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유리천장을 깨다
삼성 유리천장을 깨다
한국 여성의 지위는 그동안 발전을 거듭했다. 오랜 가부장적인 유교 전통(patriarchic Confucian tradition)을 가진 한국은 오는 12월엔 어쩌면 첫 여성 대통령을 맞을지도 모른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현재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또 한국 국회의원의 16%가 여성이다. 어느 때보다 높은 비율이다.
한국은 여성 장관, 여군 장성, 여성 전투기 조종사, 대법관, 심지어 우주비 행사도 배출했다. 그러나 여성이 들어가기 쉽지 않은 곳이 있다. 기업 임원실이다(corporate boardrooms).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의 놀라운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기업에서 여성은 뒷전에 밀려나 있었다(women have taken a back seat in the corporate world).
그러나 한국의 마지막 유리천장(glass ceiling,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 막는 조직 내부의 보이지 않는 장벽)을 기업이 나서 깨기 시작했다.한국 최대의 기업 그룹인 삼성(21만 명 이상을 고용하고 연간 매출이 2000억 달러다)은 올해 초 정기 임원 인사에서 여성 9명
을 임원으로 승진시켰다. 특이한 점은 그중 세 명이 말단 사원부터 시작해 승진한 첫 삼성 여성 임원들이라는 사실이다(What was unusual was that they were the first Samsung female executives who started from the bottom).
이전에도 삼성에 여성 임원들이 있었지만 전부 외부에서 발탁했다. 그러나 이번에 승진한 신임 여성 임원들은 1992년 삼성이 한국 대기업 중 가장 먼저 고용의 성차별(gender discrimination)을 없앤 뒤 처음 입사한 여직원 1기였다. 직종간 남녀 차별없이 공채를 하기로 한 이건희 회장의 결정은 당시에는 급진적(radical)으로 간주됐다.
휴렛팩커드(HP)의 18%, IBM의 23%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미국여성임원협회(NAFE)의 2010년 자료]. 다른 국내 기업들은 그 비율이 더 낮다. 현대나 LG 같은 글로벌 대기업들에는 여성 임원이 많아야 10여 명 정도다. 한국에선 기혼 남성의 83%가 직장이 있지만 기혼 여성의 경우 그 비율은 49%이며 대부분 낮은 직급으로 일한다.
경제 규모가 세계 12위이고 글로벌 기업 브랜드가많은 한국에 여성 임원이 그처럼 적다는 것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It is a mystery that the world’s 12th largest economy with many global corporate brands has such few women executives).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김태홍 실장은 “한국의 경제성장 잠재력은 여성 인력, 그중에서도 특히 기업체 임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크게 약화됐다”고 말했다.
“한국이 고학력 여성을 활용하지 않는 것은 큰 낭비다.”이건희 삼성 회장은 일찍이 여성 인력의 잠재력을 알았다(Samsung Chairman
Lee, however, saw the potential of female workforce very early in his management career). 1987년 삼성 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뒤 한국 여성이 기업계에서 활용도가 너무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 받았다(he was shocked how underused Korean women were in the corporate world). 여직원이 있었지만 대부분 상고 출신으로 주로 타자를 치거나 주판으로 회계 업무를 맡았다. 1980년대 중반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 여성이 대거 대학을 졸업했다.
한국에서 여성이 집단으로 고등교육을 마친 첫 세대였다. 그러나 대다수는 기업들이 받아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사 학위를 썩혀야 했다(Most of them, however, wasted their college degrees as no corporations would take them). 1992년에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여성의 39%만이 채용됐다. 그러나 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다른 나라는 남녀가 합쳐서 뛰고 있는데, 우리는 남자 홀로 분투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마치 바퀴 하나는 바람이 빠진 채로
자전거 경주를 하는 셈”이라고 남성 중심의 기업문화를 비판했다.
그래서 1992년 삼성은 대부분 대졸자인 여성 250명을 채용했다. 다음 해엔 그 수를 500명으로 늘렸다. 그들은 여성에게 적합하다고 간주된 소프트웨어나 디자인 등의 부서로 배치됐다. 그러나 남성이 지배하는 경영진의 저항이 심했다(But resistance from male-dominated management was formidable). 계열사 고위 임원 중 다수는 여직원을 거부했다. 이유 중 하나는 여성 대다수가 한국 기업의 과도한 음주 문화(Korea’s excessive corporate drinking culture)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의 비즈니스 접대에서 음주는 필수다. 마지 못해 여직원을 할당 받은 경영진은 그들에게 커피를 타거나 책상을 닦는 허드렛일(menial chores)을 시켰다.
“매일 아침 상사 약 10명의 책상을 닦고 보리차를 준비해야 했다”고 삼성 그룹 최초의 여성 부사장인 제일기획 최인아 부사장이 돌이켰다. “내가 하는 그런 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다른 직원들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했다.”
