken)’는 먹지 않았다. 살구와 건포도를 곁들인 묽은 커리 국물을 끼얹은 이상한 닭요리였다.

엘리자베스는 과거 대관식에서 발생했던 불상사(the history of coronation disasters)를 잘 알고 있었다. 국민의 미움을 받았던 조지 4세는 1821년 배가 터질 듯 뚱뚱한 몸에 진홍색 벨벳 망토를 두르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복도를 뒤뚱뒤뚱 걸어내려가는 흉측한 모습으로 기억됐다. 별거 중이던 왕비는 대관식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또 손가락이 가늘었던 빅토리아 여왕은 대관식에서 끼게 될 반지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도록 새끼손가락용으로 제작됐는데 이를 잊은 대주교가 여왕의 가운데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바람에 큰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은 너무 흠이 없다(nothing would go wrong)는 게 흠이었다. 여왕은 대관식 몇 주일 전부터 버킹엄궁에서 제국왕관(Imperial State Crown)을 쓰고 예행연습을 했다[여왕은 이 왕관을 자신의 “업무용 왕관(working crown)”이라고 불렀다]. 대관식 당일 왕관의 무게에 눌려 자세가 구부정해지거나 목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는 일을 방지하기 (there would be no hint of stoop or crick) 위해서였다. 하지만 실제 대관식에서 쓰게 될 에드워드 국왕의 순금 왕관[다른 대다수 왕권상징물(regalia)과 마찬가지로 찰스 2세 국왕을 위해 제작됐다.

찰스 2세는 아버지 찰스 1세가 청교도 혁명으로 처형된지 11년후인 1661년 즉위했다]은 무게가 2.3kg에 육박해 감당하기가 더 어려웠다(was still more daunting). 젊은 여왕이 쓰기엔 너무 무겁다는 논란이 일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전통대로 진행할 것을 고집했다. 엘리자베스는 대관식의 모든 절차를 사전에 점검했다(Nothing would be left to chance). 여왕답게 자세를 반듯하게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Carriage was everything). 그래서 그녀는 목과 어깨에 두르게 될 무거운 천들을 모두 걸치고 식의 각 단계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속도의 걸음걸이를 연습했다(practiced walking at the various paces demanded by the different stages of the ceremony). 그중에서도 왕관을 쓰기 위해 무릎을 꿇는 순서가 특히 중요했다.

이런 철저한 연습에도 불구하고 여러 겹의 의복을 겹쳐 입는 무거운 대관식 예복은가냘픈 체구의 여왕이 감당하기에는 꽤 벅찼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향하는 황금마차에 탄 여왕은 담비털과 금 장식이 들어간 벨벳 망토를 둘렀다. 여왕이 사원 복도를 걸어내려갈 때 5m가 넘는 망토 자락(train)을 시녀들(maids of honor)이 붙잡고 따라 갔다. 엘리자베스는 대관식 절차 중 성유 도유식(anointing)을 지극히 개인적인 의식으로 여겨 이 부분은 TV 중계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때는 겸손의 표시로(as a sign of humility) 망토를 벗고 단순한 흰색 주름 드레스 차림으로 앉아서 의식을 치렀다.

찰스 1세 당시 방식대로 자스민과 오렌지 꽃, 사향액(musk civet), 증류시킨 계피액(distilled cinnamon), 용연향(ambergris)을 넣어 만든 성유가 여왕의 머리 위에 십자가 모양으로 발라졌다. 그 주름 드레스 안에 디자이너 노먼 하트넬이 제작한 새틴 드레스를 입었다. 거기에는 왕국과 영연방 각국을 상징하는 식물(botanical emblems) 모양의 아플리케들이 붙어 있었다. 잉글랜드를 상징하는 장미와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엉겅퀴(thistle), 호주를 상징하는 워틀(wattle, 아카시아의 일종), 뉴질랜드를 상징하는 양치류(fern) 등이다. 왕관을 머리에 쓰는 단계[1300년 에드워드 1세 국왕을 위해 제작된 ‘좌석(seat)’에 앉아 지혜와 성실을 상징하는 황금 보주(orb)와 권장(scepters), 완장(armbands)을 받는다]에서는 여기에 금색 제의(a dalmaticof gold cloth)를 입고 그 위에 담비털로 장식된 커다란 자주색 벨벳 망토를 두른다.