이 회장은 그런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다.1994년 ‘열린 인사 개혁’을 선언하고 대우와 급여에서 남녀 차별을 없앴다. 예를 들어 냉
장고를 살지 말지를 결정할 사람은 주부인데 주부의 성향을 더 잘 이해하는 여성 임원이 없다면 삼성이 어떻게 좋은 냉장고나 가전제품을 만들 수 있겠느냐(how Samsung can make good refrigerators and other white goods when it has no female executives who better understand housewives’ needs)는 생각이었다.
1995년 그는 여직원 유니폼을 없앴다. 이 역시 한국 최초였다. 화이트칼라 여성 근로자들은 한국에서 오랫동안 유니폼을 착용했다. 군대식 기업 문화를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유니폼은 순응과 기강의 상징”이라고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과)는 말했다. “유니폼 금지는 여성을 해방시키고 그들의 긍지를 회복시켜 주었다.” 삼성이 그런 조치를 취하고 난 뒤 다른 여러 한국기업도 여직원 유니폼을 없앴다.
이 회장의 개혁 드라이브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최소한 신입 사원의 20%를 여성으로 뽑도록 지시했고 자녀를 둔 여직원들을 배려해 어린이집을 설립했다.1997~98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한국 기업들은 여성을 우선적으로 구조조정의 대상으로 삼았고, 채용에서도 가장 불이익을 줬다(During the 1997-1998 Asian financial crisis, women were the first ones to be fired and last ones to be hired in Korea). 하지만 삼성은 달랐다. 여성을 계속 채용하고 그들에게 투자했다.
현재 삼성은 어린이집 57개(직장어린이집 26개, 지역어린이집 21개)를 운영하며 약 7000명의 어린이를 돌본다.임신한 직원은 배가 부르기 전부터 식별 목걸이를 지급받아 특별 대우를 받는다. 모든 계열사에는 임산부가 쉴 수 있는 ‘맘스룸(mom’s room)’이 설치돼 있다.삼성엔지니어링 석유화학사업본부의 정미진 과장에게는 그런 혜택이 큰 도움이 됐다.
2005년에 첫 아이를 출산한 정 과장의 가장 큰 어려움은 육아였다. “3개월의 출산휴가를 받아 100일까지는 아이를 직접 돌봤지만, 그 이후에는 언니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아이의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아이가 아플 때 마다 일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고 정 과장은 돌이켰다.
그러나 바로 그때 처음으로 회사에 ‘맘스룸’이 생겼다.그녀는 힘들 때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재충전을 할 수 있었다. “정말 구세주였다. 그때 그만두지 않아 너무 다행이다.”삼성의 다음 목표는 여성 임원의 비율을 지금의 2%에서 2020년까지 10%로 높이는 것이다. 야심적인 목표다. 한국의 기업 문화는 여전히 남성 우월주의가 남아있다(Korea’s corporate culture is still male chauvinistic). 여성 상사들은 남성 부하직원들에게 종종 무시당하며 심지어 희롱을 당하기도 한다.
남성 직원들끼리의 유대를 다지는 과도한 음주도 여전히 성행한다(heavy drinking for male bonding is still rampant).더 중요한 문제는 여직원들 스스로의 자격지심이다. 삼성전자에서 인사부장과 연수부장을 지낸 한국인재전략연구원의 신원동대표는 “막상 취업해서 일하는 여성들조차
자신들이 태생적으로 남성보다 업무 성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들은 이런 장벽을 허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회식 문화가 술자리 대신 공연 관람이나 스포츠 행사, 또는 가벼운 와인 파티로 바뀌어가는 것도 그런 변화의 일환이다. 출산 휴가(maternity leaves)도 길어지고 어린이집도 더 많이 생겨난다. 남성의 군경력을 인정하던 ‘군필자 우대(extra points for military service in getting jobs)’도 폐지됐다.
삼성에선 이건희 회장이 여직원들과 자주 점심 식사를 한다.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생각이다. 최근의 한 여성 임원들과의 오찬에서 이 회장은 이제 “여성이 사장까지 돼야 한다”고 격려했다. 한국 대기업 최초로 삼성에서 여성CEO가 등장한다면 20년 전 시작된 이 회장의 여성경영이 멋지게 마무리되는 셈이다(That would nicely complete his crusade for women’s ascent 20 years ago).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윤여정 자매' 윤여순 前CEO...과거 외계인 취급에도 '리더십' 증명
2‘살 빼는 약’의 반전...5명 중 1명 “효과 없다”
3서울 ‘마지막 판자촌’에 솟은 망루...세운 6명은 연행
4겨울철 효자 ‘외투 보관 서비스’...아시아나항공, 올해는 안 한다
5SK온, ‘국내 생산’ 수산화리튬 수급...원소재 조달 경쟁력↑
6‘국내산’으로 둔갑한 ‘중국산’...김치 원산지 속인 업체 대거 적발
7제뉴인글로벌컴퍼니,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두번째 글로벌 기획전시
8의료현장 스민 첨단기술…새로운 창업 요람은 ‘이곳’
9와인 초보자라면, 병에 붙은 스티커를 살펴보자