여왕은 이 엄청난 무게의 예복을 입은 채 약 250명의 행렬을 거느리고 천천히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나와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황금 마차에 올랐다. 대관식 날짜(6월 2일)는 날씨가 맑을 확률이 높은 날로 정해졌지만 영국 날씨답게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수많은 왕족 하객 가운데 통가 왕국의 살로테 여왕은 마차 지붕을 열어 놓은 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활짝 웃는 모습을 보여줘 군중을 매료시켰다.



그들은 “통가의 여왕 만세(linger longer)!”라고 외쳤다. 화려한 색상의 제복을 입은 군인 수천 명이 말을 타거나 걸어서 행렬에 참가했다. 사람들은 몇 시간 동안 계속된 이 행렬의 매 순간을 즐겼다.저녁 때가 되자 여왕이 모후와 남편, 두 자녀(그중 한명인 찰스 왕자는 왕실 어린이로는 처음으로 대관식에 참석했다)와 함께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버킹엄궁 앞 광장의 빅토리아 여왕 기념비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목청껏 환호하며(by the full-throatedroaring) 그들을 반겼다.

여왕이 스위치를 돌리자 전쟁의 그을음이 가시지 않은(stillstoody)이 유서 깊은 도시 전체가 환히 밝혀졌다. 트라팔가 광장의 분수대도 평소의 영국 분위기와 달리 활기 찬 빛(exuberant radiance)이 흘러넘쳤다. 전쟁 동안 형성됐던 ‘모든 국민이 한 가족(the sense of national family)’이라는 일체감은 전쟁이 끝나자 금세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거리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소시지와 맥주로 파티를 벌이며 한껏 기분을 내던 이 날 그 일체감이 다시 큰 물결처럼 밀려왔다. 화사한 꽃무늬 옷을 입은 여인들이 환한 얼굴로 ‘윈저 왈츠’를 불렀다. “당신은 내게 미래를 약속했고,난 당신에게 내 마음을 주었죠(You gave me your promise. I gave you my heart).” 하지만 딸기 아이스크림이 녹고, 대관식 축하 케이크가 망가져갈 무렵 영국인들의 마음 속엔 전후의 어려운 형편을 잊게 해주는 단 하루의 여유(just a day of light relief)보다 중요한 무엇이 남아 있었다.

인구가 많은 데다 경제력이 고갈된 이 작은 섬나라의 국민들은 자기비하(self-deprecation)적인 성향이 강하고 정치인부터 날씨, 지나치게 높은 물가, 혐오스러운 외국인까지 모든 것에 불만을 터뜨리기 일쑤였다. 이들에게는 한번이라도 영국인이라서 행복하다고 느끼게 만들어줄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필요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권장과 보주를 들고 에드워드 국왕의 ‘좌석’에 앉아 군주로서의 모든 짐과 희생을 감수하겠느냐는(whether she would fulfill all the burdens and sacrifices of a monarch) 대주교의 엄숙한 질문에 특유의 약간 높은 음색으로(in slightly piping pitch)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I will)”라고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안을 돌아나와 거리를 울리고 바다 건너까지 전해졌다. 공화제 지지자들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그 목소리를 불신하거나 조롱하지 않았다. 그다음 60년 동안 그녀는 위엄 있는 여왕의 모습을 보여줬다. 마차와 근위대의 행렬,궁의 티파티 등으로 축하할 영광의 순간도 많았지만 불행과 시련(disasters and trials)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1953년 대관식에서 한 약속을 고지식하고 성실하게 지켰다. 이 특이한 나라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여왕으로서 국민들을 편안하게 보살피는 역할 (comforting role of national matriarch)에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6월 2일 여왕 즉위 60주년을 축하하려고 템즈 강둑과 런던 거리에 모여들 수많은 군중이 안도의 한숨과 격려의 미소를 아끼지 말아야 할(why no one should begrudge her a sigh and a smile)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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